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
– 9화에 계속 –
9화 마마(媽媽)
“예? 대감께서요?”
지석영이 반문했지만, 이선은 진지했다.
“보다시피 난 두창을 앓은 적이 없소. 그러니 두창은 내게도 두려운 질병이오. 그러니 내게 접종해 주시오.”
지석영은 내심 놀랐다. 충주의 장인과 동네 유지들을 설득해서 접종을 하는 게 그리도 어려웠는데, 왕자가 흔쾌히 종두를 맞겠다고 나선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군 대감의 지엄한 지체에, 저와 같은 일개 서생이…….”
“지금 이 조선 땅에서 서양식 종두법을 실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밖에 없소이다. 말 나온 김에 오늘 당장 접종하도록 합시다.”
이선의 빠른 행보에 지석영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 완화궁에 올 때만 해도 멋대로 서양 의학을 배웠다고 경을 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왕자가 직접 종두를 맞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가 그저 운현궁으로 오라는 분부를 받았는지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두묘와 종두 침은 원동 제집에 있사온데…….”
“원동(종로구 낙원동)이면 여기서 멀지 않구려. 선생께서 번거롭겠지만 댁에 다녀오시오. 기다리리다.”
“황공한 말씀이십니다.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얼마 후, 지석영은 두묘와 종두 침, 접종 기구를 들고 완화궁으로 왔다.
“대감, 정말로 이런 검증 안 된 것을 맞아도…….”
“우두야말로 가장 확실히 검증된 두창 해결법이오. 지켜보기나 하시오.”
종두 침을 처음 보는 안영흠은 의심스러워했지만, 이선의 뜻이 워낙 확고해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종두는 이른바 ‘백신’의 시초다. 모든 예방주사의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현대에서 예방 주사를 맞아온 이선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흔쾌히 팔을 내놓을 수 있었다.
“대감의 지체에 감히 실례하도록 하겠나이다.”
“실례랄 것도 없소. 빨리 합시다.”
이선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을 드러냈다. 지석영은 드러낸 팔에 종두 침을 갖다 대었다.
“자, 그럼 접종하겠습니다.”
날카로운 종두 침이 팔에 꽂히자, 순간 따끔했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렸다. 종두 침은 한 번만 꽂는 게 아니라, 여러 번 콕콕 찔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왕자의 지체 높은 몸에 사술(邪術)을 부린다고 여겨, 난리가 날 터였다. 그래서 이선은 일부러 안영흠을 제외하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안영흠은 완화군이 왜 직접 이런 걸 맞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켜만 보라는 명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 참아 주셨습니다.”
“다 끝난 것이오?”
“예, 며칠 정도 발열할 수 있겠으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푹 쉬시고 개의치 마시옵소서. 앞으로 마마신이 대감을 찾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하, 고맙소. 선생이 마마신으로부터 나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군.”
“대감께서 소인을 믿고 귀한 지체를 맡겨 주셨으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내 몸으로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 한 것이오. 종두로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면, 백성들도 따르려 할 것이오.”
“대감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지석영 본인도 매우 뿌듯했다. 왕족이 직접 나서서 우두를 접종받은 걸 알면, 일반 백성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앞으로 두묘를 많이 확보하는 게 일이겠구려.”
이선의 지적은 정확했다.
“예, 그런데 제가 아직 우두접종법은 배웠으나 두묘 제조법은 배우지 못해서…….”
300명분을 모두 소진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앞으로 길이 열릴 것이오. 조선에서는 한계가 있을 터, 가까운 일본에 가서 들여와야겠지.”
“하오나 벼슬도 없는 제가 나라의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갈 수가 없어서…….”
“그건 걱정 마시오. 곧 성상께서 일본으로 수신사를 파견할 예정이오. 선생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가도록 하시오.”
“오! 그렇사옵니까?”
역사대로라면,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곧 파견하게 된다. 지석영도 그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되어 종두법을 배우게 된다.
