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11)
>111 화>
“페리얼, 괜찮습니까?”
“윈스턴…….”
윈스턴이 다가와 물었다. 그들은 지난 두 달간 서로 연구를 하며 제법 격식이 없어졌다.
페리얼의 답답한 심정을 윈스턴은 묵묵히 들어주고 조언해 줬다. 덕분에 페리얼 역시 윈스턴을 제법 의지하게 됐다.
무너진 표정의 페리얼이 이를 악물며 비틀비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제 머리카락을 헤집은 페리얼이 고개를 떨군다.
곧 울음을 터뜨릴 아이 같은 얼굴에 윈스턴이 쓰게 웃었다.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손에 닿을 듯 말듯 한 것은 더 안달이 나는 법이었다.
“잘 안 되시는 모양이군요. 이 늙은이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 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게 아냐……. 내가 부족한 거다. 어떻게 해도 창조자를…… 카리나를 살릴 방법이 보이질 않아. 사방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것 같이.”
페리얼 칼로스가 양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예술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다. 기적을 일으키면서도 그 대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방법도 찾아냈다.
이미 악화된 예술병에 손상된 부위를 조금이라도 다시 돌릴 방법을 찾았다.
“저러다…… 카리나가 죽으면 어쩌지? 시간 내에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윈스턴?”
윈스턴이 성큼성큼 페리얼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렸다.
스물여섯, 누군가의 무게를 짊어지기엔 페리얼도 밀라이언도 아직 어린 나이였다.
적어도 반백 년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에겐 그저 어린아이들로만 보였다.
이른 나이에 공작이라는 높은 작위에 발을 들인 이들에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란 견디기 힘든 일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을 주었다면 더욱더.
“밀라이언은 평생 내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겠지. 카리나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원망할지도 몰라.”
“이 늙은이가 보기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제가 압니다. 그리고 그건 아가씨도, 각하께서도 알고 계실 테고요.”
윈스턴 역시 그녀의 병을 낫게 해 주고 싶어서 먼 길을 달려왔지만 결국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윈스턴 역시 답답했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생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어깨가 무거워서 질식할 것 같다.”
“삶을 살다 보면 가끔 과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도 있지요.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수 없는 때도 있고요.”
어깨에 올려진 주름이 자글자글한 윈스턴의 손길에 페리얼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하지.’
그가 자신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이런 종류의 어른을 곁에 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윈스턴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엉엉 울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도 안다.
끝까지 노력해서 실패한 것과 중간에 안 될 것 같다고 포기한 것은 다르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결코 밀라이언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평생 스스로를 원망하겠지.
“물론, 혼자일 때는 그런 방법 밖에 없습니다.”
“뭐?”
“하지만 지금 페리얼에겐 저도 페스텔리오 각하께서도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아까는 헤르타가 산짐승 한 마리를 천막 앞에 던져 놓고 가더군요.”
“……그건, 하론을 내가 관리하고 있으니 먹이를 달라는 말이겠지.”
그 거대한 것이 쿵쾅거리며 짐승 한 마리를 잡아와 천막 앞에 던져 놨을 걸 생각하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윈스턴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는 한증 긴장이 풀린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윈스턴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손을 뗐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한숨 돌리시면 또 다른 것이 보일 테니까요.”
“……윈스턴.”
“네.”
떨어뜨린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굽혔던 윈스턴이 몸을 돌렸다. 페리얼이 고개를 들어 윈스턴을 한 번 바라보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두 달 전쯤 마수를 해부하면서 알게 됐어. 실험도 해 봤고 가능성도 있어.”
“무슨 방법입니까?”
“그게…….”
페리얼이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윈스턴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이윽고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페리얼의 입술이 서서히 닫혔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론적으론. 아니, 실제로도 가능했어.”
“……그렇군요.”
윈스턴이 말을 아꼈다. 그가 말을 얹을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들은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페스텔리오 각하와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쳐 날뛰지 않을까?”
“아니면, 아가씨 본인에게 말을 하는 편이 낫겠지요.”
“무서워서. 꼭 살려 준다고 약속했는데…….”
