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05)
>105 화>
멋이라곤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투박하게 내뱉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을 수단이 없었다. 자신을 깎아내리며 또다시 가시로 된 갑옷을 주섬주섬 주워 두르려는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밀라이언을 품에 끌어안았다. 기어코 눈에 맺힌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힘껏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라는 인물을 끌어안았을 뿐이다. 대답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 * *
“요즘 수도에 기묘한 소문이 돌더군요.”
“기묘한 소문?”
인프릭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이 영 싱숭생숭한 차에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카리나의 편지는 쌍둥이를 제외한 가족 전원에게 전해졌다.
백작 부인은 소식을 듣자마자 앓아누웠다. 몇 날 며칠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이제는 식욕도 잃은 듯이 굴었다. 그나마 쌍둥이들이 돌아가며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네, 제법 유명한 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프릭, 대체 이런 때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근데 그 화가의 이름이 무척이나 독특해서요.”
인프릭의 담담한 목소리에 레오폴드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들이 이유 없이 실없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인데 그러느냐.”
“카리나…… 라고 하더군요.”
“뭐라고?”
“화가의 이름이 카리나라고 합니다. 레오폴드라는 성 없이, 그냥… 카리나요.”
인프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웃는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인프릭의 얼굴은 어두웠다. 카리나의 편지를 전해 받은 뒤부터 이렇게 됐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네, 레오폴드라는 성은 없었습니다. 편지에서 카리나가 말한 대로 말이죠.”
“너무 비약이다.”
레오폴드 백작의 말에 인프릭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내젓는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런 태도가 그녀를 멀어지게 했다는 것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카리나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칼로스 공작이 말해 주셨을 때도 아버지는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인프릭.”
“그 아이의 편지에 적혀 있지 않았습니까. 카리나 레오폴드가 아니라 ‘카리나’로 유명해질 거라고. 자신이 그린 그림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거라고요.”
“…….”
“시기가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대로 북부의 공작에게 카리나를 맡겨 둘 생각입니까!”
인프릭이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에 찌든 눈 밑엔 짙은 눈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오폴드 백작의 얼굴이 답답함에 물들었다.
“북부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그곳은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어요! 의학이라곤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하물며 그게 정말 칼로스 공작의 말대로 예술병이라면……!”
그런 거라면 수도에서 고쳐야 옳았다.
다행히 칼로스 공작은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예술에 관해 잘 아는 이는 칼로스 가문을 필두로 한 예술 가문들이었다.
레오폴드 백작이 쥐고 있던 펜을 다시 잉크병에 꽂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마도 이 먼 북부에서 당신께서 있는 그곳까지 내 이름이 울려 퍼지겠죠.]편지의 한 줄을 차지하고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정말 그 아이인가?’
편지를 받은 이후, 어떻게든 북부에 들어갈 수단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카리나라도 돌려받아야 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 따로 접견까지 청해 둔 참이었다.
“그림을 보았느냐?”
“누군가 한 달 전쯤 있었던 경매에서 얻은 그림을 가게에 전시해 놨다고 합니다. 오늘 보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래, 지금 가 보자꾸나.”
레오폴드 백작이 서류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화가가 카리나가 정말 맞는다면, 경매의 뒤를 조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빠르게 저택을 벗어났다.
인프릭이 말한 수도의 중심가에 있는 거대한 건물은 은행이었다.
은행에도 귀족 전용 건물과 평민 전용 건물이 있었다. 그림은 평민 전용 건물에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이 발을 디뎠을 때 그곳은 인산인해였다. 평민이고 귀족이고 뒤섞여 그림을 보기 위해 목을 쭉 빼고 있었다.
레오폴드 백작이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게 무슨…….”
“이 작가가 수도에서 무척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이번에 겨우 열 작품이 처음으로 경매에 올랐는데 그 값이 지금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하더군요.”
인프릭이 묵묵히 미리 알아 온 정보를 입에 올렸다.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자리한 레오폴드 백작의 표정이 무척이나 불만스럽게 보였다.
평민들 사이에 줄을 서다니. 이런 면이 팔리는 일이 다 있는가.
“우리가 대체 누구인데 여기서 줄을 서야 하는 것이냐.”
“귀족이고 평민이고 줄을 서지 않으면 보지 못하게 해 두었습니 다. 경비도 삼엄하다고 들었어요.”
“허어…….”
레오폴드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줄어들 기미가 없는 줄을 보며 인프릭에게 말했다.
“인프릭, 난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카리나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녀의 그림은 칼로스 공작께서도 인정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흥미롭다고만 했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애초에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카리나가 대체 무슨 그림을…….”
레오폴드 백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시간 낭비 같구나. 이러고 있는 것도 바보 같다. 이만 돌아가자.”
레오폴드 백작이 줄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미 뒤쪽으로도 많은 사람이 줄을 또 길게 서고 있었다.
레오폴드 백작의 얼굴이 불쾌함에 물들었다.
“아버지, 또 같은 실수를 반복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라고?”
“아버지의 그 무신경함이 그 아이를 그렇게 몰아붙였습니다. 늘 괜찮다고만 해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를 스스로 절연까지 하게 만든 것은 우리 가족입니다.”
카리나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프릭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때 조금 어색하더라도 말을 걸어 볼걸. 괜찮다는 말보다 조금 더 다른 말을 해 줬으면 좋았을걸.
뒤늦은 후회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해 줘 볼 것을.
가족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니까 어떤 상처를 받아도 갈 곳이 없을 거라고.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육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게 이어져 있다고 했으니까.
별것 아닌 상처니까 나중에 달래 줘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되면 그때 마음을 터놔도 되겠지. 작은 생채기쯤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몇 번이나 그랬지?’
그렇게 카리나의 뒷모습을 보고, 그녀의 괜찮지 않은 감정을 어렴풋이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돌렸던 건 몇 번이었더라?
그 수를 셀 수도 없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조금 서운한 것은 금세 풀릴 테니까. 며칠 뒤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웃곤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웃음은 사라졌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일 때가 많았다.
그저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작은 일엔 서운해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설마 그것이,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과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족이니까 무엇이든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께서는 알고 계셨나요? 밖에는 아벨리아나 페르던이나 오라버니가 아닌, 내가 주인공인 세계도 있었어요.”
“나는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들께 내 이야기를 하길 포기 한 거예요.”
그래서 몰랐다.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적어도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없었다. 카리 나를 위한 것은 없었다. 그녀를 위한 생일은 언제나 다른 일이나 가족 행사가 끼곤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여동생은 그 흔한 다과회 한 번 열지 않았다.
자신 역시 카리나를 위해서 제대로 된 선물을 챙겨 준 적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음을, 그것이 끝을 불러왔음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이번엔 제가 부탁할게요. 부디 앞으로 울려 퍼질 제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사망 처리는 언제든 편하게 하세요.]카리나는 선을 그었다. 완벽하게 그어 버렸다.
그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해 달라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그녀에겐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보였구나 싶어서.
그 글을 보고 단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을 빛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카리나는 자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카리나가 편지에 쓴 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도…… 그 아이에게 너무 무심했어요.”
“대체 뭐가 무심했다는 말이냐!”
언성을 높이던 레오폴드 백작이 주변을 살피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묻자꾸나. 대체 내가 어느 면에서 무심했느냐? 대화를 하고자 했으면 대화를 했을 거다. 의식주도 용돈도 부족함 없이 채워 줬다.”
“그래서 카리나가 그 용돈을 가지고 나갔습니까?”
인프릭이 되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