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801
3부 216화 액년(厄年)
1925년 2월, 북경에서 중화민국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광동 호법정부와 직례군벌, 중국 각지의 반(反)안휘군벌 세력이 모여 중국의 미래를 논하는 회의였다.
남경의 북양정부는 불법적 회의라고 강력히 비난했지만, 최대 물주인 일본에서 군사적 방식이 아닌 외교적 타협을 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일본은 작년 최초의 보통선거로 의회가 선출되어, 자유주의 세력인 입헌민정당의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출범하였다.
대외 온건파였던 와카쓰키는 관동대진재의 상흔을 극복하고자 경제안정과 평화정책으로 전환했고, 1925년 2월 소련과 일소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상호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오랜 적대관계였던 일본과 소련의 수교는 동아시아 전체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입헌민정당 정부는 대중국 정책도 불간섭 정책으로 전환했고, 후원자인 일본의 정책 변화에 단기서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단기서는 태도를 바꿔 국민회의에 타협 의사를 전했고, 손문은 타협에 의한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면 북양정부 대표도 국민회의에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중국에 평화가 정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정작 의장으로 초빙된 손문은 회의장에 설 수 없었다.
말기에 접어든 간암의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쓰러질 수 없는데……!”
병마에 쓰러져가던 손문은 원통함을 금치 못했다.
오랜 투쟁 끝에 광동에 혁명 기반을 마련하고, 소련 및 한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웠다. 대의명분과 군사력을 갖추자 국민당을 무시하던 군벌들조차 대화와 타협에 응했다.
이제 막 중국 통일의 첫발을 떼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쓰러지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총리. 유촉(遺囑)을 남겨주셔야 합니다.”
손문의 곁에 있던 왕조명이 유촉, 즉 정치적 유언을 부탁했다. 손문은 본래 자신의 유언이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죽음을 앞에 두자 유언을 작성했다.
「내가 이번에 북경에 온 것은……. 기반을 포기함으로써 평화통일을 추진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와 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손문의 마지막 당부는 국민당은 반드시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국민당을 후원하는 소련 및 한국과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직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중화민국에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의 원칙을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 달라.」
손문의 구술을 받아 적은 왕조명이 물었다.
“가족분들에 대해서는……?”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재산 일체는 나의 처 송경령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
상해 대부호의 딸인 송씨 3자매(宋家姐) 중 둘째인 송경령(宋慶齡, 쑹칭링)은, 1915년 무려 26살 연상인 손문과 결혼하였다. 유언에서 가족들에 대한 언급을 일체하지 않던 손문도 젊은 아내는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동지들. 고군분투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게 하여, 삼민과 오권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3월 11일, 마지막 유언을 남긴 손문은 이튿날 12일 동지와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향년 60세. 혁명운동에 투신한 지 30년 만이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혁명을 이끈 혁명가는, 자신의 이상을 미쳐 다 펼쳐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대원수!”
“총리의 유촉을 계승하여, 반드시 중국을 삼민주의의 이름으로 통일하고 오권을 이룩하겠습니다.”
눈을 감은 손문의 시신 앞에서, 임종을 지켜본 왕조명과 장중정 등은 맹세했다.
손문은 사후 신해혁명을 이룩하고 중화민국을 성립한 위대한 혁명가로 높이 떠받들어졌지만, 정치적 유산을 놓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구심점을 잃은 국민회의는 공전(空轉)만 일삼다가 별다른 성과 없이 4월에 폐회되었고, 군벌들은 손문을 향해 절절한 추도문은 읊어 댔지만 정치적 유언은 무시했다.
손문의 후계자들은 그 자리를 놓고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확고부동한 2인자인 국민당 총재 송교인이 호법정부 육해군대원수 겸 국무총리를 승계했지만, 문제는 그 자신도 폐병 환자라 직무를 오래 유지할지 의문이었다.
