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1
– 91화에 계속 –
91화 갑신년
한편, 조선에서는 음력으로 갑신년 새해가 밝았다.
기무처가 집정을 맡은 지 3년 차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대원군의 지휘 아래, 기무처는 착실하게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민씨 세도 10년의 폐단이 쓸려 나간 덕에 국고가 다시 채워지고, 민심은 안정되었다.
개화 정책도 김홍집과 김윤식 등 시무 개화파에 의해 차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옛 제도와 보수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총세무사 겸 외무아문 협판 묄렌도르프와 협조하여 개화 정책을 이끌어나갔다.
얼마 전에는, 보빙사 전권 부대신 박정양이 사절단의 절반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하여 임금에게 복명(復命)했다.
“과연 미국의 부강함이 천하제일인가?”
“실로 그러하옵니다. 그 나라는 땅이 넓고 곡식이 많이 생산되며, 사람들이 모두 무실한고로 상무가 매우 왕성하여 비할 나라가 없나이다.”
박정양은 미국에 대해 거듭 찬탄을 표했지만, 그중에서도 주목한 건 교육이었다.
“기기의 제조와 배, 차, 우편, 전보 등이 나라마다 급선무가 아닐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교육 사업입니다. 만약 미국의 교육 방법을 따라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그 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미국의 교육이 그렇게도 본받을 만한가?”
“미국은 배우지 못한 자가 전인구의 20분의 1에 불과하고, 전국 내에 이러한 학교가 없는 곳이 없으니, 그 부강이 천하에서 으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규모의 거대함과 인심의 성실함이 모두 교육을 국가의 대정(大政)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박정양의 말은 다소 과장이 섞인 것이었지만, 그만큼 서구식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때문이었다.
“경의 말이 옳다. 마땅히 조선도 교육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리라.”
단순히 서양식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전면적인 서구화를 이뤄내자는 것이었다. 이는 상당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존화(尊華)’에서 ‘비화존양(排華尊洋)’으로, 문명과 야만에 대한 기존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과거엔 중화와 이를 계승한 조선이 문명이고 양이가 야만이었다면 이제는 서양이 문명이고 조선은 그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양과 사절단은 이선의 공적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냈다.
“특명 전권 대신을 맡은 완화군이 아니었더라면, 사절단은 미국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겁니다. 미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사절단을 환대하였으며, 완화군은 어디에서나 주목받는 인물입니다. 완화군은 서양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바탕으로, 미국인들을 거듭 놀라게 하였습니다. 미국의 관리와 거상들은 하나같이 완화군을 큰 인물이라 칭송하였습니다.”
“호오, 그러한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완화군은 미국의 전 대통령과 거상들을 설득하여, 미화(美貨) 200만 불을 공채로 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중히 쓰일 것입니다.”
미국에 대해 거듭 찬탄을 표하던 임금과 달리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던 대원군도, 완화군이 200만 달러를 차관으로 구했다는 말에 깜짝 놀라 박정양을 쳐다보았다.
“미화 200만 불이면 대체 얼마인가?”
“거금이옵니다. 일화(日貨)로 300만 원이니……. 조선 돈으로 하면 천만 냥입니다.”
박정양의 말에 좌중은 모두 놀랐다.
1882년경 조선과 일본 화폐의 환율은 대략 0.3:1 정도였고, 조선 조정의 1년 세입은 100만 석, 약 500만 냥에 불과했다.
그동안 기무처의 개혁으로 세입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천만 냥은 조선 조정의 2년 세입에 육박했다.
“엄청난 액수군. 하지만 그만한 돈을 미국이 거저 돈을 주지는 않았을 터. 담보 조건은 무엇인가?”
“이는 완화군께서만 아는 일로, 소인은 아직 알지 못하옵니다.”
이선은 J.P 모건과 그랜트와의 회동 결과를 비밀에 부쳤고, 돈 관리도 자신이 직접 했으므로 박정양도 거기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결코 불리한 조건으로 맺진 않았을 것입니다. 완화군께서는 언제나 조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조건이 어찌 되었건, 거액이 생기는 데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대원군은 기무처의 거듭된 개혁으로 인해 자금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완화군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전하?”
“실로 갸륵한 일입니다.”
대원군의 말에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화군과 남은 사절단은 언제 돌아온다든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구나.”
“미국 군함을 타고 구주(유럽)로 향하셨습니다. 영국, 법국, 덕국, 아국(러시아) 등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여름쯤에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화군이 구주에서 얼마나 더 많은 공을 세울지 기대가 됩니다. 하하하!”
대원군의 호탕한 말에, 신하들이 덩달아 외쳤다.
“완화군이 조선의 이름을 세계만방에 떨쳤으니, 그 어떤 나라도 조선을 감히 쉽게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토록 현명한 왕자가 계시오니, 실로 성상과 나라의 홍복(洪福)이옵니다!”
“실로 완화군은 나라의 큰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왕실의 대들보다.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구나.”
완화군에 대한 찬사에 임금은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속내는 복잡했다.
누군가 찬탄을 표한다면, 한쪽에는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박정양은 진중한 유학자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개화당이라고 나대는 애송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완전히 서양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었네그려.”
개화의 필요성을 인지했지만, 그 근본은 보수적인 유학자인 박정양이었다. 박정양은 미국에 대해 찬탄을 표하면서도, ‘서양 민주국’인 미국과 ‘동양 군주국’인 조선은 다르다는 걸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흥, 그러려고 완화군이 박정양을 부사로 데려간 것 아니겠소? 앞으로 서양식으로 나라를 뜯어고치려는 데, 여론몰이가 필요하겠지. 그러니 박정양은 먼저 귀국시켜 미리 여론을 조성하는 것 아니오?”
