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20)
>120 화>
열린 문틈 사이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단정한 표정의 팽이었다.
그 뒤를 따라 굳은 표정의 레오폴드 백작과 피곤해 보이는 인프릭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날지 말지 고민하는 카리나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밀라이언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망설이던 카리나가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듯 피부의 감각이 무뎌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귓가에선 이명마저 들릴 정도였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던 그녀가 눈을 떴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응접실에 들어오면서부터 레오폴드 백작은 그녀를 보고 있었던 듯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선이 맞았다.
그는 아주 조금 야위어 있었지만 기억 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리나가 쥔 주먹에 힘이 들어 갔다. 밀라이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허벅지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카리나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스텔리오 공작 각하. 페리얼 공작 각하께서도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 일이 있어서 와 있었습니다.”
페리얼이 빙긋 웃으며 여상히 대답했다.
소파에 앉은 채 인사를 받는 페리얼의 행동은 무척이나 거만하고 무례했다. 그러나 본인은 굳이 상대의 그 생각을 정정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밀라이언이 슬쩍 몸을 비틀어 카리나에게 향한 레오폴드 백작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굳이 서서 길게 얘기할 것 없으니 일단 앉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오는 내내 불쾌한 경험을 한 레오폴드 백작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서는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세 사람은 이 저택 앞에서도 허락을 받겠다며 느긋하게 떠나는 병사 덕분에 무려 30분을 허비했다.
그뿐이랴, 저택에 들어와서는 집사나 사용인들이 어찌나 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먼저 사과 드리지요. 딸아이가 이곳에서 폐를 끼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폐요?”
밀라이언의 눈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까지 기울인 그 모습에 레오폴드 백작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제 자식이 실례를 범했으니 사과는 당연한 것 아니던가.
“카리나가 딱히 폐를 끼친 일은 없으니 염려는 거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작께서는 연통도 없이 북부령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밀라이언은 생각보다 정중했다.
혹시나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지 않을까 걱정했던 카리나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저 내숭 덩어리.’
물론 옆에 앉아 있던 페리얼은 혀를 내둘렀다.
평생 누구에게 경어를 제대로 사용해 보지 않은 인간이 정중한 존댓말이라니.
그것도 심지어 레오폴드 백작이다. 밀라이언의 입장에선 차라리 암살자라도 고용하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어찌 보면 카리나의 병은 방치가 부른 악화였으니.’
그럼에도 그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 딸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동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
밀라이언의 입술 끝이 씰룩였다.
‘화났네.’
페리얼이 찻잔을 기울이며 느긋하게 생각했다.
아마 카리나만 없었다면 창문이고 문이고 걸어 잠그고 검부터 뽑아 들었을 것이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눈치를 살 피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면 됩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밀라이언?”
레오폴드 백작과 카리나가 동시에 반문했다.
차가운 시선으로 레오폴드 백작을 보던 밀라이언이 순식간에 뒤바뀐 다정한 눈빛으로 카리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게 문제라면 카리나와 결혼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만.”
“……만약 결혼하더라도 절차가 있습니다. 뭣보다 카리나의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백작령이 아닌 수도 쪽 저택에 데려가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당사자는 자신인데 자신을 빼고 이어지는 대화에 카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무도 당연하게 레오폴드 백작은 그녀의 의견은 묻지 않고 있었다.
너무도, 너무나도 바뀌지 않았다.
이곳까지 먼 길을 달려와 준 것 외엔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보지 않고 여전히 아무런 의견도 묻지 않는다.
어떠한 감동적인 만남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 조금은 기대했던 것도 같다. 이곳까지 오고 있으니 아주 조금은 그가 달라졌지 않을까 하는.
‘사람 마음 산산조각 내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하지만 제 아버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깨닫고 나니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고민할 거리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눈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카리나가 입을 열었다.
“전 수도에도 백작령에도 갈 생각 없어요.”
“……뭐?”
그녀가 턱을 똑바로 세우며 레오폴드 백작의 눈을 마주 봤다.
레오폴드 백작의 시선이 천천히 카리나에게 향했다. 그 말을 그녀가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못 들으셨나요? 본가에도 수도의 저택에도 돌아갈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카리나, 너 지금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말버릇이요? 전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말씀드리고 있어요. 갈 생각 없다고요. 그저 제 의견 하나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카리나의 목소리에 레오폴드 백작이 눈에 힘을 줬다. 무릎 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을 보며 카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
“팽에게 아버지를 북부 검문소에서 통과시키라고 말한 건 저예요. 원래는 돌려보낼 생각이었어요.”
“뭐라고?”
