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804
3부 219화 태시(太始)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부덕한 몸으로 열성조의 홍업(洪業)을 계승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성을 다해 잘 다스리기를 결심한 지 28년이 지났다.
근년에 이르러 재변(災變)이 수차례 일어났고, 몸에 숙환(宿患)이 있었는데 근래 매우 심하여 청정(聽政)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태자 진은 영명(英明)하여 기량이 뛰어나고, 관인(寬仁)하여 덕이 깊으니, 군주의 자질이 하늘이 내렸다고 할 만하며, 대위(大位)에 오르기에 합당하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천의에 응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계통을 이어줌으로써, 억만년토록 무궁할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 주셨다.
태조 고황제는 왕위를 정종대왕에게 물려주었고, 정종대왕은 이어받아 태종대왕에게 물려주었으며, 태종대왕은 또한 세종대왕에게 물려주었다.
세종대왕은 성왕(聖王) 중의 성왕이었으니, 거룩한 공적과 훌륭한 교화로 요순시대와 같은 세상을 이룩하고 예악문물이 찬연하게 구비되었다.
……열성조의 선례를 따라 광무 29년 11월 20일에 태자에게 대보를 주어 국가의 기무(機務)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신년 1월 1일을 기해 즉위토록 하였다. 즉위 후에도 오직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만은 짐이 친히 청단(聽斷)하겠다.
그대들 대소신료와 국민은 모두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維新)의 경사를 맞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한다.
광무 29년 12월 22일.
대황제 교서(敎書).」
광무 29년 12월 22일, 공식적으로 선위 교서가 발표되었다.
정부는 공식적인 선위 절차에 돌아갔고, 중추원과 민의원에서도 의결했다.
“황제 폐하께서 선위하신다니, 마음이 아프군.”
“지금은 회복하셨다지만, 여름에 환후를 크게 앓으셨다고 하지 않는가.”
“회복되신 게 천만다행일세.”
모든 국민은 선위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 이선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한민족의 부흥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다.
태조의 창업과 태종의 왕업이 세종이라는 성왕의 치세를 이끌었으니, 이를 본받아 선위하겠다는 교서 내용은, 오히려 이선을 세종에 빗대게 하였다.
“세종대왕이 과거의 성왕이시라면,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날의 성왕이시네.”
“태조 고황제의 창업, 태종대왕의 왕업, 세종대왕의 성세(盛世)를 모두 이룩하셨지.”
“암, 암. 크도다, 왕화의 덕이여!”
국민은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시점이, 황제가 붕어한 이후가 아니라 선위를 발표한 직후라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숙환이 있어 태자께 선위하신다는 데, 무작정 반대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위대한 군주의 계승이라니, 태자 전하의 어깨가 무겁겠군.”
“황제 폐하께서 상황으로서 굳건히 계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겠나.”
국민은 선위와 동시에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고종과 달리, 이선은 선위하고도 배후의 실권자로서 남아 있으리라 짐작했다.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직접 청단이라. 군권을 말하는 게 아닌가?”
“태종대왕도 선위 후에 군권은 계속 쥐고 계셨지.”
“상황께서 실질적인 힘은 계속 갖고 계시겠군.”
이선은 군 통수권만큼은 확실히 자신의 손에 두려고 했다. 이진이 군대에 대해 서투르기 때문에 계속 장악하기보다는, 향후 다가올 대공황과 전쟁의 시대에 대비하려면 군권만은 내려놓을 수 없었다.
* * *
태시 원년(1926) 1월 1일.
광무 연간의 마지막 날이 마치고, 새해의 첫날이 밝았다.
변수가 없었더라면 광무 30년이 되었겠지만, 이제 광무라는 연호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을 의미하는, 태시(太始) 연간이 시작되었다.
신년하례를 대신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문무백관이 참석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외빈을 초청한 대관식은 6월에 개최하기로 하였기에, 오늘은 즉위를 선포하고 종묘에 서고(誓告)하는 전통적 의식을 갖추도록 했다.
