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97
– 97화에 계속 –
97화 중립국(中立國)
“열강의 보증을 받는 중립국이라?”
“그렇습니다. 1839년 런던 조약에서 벨기에의 중립을 보증한 것과 같은 조약 말이지요.”
1830년 혁명의 여파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후, 벨기에 승인 문제를 놓고 열강 간의 대립이 있었다.
1839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5개국은 런던에 모여 조약을 체결했다. 벨기에는 5대 열강으로부터 독립과 영세 중립국을 보증받는다는 조약이었다.
벨기에는 열강의 합의와 보증 아래에 독립과 중립을 이뤄낸 사례로 평가받았고, 1880년대 이후 조선의 중립론자들도 벨기에 사례를 주목했다.
‘적어도 10년간의 평화는 필요해. 10년이면 개혁을 충분히 진행하고, 국민군을 창설해 진정한 자주독립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
이제 막 근대화에 착수한 조선에, 적어도 10년간의 여유는 필요하다는 게 이선의 생각이었다. 10년간 최대한 국력을 신장시켜 진정한 자주독립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선 열강의 보증을 받는 중립국보다 확실한 게 없었다.
‘뭐, 열강의 보증을 받는 영원한 중립이란 건 없지만.’
이선은 열강의 보증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먼 훗날인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런던 조약은 휴짓조각이 된다. 하지만 공식적인 군사동맹이 아니었던 영국이 런던 조약을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으니, 조약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황제의 물음에 내무대신 로리스-멜리코프가 답했다.
“조선은 동양의 발칸입니다. 열강의 보증으로 조선의 영토 보전과 중립을 확약하는 조약을 체결한다면, 극동에서 분쟁의 여지가 사라지게 됩니다. 러시아가 획득한 극동 영토의 안정을 위해선, 적절한 조치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이 동의하느냐가 문제지. 러시아 혼자 나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또, 러시아가 먼저 나서면 주변국이 의심하지 않겠소?”
이때 이선이 나섰다.
“제가 베를린에 갔을 때, 독일의 비스마르크 재상은 조선 중립화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외무차관인 묄렌도르프와 조선에 새로 파견될 독일 외교관이 조선 중립화론을 먼저 제기할 것입니다. 독일이 나선다면, 독일과 동맹 관계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도 동의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러시아가 혼자 나서는 게 아닙니다.”
이선이 이미 비스마르크와 조선 중립에 대해 논의했다는 말을 듣고, 황제와 각료들은 다시 한번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쉽게 믿기지 않는군. 독일이 아무런 조건 없이 조선 중립을 위해 나선단 말인가?”
“비스마르크 재상은 세계평화와 세력 균형을 원합니다. 곧 아프리카 문제를 놓고도 각국을 베를린에 초청, 중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늘 정직한 중재자를 자처하는군. 하지만 그 정직한 중재 덕분에 러시아가 적잖이 손해를 봤지.”
황제는 냉소적이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외교적 패배를 맛봐야 했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냉각 일로였다.
“폐하, 이번에는 다릅니다. 조선의 중립은 독일보다 러시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러시아는 조선이 영국이나 일본에 지배되어, 대(對) 러시아 전진 지지로 활용하는 걸 가장 우려하지 않습니까? 내무대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극동 영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동양 평화는 필요합니다.”
조선과 러시아는 바로 그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영국의 우려와 달리, 극동에서 군사력이 취약한 러시아는 조선을 점령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오히려 영토를 면하고 있는 조선이 반러 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가 러시아를 공격하는 전진기지로 사용되는 걸 가장 우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열강 중에서 러시아가 조선의 독립을 가장 확고히 지지하는 상황이지. 조선이 예뻐서가 아니라, 러시아 자신을 위해서.’
“폐하, 공작의 계획은 진지하게 검토해 볼 만합니다. 독일이 처음 제안한다면, 중립성이 자연히 보장될 겁니다. 러시아가 이를 승인하면 독일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입니다.”
외무대신 기르스는 대표적인 대독 유화파였다. 러시아의 안위를 위해 독일과의 동맹을 재개해야 한다고 믿는 기르스로선, 군부 강경파에게 친독파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조선을 고리로 독일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회복된다면 바라던 바였다.
“비스마르크 재상 또한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회복되길 원합니다. 러시아의 극동 정책을 적극 지지할 의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중립국 제안은 러시아의 극동 정책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러시아가 발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대립하는 게 아닌, 진출 방향을 아시아로 돌리길 원했다.
그걸 파악 못 할 차르가 아니었으나, 그 자신도 발칸에서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아시아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는 곧 영국과의 대립 재개를 의미했다.
“공작, 영국이 러시아를 봉쇄하기 위해 조선 영토를 점령할 의사가 있다고 했지. 공작은 그걸 막기 위해 영국 장군을 군사 고문관으로 초빙하고.”
“예, 폐하.”
“근데 지금까지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았던 영국이, 하필이면 영국이 조선과 수교한 직후에 점령을 계획하고 있다는 건 쉽게 믿기지 않는군. 영국은 동양에서 현상 유지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근래 그럴만한 정세의 변화가 있었소?”