페리얼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광기에 휩싸여 자신을 상처 입히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카리나의 눈빛을 기억한다.
공포에 질려, 죄책감과 미안함에 점철된 그 표정은 더는 다정하고 따스하게 빛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눈도 제대로 마주 쳐 주지 않아.”
“마음이 여린 분이니 미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나중에 대화해 보십시오.”
“……윈스턴, 자네는 항상 쉽게 말하는군.”
“나이가 들면 두렵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답니다.”
윈스턴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페리얼이 고개를 들자 윈스턴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다정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고 싶었던 일을 못 해 본 것, 조금 더 젊었을 적에 해 봤으면 좋았을 것,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일이나 하지 못했던 작은 반항 같은 것들도 머릿속을 맴돌곤 합니다.”
고개를 든 윈스턴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막상 지금 하려고 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이죠.”
추억하듯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페리얼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잔뜩 흥분했던 속도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쩐지 붉게만 느껴졌던 시야가 다시 깔끔해졌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에 목소리를 높였다가 한 번 크게 혼이 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더군요.”
“그런가.”
“네, 그러니 한 발 내딛는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두렵다는 이유로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윈스턴의 말에 페리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온 적은 없지만 어쩐지 그 말만큼은 와 닿았다.
페리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두려움조차 전율로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젊은이들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자네도 아직 한창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면 관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 소리 말고 오래 곁에 있어 주게.”
페리얼의 말에 이번엔 윈스턴의 눈이 큼직해졌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 채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침침했던 천막의 틈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 * *
“정말 북부까지 직접 갈 생각이에요?! 여기는 어쩌고요, 카시스!”
“카리나를 데려와야지.”
레오폴드 백작이 한숨처럼 말했다.
“인프릭도 자꾸 가 보라지 않나. 말로 빠르게 달리면 그렇게 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그러니 이쪽 일은 한동안 좀 부탁해.”
“차라리 폐하께 부탁드려서 공작에게 압력을 넣는 게 낫지 않아요?”
백작 부인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황제 를 따로 알현했었다. 그러나 북부와 연관된 일인 것을 알고 황제는 발을 뺐다.
“약혼한 상태의 남녀 문제에 끼어들 순 없다고 하더군.”
단순히 공작과 괜한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런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황제가 그렇게 말한 이상 당연히 그에겐 물러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인프릭도 간다면서요!”
“그래, 그리고 녹턴도 함께 갈 거다. 그쪽에 있는 스승이 자길 불렀다고 하더군.”
“리아의 주치의는요?”
“따로 고용해 뒀어. 인수인계도 마쳤으니 걱정하지 말고.”
백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가 레오폴드 백작에게서 몸을 돌려 인프릭을 바라봤다. 백작 부인이 손을 뻗어 인프릭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들, 네가 백작가의 미래인 건 알고 있지? 꼭 가야겠느냐?”
“어머니, 전 카리나에게 미안해요. 만나서 대화를 해야겠어요.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신가요?”
“물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하지만……. 가주와 후계자가 전부 집안을 비우면 어떡하니.”
백작 부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적어도 두 달은 백작저가 비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녀로선 그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보니 그 예술병이라는 건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해. 내 생각엔 카리나가 화가 나서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어머니, 저는 카리나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도 예술병에 대해선 알아 봤습니다. 팔다리를 잃거나 시력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프릭이 주먹을 꽉 쥐며 언성을 높였다. 백작 부인이 놀란 토끼 눈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인프릭이 살짝 몸을 떨고 입을 닫았다.
“인프릭 그만하거라. 대체 어머니께 무슨 막말이냐!”
“……죄송합니다.”
“그리고 네 어머니 말이 맞다. 우리도 나름대로 알아봤다. 예술병이란 것은 예술만 하지 않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해.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면 될 일 아니냐.”
인프릭이 숨을 삼켰다. 이윽고 그가 답답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근본적인 문제에 누구 하나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았을 카리나가 왜 그림 그리길 멈추지 않았을까.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사가 검을 놓을 수 없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