황제를 상징하는 12류 면류관과 12장복을 입은 이선의 뒤로, 태자의 9류 면류관을 쓴 이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에 선위한다. 태시 원년 1월 1일.”
선위교서가 반포된 후, 이선은 황제의 12면류관을 친히 아들에게 씌어주었다. 이진은 고개를 숙이며 12면류관을 머리에 썼다.
황제의 의장을 갖춘 이진이 돌아서 문무백관을 바라보자, 일제히 만세가 쏟아졌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태자, 아니 새 황제를 향해 쏟아지는 문무백관의 만세구호를 들으면서, 황제 이진과 황후 타티야나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상황 이선과 황태후 김아영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조선 제28대 군주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 그리고 최초의 외국 출신 황후가 즉위하는 순간이었다.
「……짐은 오직 옳은 길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힘쓰겠다. 그대들 국민에게 좋은 계책과 방법이 있으면, 짐에게 기탄없이 말하라. 짐은 그대들의 말을 따르리라. 그대들은 나 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지나간 시대 못지않게 많은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
즉위 이튿날, 새 황제는 첫 교서를 발표했다.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황제, 입헌군주제의 군주가 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상황께 삼가 존호를 바치고자 합니다.”
황제로서의 첫 조치는, 상황으로 물러난 이선에게 존호를 올리는 것이었다. 정부와 중추원 역시 존호를 청원했다.
“내가 존호를 원치 않는다는 건 경들도 아는 일이 아닌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고종 태황제께옵서도 선위하면서 태상황의 존호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자식으로서 부황에게 올리는 당연한 효성입니다.”
30년 전 이선도 고종에게 존호를 올렸으니, 전례를 따라 사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선은 재위기간 내내 거듭 존호 받기를 거부하였으나, 딱 두 번만 허용하였다.
광무 5년(1901) 북벌(의화단전쟁)의 승전 직후, 그리고 광무 23년(1919) 대전쟁의 승전 직후였다.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황제만 비켜 갈 수 없다는 여론을 못 이겨서였다.
광무 5년에는 외훈홍업계기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이, 광무 23년에는 건행곤정영의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가 더해졌다.
“상황께 태상황의 칭호를 올리고, 지극한 덕과 위대한 공을 기려 성덕신공(聖德神功)의 존호, 성수무강을 기원하며 수강(壽康)의 존호를 올리며, 태상황궁의 칭호를 덕수(德壽)로 삼기를 의정하였습니다.”
이선은 공식적으로 태상황이 되었고, 성덕신공 수강의 존호 6글자가 더해졌다.
태상황이 거처하는 경운궁은 장수를 기원하는 덕수궁으로 명명되었다.
새 황제 이진은 경복궁을 법궁(法宮)으로 삼았고, 창덕궁을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서경(평양) 흥경궁은 태상황의 전례를 따라 매년 찾아가는 행궁이 되었다.
태상황 이선은 황성 덕수궁과 서경 흥경궁을 오가며 거처할 예정이었다.
“이제 나라의 큰일은 마무리되었으니, 소신은 총리직에서 사임할까 하옵니다.”
새 황제 즉위와 존호 존봉(尊奉)을 마지막으로, 총리 전봉준은 사임 의사를 밝혔다.
“총리의 사임을 원치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새 황제가 즉위하셨으니, 총리도 그에 맞는 새로운 인재가 됨이 합당합니다.”
이선뿐만 아니라 이진도 거듭 말렸지만, 전봉준의 뜻은 확고했다.
“작년 여름 수해의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 책임을 져야 한다면, 총리인 신이 지는 게 마땅합니다. 하물며 신은 늙고 병들었으니,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습니다.”
