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4
– 94화에 계속 –
94화 이성(異性)보다 이상
바르샤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황실 열차는 빠르게 달렸다. 두 도시 간의 거리는 1,200km에 달했기에 특별열차로도 이틀의 시간은 필요로 했다.
황실 열차답게 객차의 시설은 최상이었다. 이선은 로마노프 황가의 상징인 쌍두독수리 문장이 박혀있는 푹신한 침대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기차는 흔들려서 잠도 잘 안 오는데, 여긴 정말 편하군.’
식당 칸에서 제공되는 식사도 완벽했다. 사절단은 전에 없는 호사를 누리며 여정을 보냈다.
다만 갑자기 사절단 일행에 포함된, 열차의 홍일점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파니 얀코프스카,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아뇨, 너무 편한데……. 제가 이래도 되나 싶어서…….”
여인은 러시아 황실 열차를 자신이 타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기에,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듯 했다.
“뭐, 편하게 생각하세요.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요.”
“공작님 덕분입니다.”
여인이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도 안 물었네요. 아시겠지만, 나는 조선에서 온 이선이라고 합니다.”
“마르가리타 파블로브나 얀코프스카입니다.”
여인은 러시아식으로 이름을 댔지만, 이선은 그녀의 본명은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짐작했다.
“폴란드식 이름은요? 본명을 알려 주세요. 폴란드 사람인데 러시아식으로 부를 이유가 없죠.”
이선이 폴란드 이름을 묻자, 여인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Małgorzata Jankowska.”
“…… 다시 한 번?”
“Małgorzata. Ma-ł-gor-za-ta.”
“마, 마워, 마워고자타?”
‘뭔 발음이 이렇게 어려워?’
이선은 몇 번 이름을 따라 하였지만, 결국 정확한 발음은 하지 못했다.
“발음이 어렵죠? 러시아 사람들도 발음 잘 못 해요. 그냥 마르가리타라고 부르셔도 돼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다들 그렇게 불러요.”
마르가리타는 익숙한 듯 괜찮다고 했다. 이선은 무안함을 감추려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예전부터 느끼지만, 폴란드 이름은 너무 어렵네요. 예를 들어, 그 폴란드 독립영웅 누구죠? 코, 코시에우치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러시아 지배하라서 폴란드 독립 영웅은 안 가르치나?’
이선은 혹시 자기가 민감한 주제를 건드렸나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1794년에 러시아와 맞서 싸운 폴란드 장군이요. 타데우시…….”
“Tadeusz Kościuszko!”
마르가리타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내가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구만.’
“폴란드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죠. 우리 민족의 영웅인걸요. 설마 멀리 동양에서 온 사람이 코시치우슈코를 알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마르가리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하다가, 갑자기 주위를 의식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쌍두독수리와 차르의 초상화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러시아 황실 열차에 타고 있다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러시아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코시치우슈코를 ‘우리 민족의 영웅’이라고 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것도 차르의 총애를 받는다는 조선 왕자 앞에서.
“죄송합니다. 제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금발의 여인이 갑자기 동양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듣는 사람 없는데. 그리고 우린 지금 영어로 말하고 있으니까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마르가리타는 러시아에서 드물게도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폴란드어와 러시아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해서, 이선은 편하게 영어로 대화하자고 했다.
“그, 그래도…….”
“아뇨, 아뇨. 편하게 말해요, 편하게. 난 러시아 관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난 폴란드인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이선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용기를 갖고 물었다.
“코시치우슈코가, 아니 폴란드 민족의 독립 투쟁이 동양에도 알려져 있나요?”
“코시치우슈코는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기도 하니까, 미국에서 이야기 들었죠. 마침 내가 미국을 방문한 1883년은 미국 독립 전쟁 승전 100주년이라, 관련 행사를 많이 볼 수 있었거든요.”
코시치우슈코는 폴란드 독립 운동의 상징이자, 미국 독립 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하우 얀코프스키는 내 동료니까, 그로부터 들을 기회도 있었고요.”
“그는 극동에서 잘 지내고 있나요?”
“아, 그럼요. 연해주와 조선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았지요. 부랴트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시베리아 유배를 하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사면 후에도 고향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아가씨 가문도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 같군요.”
