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0
– 90화에 계속 –
90화 철혈재상(鐵血宰相)
이선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대표하는 프로이센 개혁에 대해 간략히 사절단에게 설명했다.
이른바 ‘프로이센 개혁’은 1807년 이후 프로이센이 추진한 일련의 군제개혁, 행정개혁, 농업개혁, 재정개혁, 교육개혁을 통칭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참패하고, 국가 존망(存亡)의 위기의식을 느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 융커(Junker)가 어떻게 스스로 개혁에 나섰는지, 조선의 양반들도 참조해야 했다.
“양반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백성에게 단일한 국민이라는 신화를 심어줘야 합니다. 서양처럼 똑같이 학교에 가고, 똑같이 군대에 가고, 똑같이 세금을 내야 합니다. 조선의 개혁은, 그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선의 단언에, 사절단은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하지 않으면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지 못한다.’
이선은 지배 계급이 위기의식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청의 양무운동이 파행적으로 진행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지배계급이 느끼는 절실한 위기의식의 차이가 결정적인 갈림길이 되었지.’
일본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서구 열강에게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란 위기의식이 있었고, 위기의식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청나라는, 이홍장과 소수의 관료들을 제외하면 중화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서양에게 패배한 것도 일시적인 실수라고 여길 정도였다. 청의 헛된 기대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에야 산산이 깨지게 되었다.
보빙 사절단의 성과는, 서양은 살펴보고 지배계층에게 근대화의 필요성과 적절한 위기의식을 부여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Gott mit uns(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Hurrah(만세)!”
독일제국군의 중추, 프로이센 근위대의 분열 행진이 거행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운터 덴 린덴을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근위대의 모습에, 환호하는 베를린 시민뿐만 아니라 조선 사절단도 찬탄을 표했다.
“과연 덕국의 군대는 강성하군요.”
“10년 사이에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모두 격파한 세계 제일의 강군이오. 신식 군대를 편제하려는 발칸의 신생 독립국들이나 일본이 괜히 프로이센 군대를 모델로 하는 게 아니지요.”
1883년, 일본은 기존의 프랑스식 군제에서 독일식 군제를 받아들이기로 정하고, 독일 군사교관을 일본으로 초빙하였다.
반대로 일본 유학생들은 독일 사관학교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독일식 군사교육을 습득하도록 했다.
‘일단 고든 장군을 군사고문단으로 받아들였으니, 당분간 그에게 일임해야겠지만……. 장기적으로 독일식 군제를 받아들여야지. 가장 효율적인 건 역시 독일식이니까.’
이선을 친러파라고 의심하는 영국을 달래기 위해 고든을 군사고문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이 프랑스에서 독일식으로 변화한 것처럼 차차 독일식 군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독일의 힘은 군대에만 있지 않았다. 강력한 산업과 효율적인 행정제도, 탁월한 교육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운터 덴 린덴은 독일의 중심지였다. 왕궁과 각 정부 부처들,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교(베를린대학교)가 있어, 시찰하기에 편리했다.
이 시대 가장 뛰어난 대학교와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단연 독일이었고, 세계 유수의 인재가 독일로 유학갔다.
프로이센 개혁의 하나로 탄생한 독일의 대학은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의 효시였고, 이 시대만 해도 미국에서 독일 대학으로 유학을 하러 갈 정도였다.
‘아니, 정부 인사도 유학을 오지.’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독일에 도착했다. 이토는 베를린대학교 법학 교수인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 빈대학교 정치경제학 교수인 슈타인(Lorenz von Stein) 등 헌법학자들의 강의와 설명을 듣고, 일본의 헌법에 관한 구상을 세운 다음 일본으로 귀국했다.
‘시간만 넉넉하면 나도 차분히 여기서 공부하면서 국가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고 싶군.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베를린 대학 총장의 안내를 받아 교정을 거닐던 이선은, 새삼 학구열이 솟는 기분이었다. 그 또래의 청년들이 한참 열심히 공부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이선의 나이 17세,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학업을 해야 할 나이였지만, 국가권력의 중추에 있는 왕자로선 그런 한가로운 여유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심전심인지, 사절단 중 가장 젊은 김학우와 변수는 학구열이 생긴 듯했다.
“김 군, 변 군. 독일에서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소?”
“예,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하지만 독일어 공부는 아직 해 본 적이 없으니, 미국도 좋습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언어야 공부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도 국가에서 곧 관립 유학생을 선발해서 서양으로 보낼 생각이오. 잘 알다시피 유길준 군이 첫 미국 유학생이 되었고, 다음 인원들도 선발해야지. 미국 정부에 이어 독일 정부와도 유학생 파견에 관한 협의를 할 예정이니, 기대해도 좋소.”
“오오,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
기뻐하는 김학우와 변수를 보며, 이선은 자신이 직접 머물며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저버렸다.
‘국가를 이끌며 유능하고 촉망받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역할로 만족해야지.’
비스마르크와의 회견을 기다리던 이선에게, 곧 좋은 소식이 들렸다.
“재상 각하께서 왕자를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2월 2일 토요일, 관저로 초청하겠습니다.”
“각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역시, 비스마르크가 조선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을 테지만, 내게는 관심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근래, 비스마르크 대외정책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러시아였다.
베를린 회의로 파기된 삼제동맹(三帝同盟, Dreikaiserbund)을 부활하기를 원하는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구슬려 어떻게든 독-러 관계를 회복시키길 원했다.
역사대로라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어,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하여 삼제동맹을 복원시킨다.