국민당 우파를 대표하는 호한민, 좌파를 대표하는 왕조명, 그리고 군부를 대표하게 된 장중정이 권력의 향방을 지켜보았다.
손문 사후, 중국 대륙에서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국민당은 북벌을 선언하고, 손문의 유해를 모신 북경까지 진격하리라고 다짐했다.
이제 남은 건 군사력에 의한 성패였다.
* * *
“대한제국 정부는 중화민국의 지도자 손문 총리의 서거를 비통하게 여기며, 중국 국민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 사흘간 조기를 게양하여 슬픔을 함께하겠다.”
손문의 서거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 정부는, 조기를 내걸고 애도기간을 선포하여 외교적 예의를 다했다.
총리 전봉준과 손문은 서로를 한국과 중국 민중의 지도자로서 높이 평가했기에, 전봉준은 직접 조의문을 써서 애도를 표할 정도였다.
“손 총리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중국에서는 일대 내전이 벌어질 거요. 당분간 중국 정세를 잘 지켜봐야 하오.”
“예, 폐하.”
“일본과 소련의 수교는 예상되었던 일이니, 너무 놀랄 것도 없소. 일본은 대한처럼 백군 정부를 보호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니. 입헌민정당 정부가 대외 온건정책과 경제발전에 힘쓰는 건 우리에게 좋을 수도 있소.”
한국은 일본의 대외정책 변화에 촉각을 기울였다.
일소수교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우익은 배신을 운운했지만, 이선은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수교가 곧 외교적 밀착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입헌민정당의 롤모델이자 최대 우방인 영국이 소련과 수교하고 관계회복에 나서니, 이를 참조했을 공산이 컸다.
“소련과 관계개선에 나설 명분이 되겠군. 우리는 아무르 정부 때문에라도 공식적 적대관계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익대표부 정도는 설치할 수 있도록 추진해 보시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전봉준 내각의 외무대신 김규식은 소련과의 물밑협상을 이어 나갔지만, 우익에서는 대소 유화정책을 비난하는 여론이 적잖았다. 때마침 일본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관계개선의 필요성과 명분을 준 셈이 되었다.
‘손문, 향년 60세라. 사인은 간암. 이 시대에 60이면 죽음을 염두에 둬야 할 시기지. 암은 치료할 방법도 없고…….’
이선은 손문의 죽음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웃나라 지도자이자 역사의 거인이 세상을 떠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자신과 동년배인 국가지도자의 죽음이 못내 신경에 쓰였다.
1866년 11월생인 손문보다 1년 반 늦게 태어난 이선의 나이 어느덧 쉰여덟.
놀랍게도, 조선 27명의 군주 중에서 일곱 번째로 장수하는 중이었다.
이선보다 장수한 군주는 태조(74세), 정종(63세), 광해군(67세), 숙종(60세), 영조(83세), 고종(70세)이었다.
숙종과 영조를 제외하면, 장수한 군주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태조, 정종, 광해군, 고종 모두 선위하거나 폐위되어 말년을 상왕이나 폐왕으로서 유유자적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
태조와 정종이 무인 출신이자 타고난 무골(武骨)로 나이 들어 즉위하여 짧게 재위했음을 감안하면, 후손들과 비교할 때 예외적인 존재였다.
광해군이나 고종은 진작 퇴위하지 않았더라면, 저 나이까지 살았을지도 의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46년이나 재위했던 숙종도 말년에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만 했다.
정말 예외적인 군주는 유일하게 80대까지 장수했던 영조로,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군주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역시 장수의 비결은 선위 내지 대리청정인가……. 확실히 이 자리가 오래 살기 힘들지.’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6년 만에, 이진을 유럽 여행 보내고 다시 내정까지 총괄하게 된 이선은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총리는 짐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데, 건강의 비결이 궁금하구려.”
“황공하옵니다. 신은 젊은 시절부터 쓸데없이 튼튼한 몸이다 보니…….”
