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5
– 95화에 계속 –
95화 설득(說得)
“군 대감, 저분은 뉘십니까? 저희에게도 소개를…….”
홍영식은 이선이 이렇게 친밀하게 대하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아, 아라사 황제 폐하의 장손인 니콜라이 대공이오. 정중히 인사하시오.”
러시아 제국의 황태손이라는 말에, 조선 사절단은 깜짝 놀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과연 조선인들은 예의범절이 바르군요. 이선 공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러시아에 온 걸 환영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하명하시길, 내가 직접 여러분을 잘 모시라 하셨습니다. 내 궁전으로 갑시다. 환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니콜라이의 말은 김학우의 통역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사절단은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대공의 궁전에 숙소를 정하게 된 조선 사절단은, 니콜라이가 장담한 대로 환대를 받았다. 니콜라이의 어머니, 즉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태자비는 직접 이선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공작.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직접 맞이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이들은 조선국의 사절단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맞이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집처럼 편히 쉬길 바랍니다.”
“황공하옵니다.”
왕족이라 할지라도 여인이 외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문화가 없는 조선에선, 황태자비가 직접 환대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더없이 화려한 궁전에서 황족들이 이선을 환대하니, 사절단은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황태손이 군 대감을 맞이하러 역까지 나오고, 태자비가 직접 환대한다니.’
러시아 황실에서 얼마나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 사절단은 모두 확신하게 되었다.
이선은 환영 만찬에서 니콜라이와 환담을 나눴다. 이선이 조선으로 돌아가, 외척들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한 건 니콜라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잘했어. 신성한 왕권에 도전하는 반역자 무리는 쓸어버려야지. 러시아가 로마노프 가문의 나라인 것처럼, 조선도 이씨 가문의 나라지.”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수호자다운 말이었다.
“나라를 망치던 자들을 몰아내고, 조선이 개혁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기쁘게 생각하네.”
“네 할아버지께서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지? 근데 러시아에선, 이선 네가 실권자라고 생각해. 특히 외교와 군사 문제에 대해선.”
‘말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군.’
“그래서 조선에 정변이 발생하고 네가 권좌에 올랐을 때,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나?”
“황공할 따름이군.”
“황제 폐하와 대신들은 당연히 네가 친러 정책을 쓸 줄 알았지. 그래서 수호 통상 조약도 조선에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한 거고.”
“고맙게 생각하네. 덕분에 영국과 독일을 압박하기가 쉬웠지.”
“그런데 조선 사절단의 미국과 유럽 행보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많아. 러시아와 소통이 적은 건, 아직 정식 상주 사절이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지. 그리고 미국에서 투자를 받고, 미국 군함을 타고 다니는 건 그렇다쳐. 미국인들도 조선에 관심이 많다는 뜻일 테니까. 미국은 괜찮아. 예전에 청국 사절단이 러시아에 왔을 때도 미국 공사랑 같이 왔지.”
니콜라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네가 영국 장군을 조선의 군사고문으로 데려간다는 정보에는 실망이 크다고. 정말이야?”
이선으로서는 예상 가능한 지적이었다.
‘아직 어린 니콜라이가 내밀한 정보를 알 리가 없을 터이니, 차르가 니콜라이로 하여금 나를 떠보라고 했을 테지.’
황제나 정부가 아니라 니콜라이가 먼저 경고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안심이었다. 즉, 설득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먼저, 내가 권좌에 올랐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통치는 국왕 폐하를 대리하여, 섭정인 할아버님과 기무처의 관료들이 하고 있지. 할아버님과 조선 관료들은 여전히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못했어. 러시아가 바로 국경 옆에 붙어 있으니까.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훨씬 친밀하게 생각하지. 나는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국가로부터 명을 받아 움직인다고.”
이선의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해명이 긴 걸 보니, 영국 장군을 군사고문으로 데려간다는 말이 맞나 보군.”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맞아. 전 상승군 사령관 고든을 조선의 군사 고문관으로 초빙했지.”
“실망스러운 일이군. 러시아와 영국의 관계를 모르나?”