얀코프스키 가문은 적극적으로 1월 봉기에 가담했다. 최근에야 귀족 작위를 돌려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선은 대략 상황을 짐작했다.
마르가리타는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결국 이선의 권유에 입을 열었다.
“가문 전체가 봉기에 가담했어요. 그 결과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도 모두 몰수당했죠. 오직 저택만 남았죠. 결국, 바르샤바로 와서 일을 시작해야 했어요.”
“저런…….”
‘괜히 물어봤네. 러시아와 차르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나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진 못하겠군.’
“미안합니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군요.”
“괜찮아요. 저야 태어나기도 전이니 기억도 못 하는걸요. 제 부모님은 뒤늦게 차르에게 충성맹세를 한 덕에 시민권은 유지됐어요. 미하우 오라버니 덕에, 아니 공작님 덕분에 이번에 가문의 작위도 돌려받게 됐고요. 덕분에 이렇게 페테르부르크로 갈 수도 있게 된 거 아니겠어요?”
“내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작님 덕이 맞죠. 전 황제 폐하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차르가 폴란드 혁명가의 손에 암살당했다면 엄청난 보복을 당했을 거예요.”
황제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하는 마르가리타의 말에는 어딘가 뼈가 있었다.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작위를 돌려받은 것도 미하우 오라버니가 공작님을 위해 일한 후에 생긴 일이니,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총독이 시키지 않았더라도, 감사는 표했을 거예요. 귀족이 지배하는 러시아에서, 허울뿐이라도 귀족 작위는 있는 게 나으니까요.”
마르가리타는 총독이 시켰다는 걸 밝혔지만, 자신의 본심도 있었다는 걸 말했다.
“맞습니다. 나도 동양인이지만 귀족 작위 덕에 이런 예우를 받죠.”
이선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빙긋 웃었다. 만나고 처음 짓는 미소였다. 이선은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공작님의 경우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작위 덕분에 스몰니 여학원도 들어갈 수 있었죠. 저는 이왕이면 대학까지 공부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바르샤바 대학은 남학교라 갈 수 없어요. 페테르부르크 대학은 여학생의 청강을 허용한다고 해서요. 의대의 경우에는 진학도 가능하고요.”
“왜 대학까지 공부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번에도 마르가리타는 대답을 주저했다.
“편하게 말해요. 나 말고 듣는 사람 없으니까. 말했죠? 얀코프스키는 내 동료라고.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 자리에서 잊어버릴게요.”
마르가리타는 심호흡하고 말했다.
“폴란드가 무력으로 러시아를 이길 순 없어요. 하지만 지식으론 이길 수 있죠. 여자인 저는 무기를 들고 싸울 순 없으니까, 펜으로라도 싸워야 해요. 저는 의사이자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외국어도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 러시아에 맞서서 폴란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뿐이니까.”
‘그 영국과 프랑스는 앞으로 러시아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하긴, 결국 1918년에 독립하긴 하는군. 실제 역사대로 진행된다면 말이지. 근데 과연 그렇게 되려나?’
하지만 이선은 초를 치고 싶진 않았다.
“실례가 안 되면,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15세.”
이선은 깜짝 놀랐다. 외모나 생각하는 거나, 워낙 성숙해보여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1869년생?”
“아뇨, 1868년생. 11월에 16살이 돼요.”
“아, 그럼 나랑 나이가 같네. 난 5월생이에요.”
“아, 정말요? 공작님은 어른스러워서 20대인 줄 알았어요. 하긴, 제가 동양인은 처음 보거든요. 동양인 나이는 잘 모르겠네요.”
‘그건 내가 할 소리다……. 하긴, 이렇게 보니 어리긴 어리구나. 그러니 저렇게 높은 이상을 품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이선은 이상에 불타는 마르가리타를 보면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장차 큰 인물이 되겠는걸. 그러고 보니 마리 퀴리, 즉 마리아 스쿼도프스카가 이 또래 아닌가? 이 시대에 드물게 여성으로서 맹렬히 공부한 이유 중의 하나가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이었지.’
말문을 트게 된 이선과 마르가리타는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 안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탄하게 되었다.
이선은 진심으로 이 소녀의 애국심과 이상, 총명함에 감탄했다.