전봉준은 이미 나이가 만으로도 70이었지만, 건강은 여전했다.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노동을 해 왔고,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텃밭농사를 지으며 육체노동을 해 왔기에 체격은 작아도 튼튼했다. 더욱이 소식(小食)하고 음주와 흡연도 자제하니, 건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적게 먹고, 술 담배 안 하고, 운동 많이 하는 게 장수의 비결이란 말이지.’
이선은 역대 선왕들과 달리 젊은 시절부터 운동은 열심히 했으나, 나이 들면서 그조차도 힘들고 쉽게 피로해졌다. 담배는 끊었지만, 하루의 스트레스를 음식과 술로 푸는 이선으로선 의지대로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선의 통치 스타일이 건강을 갉아먹는 최대 원인이었다.
국가의 내정 사안 대부분은 내각에 위임했지만, 황제인 이선이 확인하고 결재해야 할 공문서는 한도 끝도 없이 많았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침수(寢睡)에 드심이…….”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어떻게 자나? 괜찮으니 그대들이 먼저 퇴청하게.”
더욱이 이선은 성격상 관료들에게 모든 걸 위임하고 내버려 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만기친람하는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 스스로 조절하려고 해도, 국가에서 중대사가 터지면 불철주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뇌했다.
특히 올해 같은 경우에는, 쉽게 대처할 수도 없는 천재지변이 문제였다.
* * *
광무 29년(1925), 을축년(乙丑年)은 한국인들에게 ‘액년(厄年)’이라고 불리며 나쁜 의미로 잊지 못할 한 해였다.
여름,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폭우가 한반도를 덮쳤다.
7월에 대만 인근에서 생성된 태풍은, 중국 남부를 거쳐 11일 한반도 남부지방에 상륙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비가 이렇게 많이 올 수가 있나…….”
“살다 살다 이렇게 비 많이 오는 건 처음 보네.”
시간당 강수량은 무려 300mm에 이르렀고, 황해도 이남의 모든 강이 범람했다. 말도 안 되는 폭우에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 유역에서는 난리가 났다.
“정부는 즉시 재난을 극복할 비상대책을 세우고, 이재민을 구호하라.”
전례 없는 폭우와 홍수에 정부는 비상대책에 나섰다. 정부는 특별예산을 편성하고, 황실은 올해 내탕금을 예산에 보탰다.
이재민을 구호하고, 제방을 보호하고, 물자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노력을 기울였다.
문자 그대로 비상사태에, 황제부터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의 변덕 앞에 인간의 노력은 한계가 있었다. 1차 폭우의 물이 채 빠지기도 전, 대만 인근에서 다시 태풍이 형성되어 7월 15일에 한반도 중부지방을 직격했다.
15일부터 18일까지, 한강 일대에는 누적강수량이 무려 75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이어졌다.
연이은 홍수로 인해 한강의 수위는 무려 13m에 달했고, 홍수 대비를 위해 쌓았던 제방조차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둑이 무너진다! 모두 피해!”
“으아아아!”
한강에 접한 용산, 광진, 뚝섬, 송파, 잠실, 풍납 일대는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용산역이 물에 잠기고, 용산 야전군 사령부도 침수되었다. 용산을 지나 숭례문 근처까지 물이 밀려들어 오는 지경이었다.
관(官)의 피해도 엄청났으나, 민간의 피해는 더더욱 컸다.
“아이고, 우리 살림살이 다 떠내려갔네. 이를 어쩌면 좋나…….”
“이 사람아,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 강변에 살던 사람들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죽었어!”
을축년 2차 폭우는 역사에 기록된 이래,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 최악의 폭우이자 홍수였다.
가옥 1만여 채가 유실되고, 실종자도 200여 명에 달했다. 교통과 통신도 마비되고 말았다. 한강 인도교가 유실되고, 전차와 기차도 운행을 중단했다.
“폐하,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속히 환궁하심이…….”