“알지. 하지만 조선은 청과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해. 그 말인즉슨, 동아시아 무역시장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야. 대국인 청과 일본도 영국 눈치를 보는데, 조선이 어떻게 러시아만 믿고 영국을 방기할 수가 있나? 가뜩이나 내가 친러파라고 찍혀 있는 상황인데. 약소국의 외교는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이선은 니콜라이가, 아니 러시아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리고, 고든은 영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야. 중국에서 오래 복무했기 때문에 동양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청나라에서도 고든은 신뢰하지. 조선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이해가 되는 상황이긴 해. 그래도 군부에서 좋아하지 않을걸. 영국 장군이 신생 조선군의 군사고문관을 맡는다니. 그 근간이 되는 고려대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창설한 부대잖아?”
“그러니까 영국이 경계한다고.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집어삼킬까 봐 우려하고 있어.”
“그럴 리가 있나! 하여튼 영국놈들, 언제나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지. 러시아가 터키를 분할한다, 러시아가 인도를 공격한다, 러시아가 동투르키스탄과 몽골을 병합한다. 그중에서 실현된 게 뭐가 있나? 다 영국이 만들어낸 흑색선전이라고. 그래, 이번에는 러시아가 조선을 집어삼킬 차례인가?”
니콜라이가 발끈해서 외치니, 이선이 달랬다.
“나도 알아. 하지만 영국은 러시아 위협론을 핑계 삼아 조선 영토를 점령하고 내정에 간섭할 계획도 있다고. 난 그걸 막으려는 거야.”
이선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 계획을 암시하자, 니콜라이가 놀라서 외쳤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지. 러시아 입장에서도, 영국이 조선 영토를 점령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그러니 전하가 황제 폐하께 말씀 좀 잘 드리라고. 난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고 있으니.”
이선의 달변에, 결국 니콜라이는 설복되었다.
“알겠네. 황제 폐하께 말씀 드리지. 공작은 러시아의 은인이야. 그러니 서로 오해가 없었으면 해.”
“물론이지. 나와 러시아는 특별한 관계니까. 나는 황제 폐하의 은의를 절대 잊지 않네.”
이선의 말은 니콜라이를 안심시켰지만, 그가 인식하지 못한 묘한 중의성이 있었다.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 조선이 아니라 이선 개인이라는 말이지.’
이선은 피로를 느꼈다.
‘조선 국내에서는 대원군과 관료와 사대부들. 해외에 나와도, 미국 자본가, 영국 장교, 프랑스 외교관, 독일 정치가, 러시아 황제.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계속 설득, 설득, 설득하는 일이군.’
이선의 최대 무기는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빼어난 화술이었다.
‘그걸 토대로 지금까지 성공을 이끌어 온 거니까,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지.’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외교 활동에 이선도 피로감을 느꼈다.
‘나도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한성에서 명령만 내리는 입장이면 좋겠네. 근데 지금은 나 말고 할 사람도 없으니. 빨리 유능한 관료들을 양성해서 내 역할을 분담시켜야겠다.’
이선은 그래서 젊은 관료들을 국제 감각에 뛰어난 인재로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절단은 이선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우고 익혔고, 홍영식과 서광범 등은 상당한 식견을 보였다.
지금까지 나라별로 일정을 정해놓고 다양한 시찰을 한 조선 사절단이지만, 이선은 러시아에선 자유 시간을 주었다.
이선의 명성을 상징하듯, 조선 사절단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저런 초대장이 쏟아졌다.
‘나보다는 내 뒤에 있다고 믿는 황실과 친해지고 싶은 자들이겠지.’
지금까지 수많은 사교활동에 참석한 이선이지만, 러시아에선 오히려 처신을 조심할 생각이었다.
‘환호와 박수 뒤에는 분명히 시기와 질시가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러시아에선 로비를 열심히 할 필요도 없지. 오직 차르 한 사람만 잘 설득하면 돼.’
전제군주제 국가인 러시아에서, 차르만 설득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껏 열심히 보고 익혔으니, 이제 회포를 풀 시간을 주겠소. 다들 즐겁게 시간 보내시오.”
