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00)
>100 화>
페리얼의 옆에 선 그녀가 저택을 나섰다.
“헤르타!”
아래에서 귀찮은 듯 팔을 괴고 엎드려 있던 헤르타의 귀가 쫑긋 팔랑거렸다.
카리나가 다가오자 헤르타가 고개를 들곤 그녀를 바라봤다. 샛노란 눈에 저번처럼 절박한 살기는 없었다.
“크릉.”
낮게 운 헤르타가 몸을 한껏 낮췄다.
사지를 쫙 벌리는 게 올라타라는 듯했다. 잘 지내고 있다더니 정말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다.
“오셨습니까, 영애.”
“아, 고레든 경.”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카리나가 이내 반갑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는 상당히 강한 사람이니 밀라이언을 따라갔을 거라고 생각 했다.
‘후발대라고 들었는데……’
카리나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각하께 따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후발대와 함께 움직여 이후 합류할 예정입니다.”
“……고레든 경이?”
“네,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니, 물론 밀라이언이 명령했겠지만…… 선발대에 합류하고 싶으셨을 것 같아서.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나던걸.”
고레든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짧게 드러난 감정의 동요였다. 고레든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누군가는 후발대의 호위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고레든의 주변으로는 기사와 병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한 듯했다. 그래도 영 그만한 기사를 곁에 두기엔 불편했다.
“고레든 경이 괜찮다면 다행이지만요.”
“일단, 마차를 준비했습니다만 헤르타를 타고 가실 예정이십니까?”
“아…….”
카리나가 잠시 고민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헤르타가 양 팔다리를 쫙 펼치며 드러누웠다.
쿵-.
묵직한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절로 헤르타에게 집중됐다. 저번처럼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헤르타?”
“크르웅!”
고레든이 힐끗 헤르타를 바라봤다.
카리나가 푸스스 입가를 허물며 헤르타의 미간을 슥슥 쓰다듬었다. 카리나의 힘은 사라졌다. 그녀는 아직 헤르타가 이 땅에 서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기한테 타라는 거 같네요. 전 그럼 그냥 헤르타랑 함께 갈게요.”
“위험하니 조심히 올라타십시오.”
“네, 괜찮아요.”
카리나가 엎드린 헤르타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밟고 그대로 등 위에 올라탔다.
고레든이 조심스럽게 자리 잡는 카리나를 보곤 헤르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빠르게 움직이지 말고 영애를 태운 채로 싸움하지 마라.”
고레든의 눈동자와 헤르타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헤르타가 콧김을 훅 뿜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고레든이 순순히 몸을 돌려 챙겨야 할 것들을 살폈다.
카리나가 엎드리듯 헤르타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헤르타,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파다닥,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운지 헤르타의 귀가 팔랑거렸다.
카리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뒤로했다.
“넌 내가 그린 그림에서 나왔잖아.”
“크릉.”
“그리고 그때 뭔가를 죽여서…… 뭔가를 차지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 머릿속으로 울리던 전음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상황을 따지면 분명히 헤르타의 것이다.
평범한 인간과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뭣보다 그 살기에 점철된 목소리는 헤르타의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헤르타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을 바라봤다.
“네가 살아 있어서 기쁜데,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는 궁금해.”
-주인, 생명…….
카리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또 누군가가 머릿속에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다. 부르르 몸을 떤 그녀가 조심스럽게 헤르타를 내려다봤다.
누가 봐도 지금 말을 건 것은 헤르타였으니까.
“헤르타……?”
헤르타의 귀가 제 부름에 답하듯 다시 한번 파닥거렸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진짜 헤르타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숨을 삼켰다.
– 대신, 먹었다.
내 생명을 대신 먹었다고?
내 생명을 먹었다는 건가? 카리나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주인, 생명, 대신, 먹었다?’
내 생명 대신 먹었다는 건가.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기적을 일으키는 대가는 그녀의 생명이었다.
그것 대신 먹었다는 건가?
카리나가 숨을 삼켰다.
“내 생명을 대신할 걸 먹었다는 거야?”
“크릉.”
낮은 울음소리가 대답처럼 들렸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에게 생명을 대신할 것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마수를 먹으면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때도 뭔가 찾는 듯했지.’
없다고 하면서 또 다른 마수를 잡아먹었다. 내장을 헤집던 헤르타의 모습을 떠올리며 카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그게 뭔데?”
-핵.
핵은 뭐야?