수해현장을 방문한 이선에게,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던 내무대신 안창호가 환궁을 권했다.
“이게 다 짐이 부덕한 탓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내뱉는 말에, 주위의 관료들이 일제히 외쳤다.
“폐하! 어찌 그런 황공한 말씀을…….”
“전례 없는 폭우입니다. 천재지변을 어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란 모름지기 하늘과 소통하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던가? 하늘의 뜻을 살피지 못한 짐의 책임이다.”
신하들이 듣기에는 군주가 스스로 부덕을 탓하는 관례적 표현으로 들었지만, 이선은 정말로 자책하고 있었다.
‘을축년 대홍수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어린 시절에 할머니도 을축년 장마만큼 지독한 건 없었다고 했었지. 그런데 왜 기억을 못 했던 거지?’
이선이 새로운 세상을 산 지 어언 45년.
미래의 기억은 하나둘씩 망각으로 사라져 갔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정치·외교적 변화는 세세하게 기억했지만, 일상사의 측면까지는 모두 기억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역사에서도, 을축년 대홍수는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지변이었다. 647명이 사망했고, 2만 채가 넘는 가옥이 붕괴하거나 유실되었다.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물적 피해를 냈다.
그나마 원역사와 다른 점은, 진작부터 강 유역에 제방을 쌓고 산에 나무를 심은 덕에 홍수와 산사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빠른 산업화로 황성의 인구는 원역사 경성에 비하여 3배 가까이 많았지만, 피해는 확연히 적었다.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재난에 대응하는 정부의 비상대책 체계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일보했고, 소방과 구호 인력이 크게 증가했다. 도시계획을 체계적으로 다시 재정비했다.
역설적이게도, 지층이 쓸려 가는 바람에 파묻혀 있던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폐하, 유럽에 계신 황태자께서 속히 귀국하겠다는 전보를 보내셨습니다.”
“황태자가 귀국하겠다고 하면 내리던 비가 멈추나? 돌아올 때면 이미 다 끝나있을 터인데. 예정대로 일정 수행하라고 하라.”
이진이 본국의 홍수 피해에 책임감을 느끼고 귀국하겠다고 했으나, 이선은 예정대로 순방을 진행하라고 했다. 황태자의 책임도 아니거니와, 돌아오는 데 달포는 걸릴 터인데 의미도 없었다.
8월 초. 이번에는 새로운 태풍이 중국 남부를 타격하고, 한반도 북부를 관통해 일본 북부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도대체 이놈의 폭우는 끝나질 않는 거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3차 태풍은 관서를 직격했다. 그동안 홍수 피해를 입지 않은 북부지방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두만강이 범람했다. 한반도 전역과 남만주에 이르기까지 홍수 피해를 입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정부는 이재민 구호와 재난 복구에 최선을 다했으나, 예상을 깬 거듭된 천재지변에 망연자실할 지경이었다.
총리대신 전봉준과 내무대신 안창호는 관료들과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호와 복구에 앞장섰다.
“속이 쓰리군. 근래 술도 자제하고 식사도 줄이고 있네만, 위에 탈이 난 것 같아.”
신경이 온통 수재(水災)에 쏠려 있는 이선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신경통인지 위장 문제인지,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8월의 무더운 날, 액년은 결국 황실까지 덮치고 말았다.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이선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속에서 용암 같은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커헉!”
구토에 핏물이 섞여 있는 토혈(吐血)을 하는 황제를 보고, 황후와 자녀들은 누구랄 거 없이 경악했다.
“폐, 폐하!”
“아바마마!”
“어의, 어의를 불러라! 어서!”
황제의 연미복 하얀 셔츠에 붉은 피가 튀겼다.
“폐하, 속히 모시겠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서도, 이선은 급히 달려오는 어의를 향해 물었다.
“끝, 끝이 가까운가? 그렇다면 내가 후회할 일이 없도록 솔직히 말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