이선으로선 참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1885년 1월 고든의 비극적인 죽음이 영국 여론을 폭발시키고, 글래드스턴 내각은 정치적 위기에 빠진다. 3월에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고, 총선을 앞둔 자유당은 보수당의 압력을 물리치고자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을 계획한다. 그래서 4월에 거문도를 점령한다. 그걸 막기 위해 내가 고든을 조선에 데려왔다. 자유당은 굳이 강경책을 쓸 필요가 없다면, 모험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고?’
이선은 머리를 굴려 논리를 짜냈다.
“정세의 변화가 있었지요. 곧 프랑스와 청국이 베트남을 놓고 전쟁을 벌일 예정입니다. 아마도 프랑스가 승리하고, 청의 위신과 지배력은 또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영국은 그로 인해 동양의 정세가 근본적으로 흔들릴까 걱정하고 있고, 이를 틈 타 러시아가 조선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선수를 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선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프랑스를 세계 패권의 라이벌로 여겼지.’
“으음……. 만약 영국이 조선 영토를 점령하고, 극동에서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저는 폐하의 명을 받고 직접 극동 전권 위원직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 만약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극동은 자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영국 동양함대의 위력 앞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선은 냉철하게 직언했다. 듣기에 따라 불편할 수 있겠지만, 이 중에서 극동을 시찰하며 실무를 맡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선 한 사람뿐이었다.
육군대신 밀류틴 백작과 해군 원수 콘스탄틴 대공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군사력 대부분은 육해군을 막론하고, 유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황공한 말이오나, 크림전쟁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크림전쟁은 보통 크림반도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극동에서도 벌어졌다.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극동영토를 공격했다. 극동은 교통의 미비로 보급선이 닿지 못했고, 러시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헐값에 판매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러시아가 영국과의 전쟁 시 알래스카 방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은 건 겨우 20년 전의 일이었고,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의 방위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극동에서 공격적인 정책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분명 조선의 중립은 열강 간의 대립을 최소화할 수 있소.”
“다만 핵심은 영국, 청, 일본이 동의하느냐입니다. 이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중립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르스의 우려에, 이선이 답했다.
“의외로 쉽게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영국과 청은 현상 유지를 원합니다. 청의 명목상 종주권만 유지한다면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이겠지만,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완충지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중립으로 이를 방지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겁니다.”
일본도 진지하게 조선 중립화론을 고려 중이었다. 이노우에와 같은 ‘온건파’는 조선 중립화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영국에게 설욕할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이용해야지. 결코 영국이 조선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크림전쟁 패배로 재위를 시작하게 된 알렉산드르 2세는, 선황 니콜라이 1세에게 패전의 굴욕을 안기고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영국에게 언젠가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숙원이 있었다.
‘지금은 극동에서 영국과 대립할 능력이 없다. 바야흐로 인내할 때다. 10년이든, 20년이든 때를 기다린다. 시간은 러시아의 동맹이다.’
차르는 은밀히 유럽과 극동 러시아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지 않음에 따라, 역사보다 빨리 시베리아 횡단철도 계획이 잡힌 것이다.
동양에서 최소 10년의 평화를 원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조선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마침내 차르는 결단을 내렸다.
“좋소. 짐과 러시아는 조선의 중립을 지지할 생각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조선은 결코 폐하와 러시아의 은의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선은 러시아의 지지를 얻었다는 데 크게 만족했다.
“단, 전제조건이 있소. 조선과 독일이 먼저 나서야 하오. 러시아는 그 다음에 지지할 것이오.”
“예,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적당한 때를 가늠할 것입니다.”
이선은 지금 당장보다 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동양 정세가 격화됐을 때가 가장 효과적으로 판단했다.
“좋소. 그렇다면 대신회의에서 논의하도록 하지.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은 짐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예, 폐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러시아는 전제국가였다. 황제와 최고위 각료 몇 명이 중대 사안을 결정했다. 차르를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5명이 바로,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고위 그룹이었다.
황제의 구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대신 회의는 조선의 중립국 승인, 독일과의 협상 재개, 새로운 극동 방위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립화 계획에 대해 독일에 이어 러시아의 보증을 받은 이선은, 미국과 유럽에서 거둔 외교적 성과에 만족감을 느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전문입니다.”
“오, 표트르 최라. 최재형 군이 보냈군.”
이선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후에야, 조선 소식을 확실히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은 아직 전신선이 없었다. 조선에서 원산을 통해 정기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고, 연해주에서 이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최재형이 이를 취합해서 페테르부르크로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읽던 이선이 웃었다.
“하하, 고균(김옥균)이 우리의 귀국을 애타게 바라는 모양입니다.”
“조선에서 특별한 소식이 있습니까?”
홍영식의 물음에 이선이 답했다.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대원군과 기무처가 개혁을 잘 이끌어나가고 있어서, 국내 정세는 안정적인 듯하군요. 다만 청과 프랑스 간에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문 때문에, 조선이 들썩하는 모양입니다.”
국제외교의 중심에 있는 이선과 달리, 조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보수파든, 시무 관료든, 개화당이든, 청나라가 서양 열강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문에 동요했다. 정파의 입장에 따라 묘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이제 모든 목표는 달성했다. 조선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군.’
이선은 사절단에게 귀국을 선언했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 내가 그동안 서양에서 준비했던 일들을 풀어나갈 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