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15)
>115 화>
“그게 나왔던 마수들의 특징은 없었나?”
“상등급의 하론을 품고 있던 마 수들은 유독 흉터가 많더군. 치명상도 많았던 것 같아. 내 생각엔 많이 죽었다가 살아날수록 몸에 흔적이 많이 남는 게 아닌가 싶은데.”
밀라이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신이 흉터로 뒤덮인 놈이 하나 있었다.
아직 잡지 못한 짜증스러운 놈이. 그리고 마수라기엔 비정상적으로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뛰어났던 녀석이.
그것이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반복된 삶에서 축적한 지식이라면 이해가 될 법도 했다.
“……그럴 법한 놈이 한 마리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군.”
“그럴 법한 놈?”
“있어. 흉터가 가득한 데다가 인간만큼이나 머리를 굴리는 마수가 한 마리.”
밀라이언이 무릎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일정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페리얼이 두 사람의 모습에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카리나, 난 잠시 숲에 남아야겠어. 그대는 페리얼이랑 윈스턴과 먼저 돌아가.”
“……하지만.”
“어차피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을 살려 두는 것도 찝찝했어. 영지에 습격을 가할 정도의 녀석이야. 살려 두면 후환이 될 거야.”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큼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이미 살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으니까.
“……다치지 마세요. 물약도 꼭 챙겨 가시고요.”
“다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밀라이언, 자네는 어디 돌아오지 못할 곳 가는 건가?”
팔짱을 낀 페리얼이 눈꼴사나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밀라이언이 페리얼을 한 차례 노려봤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
“친구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볼일 끝나자마자 이렇게 털어 버리기 있는 건가?”
“그럼? 여기서 구경하려고?”
밀라이언이 카리나와 부쩍 가깝게 얼굴을 맞댄 채 되물었다. 입술이 맞물리기 직전이었다.
페리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네는 그런 인성으로 대체 어떻게 사는 건가?”
“너보단 낫지. 연애도 하고 있거든.”
밀라이언의 입술이 기어코 카리나의 입술과 맞물렸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과 동시에 페리얼이 그대로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입술을 맞댄 채 카리나를 덜렁 들어 올린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곤 그 위에 올라탔다.
그의 혀가 천천히 카리나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 * *
“이쪽인 것 같습니다.”
“그래.”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숲 깊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레든과 밀라이언, 겨우 둘밖에 없는 단출한 인원이었다.
쿵, 쿵-
아니, 헤르타까지 한 마리까지 총 두 명과 한 마리다.
“빨리 좀 찾아라. 너도 네 주인 살리고 싶었던 거 아닌가? 그래서 그녀의 생명력 대신 먹을 만 한 걸 찾았지.”
헤르타가 밀라이언을 힐끗 보더니 콧김을 훅 내뿜었다.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것이 토라진 아이를 보는 것도 같았다.
같이 있다 보니 마수 따위가 귀여워 보일 지경에 이를 줄이야.
“넌 지금 하론을 이용해서 살아있는 건가?”
헤르타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쿵쿵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놈을 따라 밀라이언과 고레든이 걸음을 옮겼다.
카리나를 먼저 보내고 닷새째다.
그동안 마수의 씨를 말릴 정도로 끊임없이 토벌해 댔다. 그러나 찾는 것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우두머리 헤르타가 끌고 다니던 무리의 반 이상은 전부 무너뜨렸다.
쿵쿵 걸어가던 헤르타가 걸음을 뚝 멈췄다.
놈이 고개를 바싹 바닥에 대고 한참이나 냄새를 맡더니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크와아아아앙-!
날카롭게 울부짖은 헤르타가 그대로 달리기라도 하려는 듯 바닥을 앞다리로 두어 번 긁어 댔다.
밀라이언과 고레든이 눈치 빠르게 땅을 박차고 헤르타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르타가 거대한 몸집을 쿵쾅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걷는 수준이던 속도가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빨라졌다.
이윽고 피 냄새가 짙어지는 지역에 들어서자 헤르타의 걸음이 느려졌다.
밀라이언의 눈이 사나워지며 이가 드러났다.
놈들이 있었다.
밀라이언이 그대로 헤르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거대한 우두머리 헤르타도 밀라이언을 발견한 듯 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발톱을 세웠다.
