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19)
>119 화>
밀라이언이 입맛을 다시며 벌겋게 부푼 그녀의 입술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언젠가 그대가 건강해지면 하자.”
“……지금은 안 돼요?”
“…….”
밀라이언이 몇 번이고 끊어진 이성의 끈을 엉성하게 이어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몸이 약하다. 괜히 무리 하다가 발작이 올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안 돼.”
“……알겠어요.”
카리나도 제 시도 때도 없는 발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그녀도 더 말을 잇진 않았다.
밀라이언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도 하고 싶어.”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밀라이언.”
“응?”
“밀라이언은 내가 페리얼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카리나의 물음에 밀라이언이 잠시 말이 없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그 뒤에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도, 무엇보다 온전히 성공 했을 때의 절망적인 이야기 역시 들었다.
“……난 그대가 하루라도 더 살길 바라.”
“페리얼도 말했지만 만약 성공해도 결과가 다르지 않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우린 또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될 텐데, 그래도요?”
“응, 그래도.”
밀라이언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카리나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리얼과 밀라이언의 대답은 같다. 그리고 윈스턴 역시 같겠지. 그녀가 선택할 것은 애초에 없었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는 이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무섭다고 발을 빼는 것은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미 그 시점에서 이전에 했던 모든 생각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요. 밀라이언이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요. 성공하지 않더라도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으니까.”
죽는 그 순간에 그가 곁에 있어 줄 것을 알기에 이제 두렵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의 망막에 맺히는 제 마지막 모습이 웃는 얼굴이기를 바라니까.
카리나가 생각을 머릿속에 담은 채 밀라이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짧고 애달픈 입맞춤이었다.
* * *
“이 안에 있는 내 딸을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나!”
“아, 근데 허락이 안 떨어지는 걸 어쩝니까? 지금 말 전하러 갔다고 몇 번을 말해요? 거참 답답한 사람이네.”
영지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누가 봐도 불량스러웠다.
레오폴드 백작의 얼굴이 확 일그러 졌다.
“허어 네놈들 소속이 어디야!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아, 명패 봤습니다. 거, 뭐 어디? 레이어드 백작가라면서요. 소속은 각하 직속인데 뭐 문제 있습니까?”
“네놈들 모조리 귀족 모독죄로 죽고 싶나!”
“핫.”
앞에 선 병사가 코웃음을 쳤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묘하게 적대적인 분위기에 인프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토록 방자하게 구는 것은 북부가 그 정도로 예의가 없는 곳이거나 윗사람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 시끄러우니 목소리 좀 낮추십쇼. 사람을 보냈으니 곧 답을 들고 올 겁니다. 그리고 너도 적당히 해라.”
“예, 대장.”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병사가 순순히 대답하며 본래의 일로 돌아갔다.
딱 각이 잡힌 상하 관계였다. 오랜 시간 기사단에 있던 인프릭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페스텔리오 공작의 의지다.
“네놈들이 감히……!”
“아버지.”
“뭐냐! 귀족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감히 유서 깊은 백작가를 무시하고 조롱해! 이 일은 공작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소리치는 레오폴드 백작의 행동에도 병사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리어 비웃음을 띠느라 바빠 보였다. 인프릭이 그의 아버지를 달랬다.
“아버지, 지금은 조금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인프릭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더 입을 열어봐야 물러나지 않을 것을 병사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녹턴이 한발 물러선 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갑자기 왜 부르신 거지?’
어느 날 웬 이름 모를 사람이 불쑥 찾아와 편지를 전해 주고 떠났다. 스승님의 의원에 자신의 이름으로 전달된 편지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북부 검문소가 열리면 북부 공작저로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낯익은 필체는 그가 흉내 낸다면 흉내 낼 수도 있을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윈스턴 스승님의 것이었다.
잘 지내냐는 짧은 인사와 용건이 전부인 편지에선 묘하게 싸늘함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백작가에서 북부로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괜한 불안감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과 함께 레오폴드 백작령을 떠났다. 그리고 북부까지 들어왔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네.’
차가운 바람도 메마른 땅도 높은 하늘도 익숙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따뜻하고 풍족한 남부와는 달랐다. 메마르고 날카롭고 사람들마저 모두 우락부락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 레오폴드 백작이 기어코 검을 뽑아 들려고 할 때쯤에야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병사들이 턱짓으로 그들에게 통과를 허락했다.
“허가 떨어졌으니 가 보십쇼.”
으득, 이를 악문 레오폴드 백작이 병사들을 노려보며 다시 말에 올랐다.
레오폴드 백작의 말이 땅을 박차며 빠르게 영지로 들어갔다. 녹턴과 인프릭이 그 뒤를 쫓았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왜 남의 아가씨를 북부까지 쫓아내?”
“각하의 예비 마님 엄청 병아리 같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귀여운 애인 생겼으면 좋겠네요.”
“당장 일로 복귀 안 하나?”
“옙, 죄송합니다.”
병사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 * *
“카리나, 레오폴드 백작이 성문을 통과했다는군.”
“빠르긴 엄청 빠르군. 카리나의 가족은 여러모로 뻔뻔하네요.”
“허허, 다들 뭐가 그렇게 날카롭습니까.”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찻잔을 기울이며 여상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사이에 앉아 있던 카리나가 떨떠름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으음…… 근데 왜 다들 여기에 있어요?”
그녀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레오폴드 백작이 성문 통과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응접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미 다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난 그대의 애인이잖아. 곁에 없으면 어디에 있겠나.”
“전 카리나의 친구가 아닙니까.”
“흐음, 그럼 난 아가씨의 주치의로 해 두겠네. 허허.”
세 사람의 뻔뻔한 대답에 카리나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목소리는 언제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혹시 몰라서 페리얼이 준 약을 먹고 나오긴 했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발작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비참한 모습은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동정을 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동시에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근데 성문 통과에 시간이 좀 소요됐네요. 병사가 말을 전해 온 건 아까 아니었나요?”
“……음.”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빙긋 웃으며 갑자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마치 시간을 끌기라도 하듯이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글쎄, 병사가 다른 곳으로 샜을 수도 있지. 한 번 확인해 보고 문제가 있었다면 혼내도록 할게.”
“아, 거기까진 괜찮아요.”
카리나가 고개를 젓자 밀라이언이 그러냐며 입가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어쩐지 묘한 느낌의 미소였지만 바라보고 있는 카리나로선 그저 그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을 뿐이었다.
똑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팽이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빙긋 웃는 그의 표정에 밀라이언의 입가가 시린 미소를 띠었다.
“주인님, 레오폴드 백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해.”
묘한 악센트가 들어가 있는 명령이었다. 팽이 순순히 허리를 굽혔다.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품에 답삭 안아 들어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그 왼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전, 함께 따라온 일행에게 볼 일이 있어서 따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래, 조금 이따 보지.”
윈스턴이 페리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응접실에서 나갔다.
페리얼이 카리나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평소라면 시비를 걸었을 것이 분명한 밀라이언도 웬일로 별말이 없었다.
‘……문밖에 있구나.’
카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토록 사랑했고 절망했고 결국은 포기했던 상대가 문밖에 있었다.
그녀가 차가워지는 손끝을 애써 쥐었다 펴며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