“군 대감께서는 가지 않으십니까?”
“러시아의 겨울이 너무 추운 탓인지, 아니면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몸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소. 아픈 몸으로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없지. 알현 이전까지 당분간 쉴 예정이니, 여러분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오.”
이선은 추위와 건강 핑계를 댔다.
“저런, 그래도 군 대감께서 나서지 않으시는데 어찌…….”
사절단이 우려를 표하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전부 궁전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주인께 실례지. 각자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자유롭게 시찰하도록 하시오. 여러분 모두는 조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니, 알아서 처신을 잘하시리라 믿소.”
“그리하겠습니다.”
이선의 권유에, 사절단은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고 이선이 아예 손을 놓고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났다.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남작. 사업은 좀 어떻습니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잘 되어갑니다. 물론 공작님의 덕도 있지요.”
그는 바로 주식회사 브라노벨의 대표이사, 루트비히 노벨이었다.
1881년 이후, 브라노벨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바쿠 유전의 매장량과 노벨 가문의 혁신성이 맞물리면서, 브라노벨은 상장 5년도 채 안되어 석유시장의 태풍으로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이게 다 남작님의 사업 감각이 뛰어난 덕이지요. 브라노벨이 세계 석유산업을 선도하게 될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모든 주주가 힘을 합친 덕이지요.”
“미국과 서유럽에서도 브라노벨의 소문이 자자합니다.”
루트비히 노벨은 바로 짐작했다.
“스탠다드 오일의 견제가 심하지요.”
러시아와 동유럽을 제외하고,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
경쟁자를 거침없이 무너트리고 정상에 올라선 록펠러는, 브라노벨이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는 데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스탠다드 오일과 브라노벨은 서로 산업스파이를 밀파했고, 모략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본격적인 경쟁체제가 가동하면서,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파리에서 들은 정보가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브라노벨에 투자하고 싶다고 하던데.”
유럽, 아니 세계 최대의 금융가인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고, 각국의 금융을 지배했다.
“그렇습니다. 투자 자금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니까요. 파리에서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1883년, 로스차일드의 프랑스 지부(Rothschild Freres)가 석유산업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카스피해 유전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고, 자연히 브라노벨에 접촉을 취했다.
루트비히는 동생 알프레드에게 협상의 전권을 맡겼고,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과 발명가 노벨 가문 간에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협상은 잘 되었습니까?”
루트비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업비밀입니다만, 공작님은 우리 회사의 중요한 주주이니 모두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500만 루블에 주식의 25%를 넘기려 했습니다만, 로스차일드는 50% 이상을 얻어 대주주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제안은 사실상 로스차일드의 자본에 종속되라는 의미였다. 독자적인 운영자로 남고 싶어 하는 노벨 가문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는 BNITO(Batumskoye Neftepromyshlennoye i Torgovoye Obschestvo), 즉 ‘카스피해 및 흑해 석유 회사’라는 독자적 석유회사를 흑해에 면한 바투미에 출범시켰다.
브라노벨에게는 위협적인 경쟁자의 등장이었다. 러시아와 동유럽 시장은 브라노벨이 지배하고 있지만, 로스차일드가 자본력으로 뒤집을 수도 있었다.
“록펠러에 이어 로스차일드까지.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로군요.”
미국을 대표하는 대자본과 유럽을 대표하는 대자본을 경쟁자로 두게 되었으니, 상대적 약자인 브라노벨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안이 있으십니까?”
“일단 베를린의 독일 은행과 투자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장으로 진출하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지요.”
브라노벨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로스차일드의 유럽시장 장악 계획에 맞서 선공을 취한 것이다.
“나는 브라노벨의 사외이사로서, 우리는 한배를 탄 처지입니다. 브라노벨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이기도 하죠.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러시아 황실에서 뭔가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노벨도 이선의 존재가 소중했다. 러시아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선이라면, 뭔가 대안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에 새로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가 경쟁자로 나선다면, 미국 자본을 대표하고 프랑스 국채 시장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투자가가 우리 편에 서는 것도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