크르르르-
악의에 찬 울음소리에 밀라이언이 제 검을 뽑았다. 놈이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땅을 박차며 그대로 밀라이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똑똑.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버킷 리스트를 정리하던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카리나 아가씨, 팽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그럼요. 들어와요.”
카리나가 펜을 놓으며 대답했다.
소리 없이 열리는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밀라이언과 숲에서 헤어진 지 벌써 엿새째였다. 별생각 없이 기다리다가도 밤이 되면 온기가 없으니 또 헛헛해졌다.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다가 늦은 새벽이 되어야 잠이 들기 일쑤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겨우 두 달간의 천막생활이 삶 자체를 이렇게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온기가 없으면 잠이 들 수가 없다니 이 무슨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이야기인지.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들어온 팽의 다정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방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녀가 한 거라곤 그냥 종이에 글자를 끼적거리는 정도였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희 북부가 이맘때쯤 검문소를 닫는 건 알고 계시지요?”
“네, 물론이죠.”
“물론 공식적인 토벌이 끝났으니 슬슬 닫았던 검문소를 열 시기이긴 합니다.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아마 바로 열지 않을까 싶군요.”
“네.”
카리나가 팽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껏 본 팽은 절대 입을 가볍게 여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 좋으신 분이야.’
카리나의 몸이 좋지 않아 밀라이언의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도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밀라이언의 명령이 따로 있기도 했지만 카리나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은 고르고 고른 최상급의 식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카리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 검문소에 통과를 요청하는 이들이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확인을 받으러 왔습니다. 각하께선 지금 계시지 않으니까요.”
“아, 이해했어요. 근데…… 그걸 왜 나한테 허락을 받는 건가요? 내 생각에 그런 권한은 팽에게 있을 것 같아서요.”
“그거야…….”
머지않아 안주인이 되실 것 같으니까요.
떠오른 말을 팽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보통 가주가 자리를 비울 경우엔 안주인이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민하던 팽이 첫 번째 대답을 뒤로 미뤄 놨다. 자고로 남녀 관계엔 제삼자가 끼어드는 법이 아니라고 했다.
말을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집어넣은 팽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카리나 아가씨를 찾는 분들이 었습니다.”
“……나를요? 날 찾을 사람은 없을 텐데요. 혹시 잘못 안 건 아닌가요?”
“보고에 따르면 본인을 레오폴드 백작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요.”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카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차보다도 더 야차처럼 일그러 진 그 표정에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던 팽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전령새를 통해 급보로 받은 내용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검문소에서 급보를 보내는 경우는 적었다. 이렇게 보냈다는 건 어지간한 상대이거나 아니면, 그 쪽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제가 알기로 카리나 아가씨의 성씨도 ‘레오폴드’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의사를 여쭤보러 왔습니다.”
“진짜라면 제 아버지겠네요.”
카리나가 눈꺼풀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팽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람을 상대할 땐 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그 녀에게서 완전히 미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는 메마른 눈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향한 다정함이나 상냥함이 엿보이는 눈이 아니었다.
“팽도 내가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죠?”
“아주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팽은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주워들은 것은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함부로 말을 하진 않았다.
“밀라이언이 알면 분명 저 몰래 쫓아내겠죠? 그 사람은 다정해서 괜한 걱정이 많으니까요.”
“음…….”
차마 팽은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다정’이라는 단어와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라는 이름은 완전히 상극에 서 있는 단어였다.
아무리 팽이 그를 존경하고 주군으로서 모시고 있다고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거짓말만큼은 할 수 없었다.
“검문소는 언제 열 예정이에요?”
“2, 3일 내로 열릴 겁니다. 각하께서 일주일 안에는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사람들, 들여보내 주세요. 만나 봐야겠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서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팽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허리를 숙이는 그의 입술엔 옅은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모든 것을 체념한 눈을 한 사람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전해 줘서 고마워요, 팽. 가서 볼일 봐도 돼요. 그리고 밀라이언에겐 따로 소식은 없죠?”
“네,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다른 이야기가 들려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팽이 다시 한번 빙긋 미소 짓곤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가 입가에 띠었던 미소를 천천히 지워 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고 있다고.”
설마 오라고 해서 정말 그가 올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사람이나 보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리나의 입가가 서글프게 허물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