“두묘 제조법뿐만 아니라 서양 의학의 정수에 대해 배워 오시오. 이 나라에 큰 힘이 될 것이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힘써 도울 것이오. 마땅히 전국에 보급하여 두창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만백성이 역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오.”
지석영이 감격하여 외쳤다.
“대감의 뜻이 높고 귀하시니, 반드시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나이다!”
“그럼 한양에서도, 특히 역병에 취약한 지역을 다니며 접종하도록 하시오. 이에 대한 비용은 완화궁에서 부담할 터니 걱정 마시오.”
흔쾌히 비용까지 부담하겠다는 완화군의 말에, 지석영은 더욱 감격했다.
“기꺼이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지석영의 말대로 며칠간 발열을 가볍게 앓고 일어섰다. 가뿐한 느낌이었다. 이선은 건강을 회복하고, 행동을 재개했다. 이 일로 천연두의 악몽에서 벗어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마, 마마신이다……! 마마신이 이 집에 오셨어!”
“아이고, 맙소사! 이 일을 어쩌면 좋누!”
“어서 의원을 불러라! 아, 아니, 용한 무당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어린 노복(奴僕)이 천연두 증세를 보이자, 영보당은 당황하여 외쳤다.
“어서 완화군을 궁 밖으로 피접(避接)시켜야 한다. 당장 군을 모시고 나가거라!”
때마침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이선은, 갑작스러운 난리에 의아했다.
“무슨 일이오?”
“돌쇠라고, 어린 노복이 있지 않습니까? 마마가 왔다고 합니다.”
“아니,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완화궁부터 접종을 놓으라고 할 것을.”
이선은 혀를 찼다. 이선이 빙의한 이래 완화궁의 출입을 통제하고 위생에 신경을 쓰고 있어, 천연두가 발병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완화군! 여기 있어서는 아니 되오. 어서 집 밖으로 나가시오! 일단 운현궁에 가 계시도록 하시오.”
영보당이 당황하여 외쳤지만, 이선은 담담하게 답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소자는 이미 두창을 예방하는 침을 맞았나이다. 결코 두창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대감의 말씀이 맞습니다. 서양에서 온 의술이 있는데, 그 침만 맞으면 평생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영흠이 동조하니, 영보당은 의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어찌해야 하겠소?”
“환자를 별도로 격리하고, 아직 두창을 앓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접종을 해야겠습니다.”
이선은 안영흠에게 명했다.
“즉시 원동으로 사람을 불러 지석영을 데려오시오.”
“예, 알겠습니다.”
완화궁의 호출 소식을 듣고, 지석영은 즉시 동료 의원과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신속히 환자를 격리한 후, 환자가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부 불태웠다.
그리고 천연두를 앓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두 침을 놓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두 침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왕자가 먼저 맞았다는 말에 모두 군말 없이 종두를 맞았다.
“일단 한숨은 돌렸습니다만,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보통 두창은 환자나 환자가 사용했던 물건을 통해 전염됩니다. 보통 병에 걸려 발열하여 병세를 드러내는 것이 이레 정도 걸립니다. 현재 증세를 보건대 발열 후 사흘이니, 대략 열흘을 전후한 때에 감염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흘이라…… 그런데 뭐가 의아하오?”
“그런데 환자는 그때를 전후하여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별다른 특이 사항도 없었습니다.”
“그럼 자발적으로 옮진 않았을 것 아니오?”
“그러니 의아하다는 것이지요.”
이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다가, 뭔가 짚이는 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열흘 전이면, 궁에서 사람이 왔었소. 세자 저하의 두후 치료와 신년을 기념하여 왕실의 하사품을 완화궁에 내렸지. 그럼 그때 온 이들 중에 두창을 앓던 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의문점이 남는데, 저 돌쇠라는 노복만 접촉한 게 아닐 텐데 이상하군요.”
