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04)
>104 화>
* * *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주둔지로 향했다.
울다 지쳐서 결국 기절하듯 정신을 놓아 버린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니 속이 답답했다.
“각하, 오셨습니…… 까…….”
유리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목소리까지 한껏 늘어졌다.
밀라이언은 그를 한 차례 힐끗 쳐다보곤 별말 없이 성큼성큼 주둔지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막은 세웠나?”
“아, 일단 시작은 했을 텐데…… 아직 완벽하진 않을 겁니다.”
“잠자리만 먼저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잔뜩 긴장했는지 뻣뻣한 자세로 커다랗게 목소리를 높인 그를 밀라이언이 말없이 노려봤다.
유리가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쪽입니다아…….”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개미 목소리보다도 더 작게 낮춘 유리가 말했다.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 그나마 구색을 갖춘 침대 위에 카리나를 눕혔다.
자면서도 울었는지 맺혀 있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또르륵 떨어진다. 그가 조심스럽게 땀에 여기저기 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좋아해서…… 미안해요…….”
카리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저 울기만 했다.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던가.
고개도 숙이지 못한 채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 녀의 모습에 제 속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리나에게 이불을 덮어 준 밀라이언이 그녀의 이마에 한 차례 입을 맞추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곧장 천막을 빠져나갔다.
“어……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차게 적신 수건이랑 먹을 물 가져다가 안에다 둬.”
“아! 네, 알겠습니다!”
“눈 깔고 들어가서 두고 곧장 튀어나와. 다른 짓거리하면 죽인다.”
서늘한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유리가 몸을 굳혔다.
정말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네, 알겠습니다! 근데 어디 가십니까?”
“근처.”
밀라이언이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주둔지에서 멀어지니 주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가 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붉게 점멸하며 타올랐다.
그가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웬만해선 안 피우려고 했는데.’
궐련이라도 피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마수들 틈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아직 그녀와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우는 카리나를 달랬을 뿐이다.
그나마도 달래면 달랠수록 더 서럽게 울어서, 결국 마지막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쓰러지는 그녀를 품에 안고 천막에 눕히는 것 외에는.
궐련을 깊게 빨아들이자 폐부 속 깊은 곳까지 연기가 파고들었다. 밀라이언의 동공이 살짝 풀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가 싫어질 정도로 짜증이 났다.
그녀가 얼마나 제 감정을 억눌러 왔는지 알 것 같아서. 그 작은 몸으로,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무엇을 참아 내며 제 곁에 머물렀는지 알것 같아서.
궐련 끝을 으득, 짓씹은 밀라이언이 굳게 쥔 주먹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단단한 나무 기둥이 움푹 파였다.
퍽, 퍽, 퍽-! 퍼억-!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밀라이언은 나무 기둥을 주먹으로 쳐댔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베여서 피가 배어 나와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나무의 안쪽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구멍을 뚫고서야 밀라이언이 팔을 힘없이 아래로 떨궜다.
“젠장.”
이를 악문 그가 낮게 읊조렸다.
진정제가 섞인 궐련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흡입해도 답답한 감정이 사라지질 않았다. 밀라이언이 다시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카리나.”
대체 무슨 감정이었을까?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대체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제 손을 잡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차분하게 써 내려갔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남지 않은 궐련을 손에 쥔 그가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래도 한 개비를 전부 피우니 아까보다는 숨통이 트인 듯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천막을 향해 걸어가던 밀라이언이 걸음을 다시 멈췄다.
어느새 주둔지에는 후발대가 도착해 있었다. 막사도 모습을 갖 춘 지 오래다. 그뿐이랴, 여기저기서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꿈만 같았다. 아니, 그녀와 있었던 일들이 꿈만 같았다.
그가 피가 배어 나온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흩뜨렸다.
“죽기…… 싫어…….”
“좋아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바란 것은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죽기 싫다고 했다.
그저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밀라이언은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 말 한마디를 힘겹게 꺼낸 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몹시 불편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
그가 조심스럽게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인영은 침대에 우뚝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 색채가 스며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이 생겨났다.
발갛게 물든 눈을 반으로 접어 웃으며 그녀가 밀라이언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지 않는 건가 걱정했어요.”
“……내가 그대를 두고 어디를 간다고.”
밀라이언이 옅은 미소를 띤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자연스럽게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뭐가 좋은지 카리나는 배시시 웃었다.
“제가 주제넘게 밀라이언한테 너무 어리광을 피운 것 같아서요. 혹시나 너무 울어서 짜증이 나진 않았을까 걱정했어요.”
“……무슨.”
“밀라이언이 불편하다면, 아까 있었던 일은 다 잊으셔도 괜찮아요. 괜한 말이었어요.”
지끈거리며 아파지는 심장을 밀라이언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제 감정에 휘둘려 윽박질러서 그녀를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제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그녀로 인해 심장이 아팠다.
난생처음 겪는 기묘한 통증에 그는 어쩐지 눈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밀라이언의 다정함에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요. 음, 사실 그렇게 울었지만, 생각보다 저는 괜찮아요.”
“…….”
그녀는 웃는 얼굴로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밀라이언은 제 감정을 억누르느라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담담한 척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밀라이언은 동정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약속 대로 떠날 거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연습해 봤다는 듯 그녀의 맑은 웃음이 서린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밀라이언은 쉴 새 없이 제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사파이어같이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결국 고개를 떨궜다.
“있잖아요, 밀라이언.”
“…….”
“밀라이언이 내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내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을 속인 건 나예요. 원망하는 건 괜찮지만…….”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앙상하게 야위어 차가운 손 끝이 그의 볼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런 표정은 하지 말아요.”
“내가…….”
물에 푹 젖어 잠긴 듯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지?”
밀라이언의 물음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이걸 어떤 표정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굳이 말하자면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적어도 북부의 공작인 그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요.”
“그게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표정을 한다는 건…… 지금 내가 당신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그러지 마세요.”
“그대야말로 내게 이러지 마.”
밀라이언은 잔뜩 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애절하게, 마치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내게 어리광을 부려 줘.”
“…….”
수많은 말을 고민했다. 이 천막을 열어젖히기 전까지 생각한 것은 많았다. 고민했던 수많은 말 중엔 난생 해 본 적도 없는,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말도 있었다.
그녀를 회유할 나름의 계책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해야지.
어떻게라도 살게 하자고, 그런 마음이라도 갖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녀 앞에 서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자신을 밀어내려는 그녀의 앞에선 무엇 하나 쓸모없었다.
“내게 그대의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 줘.”
“…….”
“날 쫓아내지 말아 줘.”
밀라이언이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언젠가 핏빛 같다고 생각했던 시뻘건 눈동자가 지금은 아름다운 루비처럼 보였다.
카리나는 그저 숨을 멈춘 채 그 얼굴을 바라봤다.
“……죽지 마.”
“…….”
“죽지 마, 카리나.”
밀라이언이 고개를 떨궜다. 동시에 카리나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자신이 없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날 그대의 곁에 있게 해 줘.”
“밀라이언…….”
“살고 싶다고 해 줘.”
“…….”
“카리나, 제발.”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무엇이 그토록 당신을 애절하게 만드는가. 왜 당신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거야?
“사랑해.”
그렇게 수많은 말 중에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