하지만 이미 이선에 의해 역사는 바뀌었고, 알렉산드르 2세는 건재했다. 베를린 회의에 대한 배신감을 잊지 못한 알렉산드르 2세는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특별히 진전되진 않았지만, 비스마르크에게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합은 악몽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차르의 구원자’인 이선을 만나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견 당일. 이선은 독일 제국 재상(Reichskanzler) 관저에 들어섰다.
이선은 역사적 중요인물을 만나는 데 익숙해졌지만,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의 거인을 만난다는 사실에 새삼 짜릿함을 느꼈다.
‘바로 그 유명한 철혈재상을 만나게 되는군. 정치든, 외교든, 전쟁이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 시대 최고의 거인이다.’
– 작금의 거대한 문제 앞에 이루어져야 할 결단은, 1848년과 1849년에 이미 범하였던 거대한 실수인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1862년 의회 연설은, ‘철과 피(Eisen und Blut)’라는 인상적인 단어로 인해, 비스마르크의 별명을 ‘철혈재상’으로 굳히게 했다.
분명 비스마르크는 철과 피로써 독일 통일 문제를 해결했다.
1863년 덴마크를 격파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병합하고, 1866년 독일의 전통적 강자인 오스트리아를 격파해 북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대망의 1870년, 숙적인 프랑스를 격파하고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마침내 독일 통일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 비스마르크는 철저하게 평화정책을 구사했다. 본래 비스마르크는 군인이 아니라 노련한 외교관이었고, 그의 외교 정책은 교묘하기 그지없었다.
1873년 발칸을 놓고 적대적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묶어 삼제동맹을 탄생시켰다.
베를린 회의로 러시아와의 동맹이 끝나자, 비스마르크는 또 다른 외교적 책략을 성사시킨다.
1882년,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를 묶어 삼국동맹(三國同盟, Dreibund)을 체결한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전략은 철저히 프랑스를 고립시킨 상황에서, 독일 중심의 세력균형을 이뤄내는 것이었다.
내치의 영역에서도, 비스마르크는 전통적 보수주의자였지만 남달랐다.
사회주의의 거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출신이라는 데 알 수 있듯, 독일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채찍을 휘둘러 ‘사회주의자 단속법’으로 사회민주당을 탄압한 후, 동시에 노동자를 위한 당근을 준비했다.
이선이 독일을 방문한 1884년 초, 비스마르크는 획기적인 조치를 한다. 세계 최초의 국민 건강 보험과 산업 재해 보험을 제정한 것이다.
노동자의 충성심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국가로 가져오기 위한 정략적 수단이었지만, 노동자의 처우가 지극히 나빴던 산업혁명 시대에 복지국가의 시초를 닦은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이렇듯 숱한 업적을 세운 비스마르크를 만나게 되니, 이선도 자연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와 미국 대통령 앞에서도 안 하던 긴장을 하는군.’
역사의 거인답게, 비스마르크는 체격도 컸다. 거구의 비스마르크가 이선의 앞에 서니, 거목(巨木)이 눈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 독일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세계적 지도자로 이름 높은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마르크와 이선은 악수를 했다. 이선이 약간 긴장한 표정인 걸 인지한 비스마르크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동양에서도 내가 유명하던가요?”
“각하께서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니, 동양에서도 모를 수가 없지요.”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뜻밖에도 유쾌하게 농담을 건네는 비스마르크의 말에, 분위기가 자연히 풀렸다.
“사실 저도 왕자라는 신분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각하께서 정치를 안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맞습니다. 재상이나 왕자란 신분이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많긴 하지요.”
“그러니 제가 나라를 위해 이 먼 베를린까지 와서 각하를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선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껄껄 웃었다.
“하하, 과연 그렇군요. 왕자의 재치에 감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선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조선과 독일 간에 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비준된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앞으로 양국 간에 만대에 걸쳐 우호친선이 이어질 것입니다.”
“독일 역시 그러길 바랍니다.”
독일은 조선이 세 번째로 수교를 맺은 국가였다. 영국과 행보를 같이 하며 수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였지만, 러시아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자 재빨리 비준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독일에 오고 나니, 귀국의 힘이 눈으로 보였습니다. 참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입니다. 이는 모두 각하께서 나라를 훌륭히 지도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이선의 아첨과도 같은 말에, 비스마르크도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다만 이는 저 한 사람의 공이 아니라, 황제 폐하와 독일 국민 전체가 이뤄낸 공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동시에 독일 국민이 이뤄낸 업적이지요. 앞으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개혁의 모델로는 역시 독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조선도 언젠가 독일처럼 당당한 자주독립국이 되고 싶습니다.”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지만, 상당 부분 이선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귀국 또한 군주에서 국민에 이르기까지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면, 머잖아 당당한 자주독립국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입니다.”
이선은 비스마르크와 외교적 수사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본인은 조선 국왕 폐하의 국서를 갖고 독일에 온 건 아닙니다만, 국왕 폐하의 특명 전권 공사로서 재상 각하와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총세무사 겸 외무부 차관을 맡고 있습니다. 즉, 조선 왕국과 독일 제국 간에 공통으로 수행할 업무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선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정색했다.
“묄렌도르프는 이미 외교관직에서 사임했습니다. 그가 조선에 간 건 그의 자유이고, 독일 정부와 무관한 일입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그렇지요. 묄렌도르프는 현재 조선의 관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독일인이라는 사실, 전직 독일 외교관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닙니다.”
“왕자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비스마르크는 여전히 정색했지만, 이선은 기껏 얻게 된 비스마르크와의 회견 자리를 의례적인 덕담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저는 묄렌도르프가 여전히 독일 외무부, 아니 독일 제국과 재상 각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과 조선은 함께 이해득실을 논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