“완화군은 그렇다 쳐도, 대체 대원군은 뭘 하시는 건가? 그 양반은 서양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표리부동하게 변할 수 있지?”
“놀랄 것도 없소.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안 가리는 게 그 양반 특성 아니오?”
“이제는 서양에 물든 놈들도 모자라, 아예 서양인들을 데려와 조정의 중책을 맡기지 않나. 이거야 원, 나라가 어찌 되려고…….”
“불과 얼마 전까지 조선 땅에 살지도 않았던 서양인 목인덕(묄렌도르프)이가 종2품 협판이요, 협판. 권한도 막강하지. 하지만 목인덕은 시작에 불과할 걸? 앞으로 계속 양놈들을 관직에 앉히겠다는 뜻이지.”
묄렌도르프는 대원군의 승인을 받아, 주로 독일인으로 구성된 서양인 실무자들을 입국시켜 외무아문과 세관의 행정 업무를 맡겼다.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근데, 목인덕은 북양대신 이홍장의 막료였다고 하지 않소. 완화군은 이홍장과 친밀하니, 대원군도 그 뜻을 거스르진 못할 것이오.”
“원, 할아비가 손자 뜻을 거스르지 못하면, 그게 정상적인 집안이오? 그걸 봐주는 이홍장은 애미 애비도 없다던가?”
“거, 모르는 소리. 이홍장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군대와 돈을 완화군과 그 파당이 꽉 쥐고 있소. 대원군이 그 뜻을 어떻게 거스르겠소?”
“가관이구만, 가관이야. 스물도 안 된 애송이에게 주상과 대원군이 모두 놀아나고 있으니…….”
이들은 거듭 혀를 차다가, 누군가 입을 열었다.
“주상이든 대원군이든, 완화군의 전횡을 그냥 눈 감고 있을 분들이 아니오. 그분들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데, 모든 걸 완화군의 뜻대로 두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완화군은 주상의 장자요, 대원군의 장손이외다.”
“권력의 생리라는 게 언제 혈연을 따지는 걸 봤소? 주상과 대원군도 틀림없는 부자 사이지만, 지난 10년간 그사이가 어땠소이까?”
임금과 대원군의 불화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단지 군란 이후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고, 임금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군.”
“지금 왕실에는 머리가 셋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소. 주상, 대원군, 완화군. 지금은 한배를 탄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권력을 놓고 불화를 빚을 날이 올 것이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힘과 명분을 축적하고 있읍시다.”
“좋소. 그리합시다.”
하지만 불평분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손자에 대한 대원군의 신뢰는 두터웠고, 조정의 실무를 맡고 있는 시무 개화파 관료들도 이선의 능력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김홍집과 기무처의 당상들은 보빙사의 성과에 만족했다.
“완화군이 아니었더라면, 대체 누가 미국에서 그만한 성과를 이뤄냈겠는가?”
“재정 문제가 시급한데, 급한 불을 끌 수 있어서 다행이오. 돈 쓸 곳이 좀 많아야지.”
“역시 미국은 믿을만한 나라인 것 같소. 제일 먼저 수교 조약을 비준했고, 외교관도 특명 전권 공사급으로 가장 먼저 파견했지. 조선 사절단도 이토록 환대했다고 하니, 앞으로 기대해 볼 만합니다.”
“나는 사실 완화군이 너무 아라사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이번에 걱정을 완전히 덜었소. 완화군은 정녕 조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분이오.”
“그만한 인재가 왕실에서 태어났으니, 참으로 조선의 복이오.”
이선을 주군으로 섬기는 변법 개화파, 개화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완화군 대감께서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얻은 심중은, 단연코 신식 군대의 양성에 있다고 보네. 고려대대가 대감께 충성한다고는 하지만, 그 병력은 수백에 불과하지. 제대로 된 신식 군대를 수천 수만 단위로 양성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 법.”
김옥균은 개화당 비밀회의에서 이선의 뜻을 짐작했다.
“군 대감께서 금석(琴石, 홍영식)과 위산(緯山, 서광범)을 대동하고 구주로 향한 건 결코 유람이나 하자고 간 게 아닐세. 서양 각국과 외교적 협의를 이뤄내고, 유능한 군사고문관을 초빙할 예정이네.”
이선은 귀국 편에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들은 이선이 거둔 외교적 성과에 크게 고무되었다.
외무아무 협판 김옥균과 한성판윤 겸 친군 영사 박영효는 고위직은 아니었으나, 외교와 군대에서 핵심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곧…….”
동지들의 기대에 찬 표정에, 김옥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우리가 꿈꾸는 대경장의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지.”
“오오!”
개화당원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게 우리 뜻대로 되리란 법은 없네. 현재 정세의 구도가 너무나 복잡하네. 성상의 뜻은 어떠하고, 대원군의 입장은 어떠하며, 사대부의 생각은 어떠한지…….”
박영효의 우려에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기, 계기가 필요해.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면 성상께서도, 대원군과 사대부들도, 그리고 백성들도 대경장의 필요성을 깨달을 것이네.”
그 ‘계기’를 충족시키려면 국내 요인 못지않게 국제적 요인도 필요했다.
“일단 군 대감의 귀국을 기다려 보세. 그분께서 분명히 바른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네. 올해 갑신년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대경장의 첫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김옥균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동지들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