황제가 선위하였으니 총리도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적잖았다. 아무리 이선이 신임 의사를 밝히며 사임에 반대한다고 해도, 전봉준을 향한 비판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제2당으로서 합종연횡을 통해 어렵게 정권을 잡은 데다, 전봉준에 반대하는 보수우익의 세력이 만만찮기 때문이었다. 전봉준은 신진 연립정부를 지키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신은 단지 총리에서 물러날 뿐,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건 아닙니다. 의원으로 돌아가 정부를 굳건히 지지하겠습니다.”
“경의 뜻이 정 그렇다면, 후임은 누가 좋겠소?”
“의정대신 안창호가 승계하는 게 마땅합니다.”
총리가 사임하면 서열 2위인 의정대신이 승계하는 게 원칙이었다.
자신의 소속 정당인 진보당이 아닌 신민당의 안창호에게 총리 자리를 넘기겠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봉준의 목적은 연립정부의 성공이었다.
안창호는 의정대신 겸 내무대신으로서 수해 극복을 위해 노력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침식을 잊어가며 최선을 다한 안창호의 필사적인 노력은 야당과 반대파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월한 연설력으로 대중적 인기도 높고, 친화력도 좋은 안창호를 반대하는 여론은 크지 않았다.
“안창호 의원을 신임 총리대신으로 선출합니다.”
태시 원년 2월, 전봉준이 사임하고 안창호가 국무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다. 진보-신민-사회-신대한당이 찬성표를 던지고, 개화당도 굳이 반대하지 않고 기권함으로써 무난히 과반을 넘겼다.
황제 이진은 총리 선출을 재가하고,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제11대 총리대신 안창호는 만 47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나와 진보당은 총리와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겠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창호의 총리 취임은 전봉준의 대승적인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 40년의 정치적 투쟁 끝에 쟁취한 총리직이 어찌 아깝지 않겠느냐마는, 전봉준에게 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총리직을 계속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개혁정책의 성공적인 집행과 연속성이 중요했다.
“위로는 성지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의를 대표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교육자, 계몽사상가, 협동조합운동가, 자유주의 정치가인 안창호는 개화 이후 새로운 세대를 대표했고, 태시라는 새로운 시대의 첫 총리로서 상징적이었다.
* * *
“황후가 회임하였으니 즉위 원년부터 경사로다.”
작년 11월 이선이 이진에게 선위를 선포한 이유 중 하나는, 타티야나가 회임하였기 때문이었다.
출산 예정일은 봄, 4-5월경이었다. 시일을 따져보면 유럽 순방 중에 회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유럽에 보내길 잘하였구나, 하하. 여행 중에 새삼 부부간 운우(雲雨)의 정이 싹튼 게지.”
“폐하…….”
이진과 타티야나는 얼굴을 붉혔다.
사실 이선의 짐작이 틀린 게 아니었다. 인종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동양 황실에 적응하는 것에 굉장한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던 타티야나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유럽에 가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여름 휴양을 보내면서 부부간의 애정은 새삼 싹텄고, 제국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생명을 잉태했다.
「금년은 대발해국이 멸망한 지 꼭 1천 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써 한민족은 오랫동안 누볐던 만주를 상실하였으나, 금세기에 이르러 국력이 신장하여 대발해의 위용을 되찾게 되었다.
대발해는 어떤 나라인가? 고려, 말갈, 거란, 실위(몽골), 회흘(위구르), 속특(소그드) 등 다양한 민족이 연합하여 번영을 이룬 나라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한을 보지 않는가? 대한은 대청과 연해주(아무르)를 형제지국이자 혈맹으로 두고 있다. 그 민족구성원은 한인(韓人), 만주인, 지나인, 몽골인, 퉁구스인, 러시아인에 이른다. 실로 현대의 대발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적인 해에 태시 원년이 시작되어, 대발해의 영광을 재현함이 참으로 영광스럽다.」
1926년은 공교롭게도 발해 멸망 1천주년이 되는 해였다.
‘대발해주의’를 제창해 온 신대한당의 신채호는 역사적인 해가 밝았다고 선포하였다.
