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16)
>116 화>
“난생처음 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걸…… 그 사람은 알까.”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가문에 먹칠할 게 걱정이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제 능력에 대해 들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떤 생각이든 간에, 그는 오로지 ‘카리나 레오폴드’라는 사람 때문에 남부의 영지를 떠난 것이리라.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제 방을 찾아와 주지 않았던 사람이 오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허함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밀라이언이 보고 싶네.”
빨리 오겠다고 했으면서 대체 언제 올 생각인지.
속으로 툴툴 투정을 내뱉으며 카리나가 버킷 리스트를 내려다 봤다. 평소에 할 수 없었던 것도 많았지만 할 수 있었던 것도 많았다.
버킷 리스트에 직선이 죽죽 그어진 것도 제법 있었다. 밀라이언과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키스하는 것은 물론 끝낸 지 오래였다.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숲에 가는 것으로 이뤘다. 그뿐이랴, 겨울의 끝에도 가 보았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은 이미 차고 넘치게 이루었다.
제 이름의 창고가 생길 만큼 가득 쌓인 금화들은 또 어떤가. 조만간 온종일 돈만 펑펑 쓰는 하루를 보낼 수도 있으리라.
먹고 싶은 케이크를 종류별로 시켜서 한 입씩만 먹어 볼 수도 있을 거고.
‘아, 아무리 그래도 산꼭대기에 이젤을 들고 올라가는 건 무리겠지?’
그 외에 아이를 낳는 것도 애완 동물을 키우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전부 무리일 것이다. 바다를 보는것도 바닷가 마을에 가는 것도 무리일 거다.
그래도 요리를 하거나 쿠키를 굽는 것쯤은 아직 가능할지도 른다.
모두 함께 피크닉을 가 보고 싶기도 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것도 행복할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것을 완수하고 아무리 그 위에 줄을 그어 지워도, 뒤돌아서면 또다시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최근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가족과의 관계 청산이었다.
“생각할수록 욕심쟁이네.”
그래도 제일 하고 싶었던 좋아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은 끝냈다. 그의 애인이 되었다.
욕망이 커져만 간다. 창고 가득히 금화를 쌓고 쌓아서 그에게 남겨 주고 간다고 해도 밀라이언에게 받은 것을 갚을 순 없을 것이다.
카리나가 펜을 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무너뜨렸다.
“하론…….”
몸을 옆으로 돌린 카리나가 한숨처럼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얼마 전 페리얼에게 들은 얘기는 제법 충격이었다. 페리얼의 가설을 실행해서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성공한다면 자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멀쩡하게 살게 될 확률은?
‘죽을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지금이 나은데.’
지금이라면 끝을 알고 있으니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페리얼의 말에 따른다면 마지막을 준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걱정되는 것은 많았다. 만약 후유증이 생긴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면? 영원히 그 기적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말 그대로 도박인 것이다. 누구 하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승자도 패자도 유추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이 방법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확답할 수 없습니다. 짐승이나 동물을 이용한 실험은 성공했지만, 인간에게 실험한 적은 없으니까요.”
며칠 전 늦은 밤에 따로 찾아온 페리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밀라이언 앞에선 할 수 없었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 했다. 위험성이나 성공 가능성, 그 외에 몇 가지의 다른 방법들을.
“그러니까 나는 카리나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이걸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끝나기 직전이요?”
“네, 사실 카리나가 마수였다면 차라리 하론을 식사 대신 씹어 먹으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여러모로 고민한 듯 페리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와 그는 무척이나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반짝거림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피로에 지쳤음이 여실히 보였다.
머릿속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그림 조금만 그릴까.”
카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정리할 땐 역시 그림을 그리는 게 제일이다. 그녀가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나 화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리나?”
“페리얼, 어디 가요?”
“카리나야말로 어디 갑니까?”
페리얼의 물음에 카리나의 입이 꾹 닫혔다. 그녀의 눈치로 대답을 어렵지 않게 찾은 페리얼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화방에 가는 거면 같이 가시죠. 곁에 있겠습니다.”
“괜찮다고 해도 혼자는 안 보내 주실 거죠?”
“네.”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카리나의 입이 꾹 닫혔다. 밀라이언만큼이나 단호하기 짝이 없다.