마르가리타는 더 놀라워했다. 소문의 ‘조선 왕자’가 우연히 차르 암살을 막아 총아가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10대 소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폭넓은 지식과 교양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르가리타가 정말 기쁘고도 감탄하는 건, 동양의 왕자가 폴란드의 투쟁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국심이 강한 그녀에게 이건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정말 놀랍네요. 동양의 왕족들은 다 공작님처럼 똑똑한가요?”
‘그럴 리가 있냐?’
“아, 그건 내가 조기교육을 잘 받아서. 원래 조선은 교육을 굉장히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훌륭한 일이군요. 민족을 지켜나가려면 교육은 중요하죠.”
‘신기하네. 아무리 민족주의 시대라지만 10대 소녀가 이렇게 애국심이 투철할 수가 있나. 페테르부르크에서 본 러시아 귀족 영애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신기할 정도네.’
이선은 오히려 그래서 마르가리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선의 표면적인 나이가 17세이니만큼, 그에게 다가오는 여인들의 나이도 그 또래였다. 하지만 속내는 30대인 이선의 기준에서 그들은 너무 어렸다.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대화가 안 통하면 의미가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미모도 미모지만, 총명함에 조국의 독립을 이뤄내겠다는 이상을 갖추고 있어, 역시 조선의 자주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이선에게 상당한 동질감을 주었다.
‘물론 이쪽도 어리지만……. 속내로는 대체 나랑 몇 살 차이인 거야? 15살은 연하지?’
이선은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계산을 달리했다.
‘아니지, 저쪽이 120살 연상이구나…….’
이선우나 이선이나 똑같은 무진년생이었지만, 120년의 시차가 존재했다.
이선은 순간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1868년생 이선에게 맞추지 않으면, 도저히 이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바르샤바를 떠난 지 이틀 후, 열차는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겨울의 페테르부르크는 북국답게 눈이 가득했다. 그런데 역에는 뜻밖의 인물이 직접 환영을 나와 있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십니다!”
이선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니콜라이는 반가워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공 전하, 그간 두루 평안하셨습니까?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 이선이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러시아를 방문하였습니다. 먼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이선이 예의를 갖춰 공적인 목적을 먼저 말하자, 니콜라이도 차렷 자세를 취했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나 니콜라이 대공은 조선의 특명전권공사 이선 공작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선과 니콜라이는 정중하게 악수를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선, 내 친구!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온 걸 환영하네. 그 사이에 키가 좀 컸나?”
“대공 전하야말로 많이 크셨는데.”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니콜라이와 이선은 서로를 친한 벗처럼 여겼다.
“한 2년만인가? 이렇게 금방 돌아올 줄 알았으면 환송회를 그렇게 성대하게 할 필요는 없었군.”
“3년이야. 내가 뭐랬나,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지.”
이선을 따라 내리는 조선 사절단 끄트머리에 뜻밖의 홍일점이 한명 서 있는걸 보고, 니콜라이는 호기심을 느꼈다.
“저 숙녀분은 누굽니까?”
“마, 마르가리타 파블로브나 얀코프스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마르가리타는 손을 떨며 드레스에 손을 잡고 예를 표했다. 러시아 황태손을 만나서 놀라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누구야? 누군데 황실 열차에 타고 있어?”
니콜라이는 이선에게 속삭였다.
“아, 총독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나를 도와서 고려대대를 지휘한 얀코프스키의 사촌 동생이야. 스몰니 여학원에 입학 예정이고. 페테르부르크에 올 예정이라고 해서 겸사겸사 함께 왔지.”
“그게 다야? 정말로? 이틀 동안 같이 기차 타고 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 무슨 이야기 나눴는지 말하면 바로 예비 정치범 취급일 텐데.’
“뭐, 이런저런 대화 나눴지.”
이선이 얼버무리려고 하니, 니콜라이가 씩 웃었다.
“네 취향은 이제 알겠다. 페테르부르크의 귀족 영애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만……. 그땐 어렸고, 이제 16세가 되니 어른이 되었다 이건가?”
니콜라이의 오해에, 이선이 답했다.
“오해하지 말게. 저런 유형의 사람은 이성(異性)보다 이상에 더 애정이 있어. 남자와 여자보다 조국과 민족에 더 관심이 많지.”
‘나 자신도 그렇고.’
그건 이선 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