만주와 연해주를 세력권으로 얻은 대한제국은, 그 역사적 선례를 발해에서 찾았다. 그 강역이 오늘날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고, 다민족적 성격을 가진 발해는 대한제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부합했다.
때마침 즉위한 황제 이진과 황후 타티야나는 제국과 민족의 결합을 의미했다.
고리타분한 중화론자나 폐쇄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외국인 황후를 달갑잖게 여겼으나, 다민족제국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훌륭한 상징성이 없었다.
러시아제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동로마제국의 계보를 계승한 로마의 후예이자, ‘하얀 칸’으로 자처하며 금장칸국의 계보를 이은 몽골제국의 후예이기도 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공주인 타티야나 로마노바는 그 정통을 계승했다.
이진과 타티야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동양의 천명과 로마와 유라시아의 계보를 모두 계승한 운명의 후계자였다.
태시 원년 4월 25일.
한창 봄꽃이 피는 시기에, 황후 타티야나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예정일보다 좀 빠르지 않소?”
“지난번에도 그러하였듯, 출산이 예정보다 빠른 건 예사로운 일입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내의 출산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이진은 새삼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아파요?”
어느덧 네 살, 말이 제법 능숙해진 장녀 이나가 초조해하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니, 아니란다. 곧 네 동생이 태어날 거야.”
“내 동생? 정말로?”
“그래, 너와 함께 살아갈 동생.”
이진은 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오. 3년 전에 그러하였듯, 황후는 건강한 아이를 낳을 터이니.”
“예, 반드시 그러리라 믿습니다.”
태상황 이선은 아들을 격려했다. 딸과 아버지로부터 힘을 얻은 이진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산통은 한밤을 넘겨 새벽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잠도 못 이루고 결과를 기다리던 이진을 향해, 타티야나의 최측근이자 시숙모인 영친왕비 이서아가 밝은 표정으로 찾아왔다.
“황제 폐하! 경하드립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황후 폐하께옵서 아기씨를 생산하셨사옵니다. 아드님이십니다!”
“오오!”
이진은 기쁜 마음에 이서아에게 고맙다고 답례하자마자, 한달음에 황후가 있는 교태전(交泰殿)으로 달려갔다. 실내를 서양식으로 개조한 교태전에는 어의와 궁인들이 황제의 방문을 맞이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황후와 아이의 건강은 어떻소?”
“모두 건강하십니다.”
의사용 가운으로 갈아입은 이진은, 강보에 쌓인 갓 태어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들이자 자신을 계승할 후계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이진은 너무나도 기뻤다.
“참으로 노고가 많았습니다, 부인. 정말 고맙소.”
이진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자리에 누워 있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가 건강해서 다행입니다.”
“암요, 당신과 아이 모두 건강해야지요.”
아들딸 구별 않고 소중하고 사랑함이 부모의 마음이었으나, ‘황제’와 ‘황후’로서는 후계자가 될 아이의 탄생이 더욱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한국 황실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딸 넷을 연달아 낳고 아들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타티야나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손을 꼭 잡으며, 탄생의 기쁨을 함께했다.
“태상황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역시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이선은, 손자의 탄생에 비로소 안도와 기쁨의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아이로구나. 참으로 경사로다!”
갓 태어난 아이는 너무나 작고도 연약했지만, 이선은 그저 손자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기뻤다.
이진과 타티야나의 아들이자, 이왕가와 로마노프왕가의 후손이요, 동양의 천명과 로마-유라시아의 정통을 계승한 후계자이자, 장차 조선의 29대 군주이자 대한제국 3대 황제가 될 아이였다.
‘이제는 정말 한 개인으로서는 여한이 없구나.’
대업의 후계자가 될, 손자의 탄생을 지켜본 이선은, 개인적으로는 이제 더 바랄 게 없었다.
앞으로 최대한 오래 살며, 자식과 손자가 살아갈 태평성세를 만드는 게 이선의 남은 생애 목표였다.
만물의 새로운 시작, 태시 연간에도 이선이 할 일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