입을 비죽 내밀었지만 그렇다고 피곤해 보이는 페리얼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미리 말하지만 완성은 안 됩니다.”
“……알겠어요.”
“뭘 그리려고요?”
“겨울의 끝 위에 오로라가 펼쳐진 게 보고 싶어서요. 무척 아름다울 것 같아요.”
카리나의 대답에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상식을 깨부순다. 오로라면 오로라, 겨울의 끝이면 겨울의 끝, 단순하게 생각하는 페리얼과는 시각부터가 달랐다.
“페리얼, 창고에 돈이 너무 많아서 무서워요.”
“전부 카리나 돈입니다. 쓰고 싶은 만큼 쓰세요.”
“그래도 페리얼에게도 좀 주고 싶은데요.”
“칼로스 가문에서 경매 수수료 등으로 많이 가져갔습니다. 챙겨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카리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아닌 것에는 절대 한번 말한 것을 물리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 허용치가 있는 듯했다.
“카리나.”
화방의 문을 열며 페리얼이 그녀를 불렀다.
“네?”
“생각은 좀 해 봤습니까?”
“…….”
카리나가 잠시 입을 닫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숨만 내쉬던 그녀가 이젤에 앉으며 붓을 집었다.
“고민은 많이 해 봤어요.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페리얼의 최선인 거죠?”
“네, 미안합니다.”
“미안할 건 없어요. 하지만 역시 두렵네요. 해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는 건…… 무서워요.”
시커먼 어둠 속에 혼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어차피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죽는 건 똑같잖아요. 페리얼이 준 작은 희망에 도박이라도 걸어 봐야죠.”
“그래요. 오늘은 발작이 있었나요?”
“아침에 한 번, 낮에 두 번이요. 조금…… 잦아지긴 했어요.”
그녀가 느끼기에도 너무 잦아졌다. 그나마 아플 때마다 페리얼이 준 약을 먹으면 통증이 상당히 완화되어서 최근엔 끔찍하게 괴롭진 않았다.
“페리얼의 약이 효과가 좋아서 발작이 와도 그렇게 괴롭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픈 건 달라지지 않지 않습니까.”
페리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카리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가 곤란한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페리얼이 짧게 한숨을 내쉬곤 카리나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던 때보단 훨씬 나아요. 혼자서 매일 밤 숨을 죽여야 했던 때보다는요.”
“…….”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오고 계신 모양이에요.”
카리나의 말에 페리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가 누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라고 칭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레오폴드 백작이 북부령에 있습니까?”
“네, 검문소에 통과하게 해 달라고 했나 봐요. 팽이 아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통과시키라고 했어요.”
카리나가 담담하게 말하며 붓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손이 새하얀 캔버스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그리는 선을 보며 페리얼은 혀를 내둘렀다.
‘……오래전 만나지 않은 게 너무 아쉬워.’
혼자서 배워서 터득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조금 더 많은 세상을 만나서 조금 더 다양한 감정을 일찍 느꼈다면 그녀가 그린 그림은 세상을 뒤바꾸었을 것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어떤 씨앗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허드렛일만 하며 사라지는 평민도 많았다.
꿈을 접고 생계를 걱정하는 이들을 지원해 주고 싶어서, 칼로스 가문은 예술가에 한해서라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페리얼은 그녀를 보면 그저 안타까웠다.
제때 물을 주고 햇볕을 쬐었다면, 조금의 관심만 주었다면 어떤 꽃보다도 어떤 나무보다도 화려하고 거대하게 자랐을 사람이었으니까.
‘……레오폴드 백작이 오고 있다니, 밀라이언의 성격상 그냥 둘 리는 없을 텐데.’
북부의 사람들은 호전적이다. 또한 참을성이 그다지 없었다. 적에 한해서는 배려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건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고.
페리얼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고생 깨나 하겠군.’
카리나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이 저택에 없을 거다. 그녀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밀라이언이 명령하지 않아도 그들은 카리나를 위해 기꺼이 남부의 귀족을 적대적으로 대하리라.
그들의 뒤에는 밀라이언이 있었고 필요하다면 페리얼 역시 얼마든지 손을 거들 의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