“한번 알아봅시다. 병의 원인은 확실히 알아 둬야 하니.”
이선은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격리된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종두를 맞은 이선은 전염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하도 성화를 부리니, 철저히 옷을 싸매고 들어갔다.
이선이 안영흠, 지석영과 함께 격리된 방으로 들어가자, 환자는 급속도로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으, 으으으…….”
아직 증세가 심하진 않았으나, 얼굴에 발진 증세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이선은 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너로 인해 내가 마마를 옮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선은 어린 노복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자신으로 인하여 왕자까지 전염될 것을 걱정한다고 여겼다.
“흑, 흑흑…….”
갑자기 돌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 마마신이, 제게 천벌을 내린 것입니다요……!”
“그게 무슨 소리냐? 마마신은 없다. 단지 네가 불운하여 병에 걸린 것뿐이지. 내가 묻고 싶구나. 열흘 전에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궁궐에서 온 이들과 접촉하였느냐?”
궁궐이란 말을 듣자, 돌쇠는 더욱 동요했다.
“그, 그, 그…….”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거라. 네가 확실히 말해야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있다.”
“쇤네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죽을죄를 지어 마마신이 벌을 내린 것임에 틀림없습니다요.”
두서없는 횡설수설에 이선은 답답했지만,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알아듣게 말을 하거라.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네가 병에 걸린 건 죽을죄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거라. 아무도 널 벌하지 않을 것이다.”
이선이 거듭 따뜻하게 말을 하니, 마침내 돌쇠는 눈물을 흘리며 실토하였다.
“쇠, 쇤네가 분수도 모르고 감히 군 대감의 물건에 손을 대었으니, 마마신이 노하여 벌을 내리신 게 당연합니다요…….”
뜻밖의 말에 이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물건에 손을 대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요, 용서해 주십시오!”
돌쇠가 아픈 몸을 비척거리며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이실직고만 한다면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슨 물건에 손을 댔다는 것이냐?”
“궁궐에서 온 군 대감의 설빔을……. 너무 곱고 좋아 보여서……. 감히 제가 먼저 입어 보았습니다.”
순간 이선의 머리에 뭔가 번개처럼 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궐에서 보낸 옷에 손을 댔다고? 너 말고 손을 댄 자는 없느냐?”
“아, 아무도 없사옵니다.”
이선은 안영흠에게 시선을 보냈다. 안영흠도 뭔가 생각을 하다가, 경악한 표정으로 이선을 쳐다보았다.
“서, 설마…….”
“우리가 아마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소.”
‘이거, 생화학 테러지? 천연두 걸린 사람의 물건을 보내서 감염을 유도하는 공격. 일찍이 천연두의 항체가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있었던 일이지. 생물학 테러라니, 굉장히 신선한 방식이군. 조선에서도 이런 방식의 테러가 있었나?’
순간 이선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전의 오라비, 민승호가 폭탄 테러로 죽은 적 있었지. 배후에 운현궁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 또한 새로운 방식의 테러가 아닌가.’
1874년, 중전 민씨의 오빠이자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민승호가 폭탄 테러로 일가가 모두 참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식적인 범인이 몇 년 뒤에 잡히긴 했지만, 배후에 운현궁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국왕의 생부라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고, 중전은 이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럼 역시 나를 죽이려 한 상대는, 중전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중전 말고 완화군을 죽이려 들 만한 이는 없었다. 더욱이 궁궐에서 하사한 선물에 누가 감히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중전이 아니라면, 최소한 여흥 민씨일 터였다.
천연두를 가리키는 이칭인 마마(媽媽)는, 본래 궁궐에서는 중전과 대비에게 붙이는 극존칭이었다.
완화궁에 마마신이 강림했다. 그것은, 중전 ‘마마’가 보낸 특별한 선물이었다.
“하하, 마마가 정말 그 마마로군 그래!”
이선은 차갑게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얼굴은 분노로 빠르게 굳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