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
>1 화>
prologue
“각하, 약혼녀이신 레오폴드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무슨 날인가? 결혼식을 올릴 날짜는 아직 1년이나 남았을 텐데.”
“네, 그런데…… 확실히 카리나 레오폴드 영애십니다.”
한창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빴던 사내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부에서 북부까지 대체 소리 소문도 없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을 방해받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그녀는 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 아무리 약혼을 한 사이라지만 어떻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고 멋대로 방문할 수가 있는 거지?”
최근 북부에 급격히 증가한 마수의 수 때문에 예민함이 한계에 달한 사내, 밀라이언 페스텔리오 공작의 언사가 날카로웠다.
그 뒤를 곧장 따르는 집사, 팽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쯧,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략혼을 맺고 돌아가신 건지. 무덤에서 꺼내 변명이라도 들어 보고싶군.”
불손한 말이었으나 팽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밀라이언은 일과 마수와의 전쟁에 파묻혀 여자를 상대 할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한창 영지를 바쁘게 운영 해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약혼녀의 방문 소식이라니.
딱 한 번 약식으로 치러진 약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 빼고는, 장담하건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밀라이언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고 밀라이언 역시 당연히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제 와 파혼은 어렵겠지?”
“…….”
늘 또박또박 대답하던 팽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지각색으로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군.’
예민하기로는 닷새 굶은 사람보다 더 심각한 밀라이언이 눈을 부라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팽의 시선이 현관 쪽에 고정된 것이 보였다.
‘쯧, 다 들었나 보군.’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팽의 시선 끝에는 그의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봤을 때보다 한 층 더 창백해진 것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설명을 하자고 생각한 밀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은…….”
“파혼, 좋네요.”
“……뭐라고?”
“각하와 제 결혼식은 대략 1년 뒤에 예정되어 있죠?”
밀라이언은 팔짱을 낀 채 그녀, 카리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비딱한 자세로 들었다.
밀라이언은 조금 고까운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3일 철야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서류 앞에서 그는 무척 예민했다. 실제로 그의 눈 밑에는 눈 그늘이 짙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반년에서 10개월 정도 여기서 지내고 싶어요.”
“……미쳤나, 영애?”
밀라이언이 진심으로 물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쓰지 않는 속된 말이었으나 쓸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의 투박한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짙푸른 눈동자가 밀라이언을 직시한다.
“대신 내가 여기에서 떠날 때 파혼해 드릴게요.”
“……그 나이에 설마 가출이라도 했다고 말하진 않겠지?”
“이 나이면 당연히 출가죠.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잖아요. 짧으면 반년이고 길면 10개월이에요. 구석에 별채도 있는것 같던데, 굳이 이 저택이 아니어도 거기도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어서요. 아, 파혼 서류는 가져왔어요.”
그녀는 장갑을 끼지 않아 발갛게 물든 새하얀 손으로 허름한 천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밀라이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당장에라도 쓰레기통에 들어 갈 것 같은 천 가방은 대체 어디서 주워 온 것인가.
“……백작가의 사정이 어려운가?”
“네?”
카리나가 반문했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든 천 가방에 향한 것을 깨달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누가 버리려는 걸 적당히 싼 값에 산 것뿐이다.
“괜히 비싼 가방 들고 다니면 이 먼 길을 오는 동안 험한 일 당했을걸요.”
“도대체 이 먼 거리를 어떻게 온 건가?”
“돈을 주고 마차를 타다가 적당 한 곳에서 내려서 걷고, 또 마차나 상단에 얹혀 오고 그랬죠.”
레오폴드 백작령은 남부 끝에 있다. 웬만해선 수도에 잘 나오지 않는 백작이니 그녀는 백작령에서부터 그가 있는 북쪽 끝 공작령까지 왔다는 말이 됐다.
개인 마차가 있어도 쉬지 않고 족히 한 달은 걸리는 거리다. 밀라이언은 얼굴을 구겼다.
“대체 언제 출발했지?”
“두 달 전에 출발했어요.”
“아니, 그사이 연락 한 번…… 아니지. 그 전에 도대체 세상 물정도 모르는 귀족 영애가 뭘 안다고 혼자서 그 험한 길을 와?”
“……아마도 이게 내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일 테니까요.”
카리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활짝 열린 저택의 현관을 타고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녀가 말없이 울긋불긋한 낙엽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번쯤 내 힘으로, 내가 내딛는 걸음으로 뭔가 해 보고 싶었어요.”
여행은 첫 번째 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하기로 한 첫 번째 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녀는 원하는 것을 하면서 보낼 예정이었다.
‘마지막 여행?’
밀라이언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긴, 귀족 영애가 이런 무모한 여행을 두 번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일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험한 꼴을 당했을거다.
“안 되나요?”
“안 된다고 하면?”
“차선책으로 생각해 둔 것도 있죠. 적당히 상단의 말단으로 들어가서 잡일꾼이라도 하며 돌아 다닐까…….”
생각은 했지만 사실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찬바람을 쐐서 그런지 북부에 들어선 이후 종종 정신을 툭툭 놓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조용히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고 멀지 않은 곳으로 짧은 여행을 다니기도 하며 마지막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허!”
밀라이언은 기가 막혔다.
당돌한 말은 물론이거니와 예전에 봤던 때와 같은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그의 반응을 본 카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각하께서 거절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차선책은 말 그대로 정말 상상만 해 본 거예요.”
“어째서?”
“각하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약혼식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마음에 차지 않는 걸 보는 눈이었으니까요.”
밀라이언이 황당한 눈을 하자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냉큼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건 잘 알아봐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놓칠 것 같지 않았어요.”
카리나가 그의 앞에 종이를 다시 흔들어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노려본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힐끗 쳐다 봤다. 어쨌든 찾아온 손님을 계속 현관에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들어와라.”
“네, 고마워요. 있는 듯 없는 듯 살게요.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없어지면 돌아갔다고 생각해줘요. 그냥 귀찮은 혹이 떨어졌구나 생각하면 돼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백한 피부를 보니 괜한 죄책감이 솟았다. 죄책감이 솟을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어 다시 한 번 카리나를 노려봤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법 추운 듯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밀라이언은 내뱉으려던 말을 목 뒤로 밀어 넣었다.
“팽, 당장 쓸 만한 빈방을 그녀에게 내 줘. 그리고 시중을 들 시녀에게 욕조에 물을 받아 놓으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영애는 일단 씻고 나서 말하지.”
흘겨보는 밀라이언을 뒤로한 카리나는 단정한 연미복을 차려입은 팽의 뒤를 쫓았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곤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처리하지 못하고 나온 일거리가 산더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