“통과시킨 건, 어차피 당신은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에요. 제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또 좋을 대로 생각하실 텐데, 그게 싫었어요.”
레오폴드 백작이 손을 들어 뻐근하게 당기는 뒷목을 붙잡았다. 인프릭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동안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고 큰 반항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큰 소리를 내는 일도 없었고 제 주장을 말하는 경우는 더 없었으며 이렇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경우는 더욱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녀보다 낮은 계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위에서 말하는 듯한, 조금은 고압적인 시선이었으니까.
“네가 그동안 오만방자해졌구나!”
“아버지.”
레오폴드 백작의 언성이 응접실에 크게 울렸다. 밀라이언의 눈썹이 들썩였다. 인프릭이 다급히 레오폴드 백작의 손목을 붙잡았다.
밀라이언의 인내를 지켜보던 페리얼이 카리나의 뒤쪽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톡 두드렸다.
참으라는 신호였다.
힐끗 페리얼을 바라본 밀라이언이 이를 악물곤 허리를 곧게 폈다.
“여기까지 오신 건 제게 할 말이 있으셔서인가요? 할 말이 있으면 오라고 편지에 적었던 것 같아서요.”
“어찌 아비에게 그런 말투로 편지를 보낼 수가 있느냐!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어떻게 부모에게 자식을 죽은 사람 취급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레오폴드 백작이 자신을 말리는 인프릭의 손을 뿌리치고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지르는 언성에 카리나가 말없이 고개만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떻게 그런 비수를 꽂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화도 해 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집을 멋대로 나갈 수가 있느냔 말이다!”
“당신이…….”
카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입 밖으로 꺼낼 이야기가 한심하고 어리석더라도 어쩔 수 없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상처받았으면 했어요.”
“……뭐?”
“당신이 나로 인해 아파했으면 했는데, 비수가 스치기라도 했다니 다행이네요.”
“카리나,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아버지께 말이 조금 심하구나. 이러지 말고 제대로 대화를 해 보자. 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왔어.”
그녀가 잔잔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독설을 담자 듣기만 하던 인프릭이 카리나를 조심스럽게 말렸다.
정중한 목소리에 카리나의 시선이 돌아갔다.
“내가 해야 할 말은 이미 예전에 수십 번도 더 했던 것 같아. 난 솔직히 더 할 말 없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네 걱정을 많이 하셨어.”
“응, 그래서?”
인프릭의 말에 카리나가 되물었다. 그 걱정을 오래 전에 받아 보고 싶었다.
사소한 걱정이든 다른 형제들보다 적은 다정함이든 따뜻한 손길이든 받아 보고 싶은 것은 많이 있었다.
“그래서라니…….”
“밀라이언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검문소를 열라고 한 건 돈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야.”
카리나의 시선은 더는 다정하지도 애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흐릿하게 남아 있던 열기마저 보이지 않는다. 메마르고 메말라서 더는 물 한 방울 솟아나지 않는 사막의 버려진 오아시스 같았다.
인프릭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카리나, 미안하다. 나라도 네게 신경을 썼어야 했던 걸…… 미처 몰랐어. 네가 많이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해. 난…….”
“오라버니.”
카리나가 인프릭의 말을 끊었다.
“내가 거기 떠나기 전에 말했지? 깨물어서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고.”
“그래, 난 네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 줬고.”
피크닉 얘기를 했을 때를 떠올리며 인프릭이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카리나가 얼굴을 구겼다. 일그러진 표정 위에 옅은 짜증이 떠올랐다.
“너는, 거기에 있었으니까 모르겠지. 나보다 한참은 더 위에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어.”
“……카리나?”
“정말 날 이해했다면 못했을 말이야. 어떻게 겪어 보지 않았는데 이해할 수가 있어? 왜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말할 수 있어?”
“그건…… 네 상황에서 생각을 해 봤을 때…….”
말문이 막힌 인프릭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인프릭의 얼굴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카리나는 열기가 오르려는 제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겐 그랬어. 내가 보는 세상에서 레오폴드 가문의 나는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었고 이물질이었어.”
“……그렇지 않아.”
“오라버니는 옛날부터 그랬지. 보고도 못 본 척,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한 척 어른스럽게 굴어. 그런 네가 가장 비겁한 걸 너만 몰라.”
혼나는 자신을 보고도 등을 돌렸다.
우는 자신을 달래 줄 줄을 몰라서 멀리서 다가오다가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른이 되고는 그것이 어른스러운 척 설득하는 형식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어 버린 인프릭을 보던 카리나가 고개를 돌려 레오폴드 백작을 바라봤다.
“아버지, 날 사랑하긴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