밀라이언에게 물어보면 알려나.
카리나가 고민 끝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르타는 아무래도 길게 말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단어가 잘려서 알아듣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카리나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의 핵이 뭐냐고 밀라이언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그녀가 손목에 찬 팔찌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단단한 것이 만져지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고레든 경의 지시에 따라 이윽고 정리를 끝낸 후발대가 출발했다.
* * *
콰앙-!
밀라이언은 숲의 초입부터 보이는 마수에게 곧바로 달려들어 베어 버렸다.
무거운 목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숲에는 그들이 늘 주둔지로 삼는 공간이 있었고 그곳을 정리하는 게 선발대의 첫 일이었다.
“각하, 주변에 더는 마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치워.”
밀라이언이 칼을 비스듬하게 내리며 말했다.
칼끝이 숲의 흙바닥에 닿았다. 사방이 시체와 핏물로 엉망이었다. 밀라이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론 있나 확인하고.”
“예.”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밀라이언이 검을 옆에 꽂아 둔 채 팔짱을 끼며 나무에 기대섰다.
불을 피우고 인기척이 생기면 마수는 쉽게 이곳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주둔지 주변에는 여러 가지 트랩을 설치하기도 했다. 주둔지의 트랩은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용 이었다.
이곳까지 침입하기 전에 기사들이 알아챌 수 있는 시간 끌기를 위한 용도.
“지금 잡은 것 중에 하론은 없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안쪽에 가져다 버려.”
밀라이언이 한숨처럼 말했다. 핏물로 엉망이 된 주변을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핏물도 다 닦아내.”
“네? 이 많은 피를 어떻게 다 닦습니까?”
“후발대가 놀라면 어쩌려고 그러지?”
“아니…… 뭐, 우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놀랄 후발대가…… 악!”
퍽 소리와 함께 불만을 토하던 기사의 고개가 앞으로 푹 숙어졌다. 기사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휙 고개를 들었다.
“왜 때려??”
“닥치고 해. 눈치 없는 새끼.”
밀라이언이 왜 그런지는 뻔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다.
늘 얘기를 안 하던 그가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는 건 아마 눈치 없는 이놈 정도일 것이다.
“……아, 왜.”
“시끄럽고 빨리 물이나 퍼와.”
차분한 외모의 기사, 유리가 껄렁해 보이는 기사를 쫓아내며 말했다. 노란 머리카락에 피어싱까지 찬 기사는 투덜거리면서도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로한, 저놈이 나쁜 건 아닌데 보시다시피 눈치가 전혀 없습니다.”
“됐다. 오기 전에 얼른 치워.”
“영애께선 후발대와 함께 합류 하시는 건가요?”
“그래.”
“알겠습니다. 최대한 피 냄새도 없애 보긴 해야겠군요. 예민하신 편인 것 같았으니.”
아무리 물을 뿌려서 핏자국을 가린다고 해도 냄새까지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카리나라면 분명히 내색하지 않고 웃어 보일 게 분명했기에 더욱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말을 해 줬어야 했나.’
죽지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녀에게 어떤 말도 전하지 못한 것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저 숨이 턱 막히고 말문이 막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일이 전부였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슨 기분으로 웃었을까? 무슨 기분으로 파혼을 조건으로 내밀었을까?
대체 무슨 기분으로 미래를 얘기하는 자신의 앞에서 대답 없이 웃었던 것일까.
자신은…… 대체 몇 번이나 무지를 이유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사람 참 우습게 만들어.”
밀라이언이 작게 중얼거렸다.
카리나는 처음부터 그랬다.
멋대로 찾아와 생각지도 못하게 사람을 당황하게 하더니 마지막까지도 말문이 턱 막히게 한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곁에 있는 것.
밤중에 일으키는 발작을 곁에서 같이 달래 줄 수 있는 것 정도였다.
그냥 그뿐이었다. 레오폴드라는 성까지 버린 카리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카리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품고 있는 감정조차, 아마 최후의 최후까지 입 밖에 꺼내는 일은 없으리라.
“떠나…….”
떠나다니, 어디를?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녀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멋대로 들어와 허락도 없이 스미어 제 안에 조용히 자리를 잡아 버리고선 훌쩍 떠나려고 한다.
‘하론을……’
그러니 하론을 구해야 한다. 반드시 하론이 필요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그것은 그녀의 통증을 줄여 줄 유일한 열쇠. 그녀가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