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25)
>125 화>
“처음이지만 노력했어요. 당신이 다시 나를 돌아보는 방법에 대해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민하고 기다렸어요, 백작 각하.”
차가운 호칭에 레오폴드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 자식은 못 본 새 이상해져 있었다.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메마른 시선이 영 익숙해지질 않았다.
“……당신이 노력했다면, 뒤늦게라도 만회하려고 했다면, 제가 그 저택을 뒤로하기 전까지 만이라도 그랬다면 전 분명히 당신을 용서했을 거예요.”
“……카리나, 아버지께서도 많이 후회하셨어. 조금 늦더라도 네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계셔.”
인프릭이 끼어드는 것과 동시에 카리나의 표정이 말 그대로 험악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며 인프릭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쌍둥이 동생보다 그녀는 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인프릭이 훨씬 싫었다.
“제발 좀 닥쳐 줘. 왜 내가 용서해야 해? 사과 받으면 나는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라서? 그럼 내 시간은? 내 삶은?”
흥분한 듯 카리나가 숨을 몰아 쉬었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도닥였다. 그제야 카리나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용서하면, 그건…… 전부 해결돼? 그동안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카리나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날이 선 날카로운 목소리는 전에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밀라이언이 흥분한 카리나를 달래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인프릭에게 꽂혔다. 선득한 시선에 인프릭이 움찔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백작 각하, 전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 시선 한 번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지친 듯 고개를 떨구는 그 모습에 레오폴드 백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정말 너무 피곤해 보여서. 당장이라도 곧 잠들 것처럼 보였다.
“너무 지쳤어요. 누군가는 당신을 이해하라고 할지도 몰라요. 내가 언젠가 부모가 돼서 당신을 이해할 날이 올 수도 있죠.”
카리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카리나.”
“난…… 그럴 자신이 없어요. 지금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벅차서 더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녀라고 가족이라고 하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쥔 채 스스로 살점을 뜯어냈다. 그렇게 유일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뛰쳐나왔다.
“전 두 달 뒤에 죽을 거예요. 그러니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갈 마음도 없고 갈 생각도 없어요. 두 번 다시 뵙고 싶지도 않아요.”
“카리나!”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예요. 화내는 것조차 힘드네요. 그만하죠.”
카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어요. 팽에게 말해 둘 테니 돈은 가져가세요.”
그녀가 짤막하게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카리나가 고개를 돌려 밀라이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밀라이언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가.”
“카리나, 우리는……!”
“내가 아까 경고했잖아. 나가.”
밀라이언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도 저도 못한 채 그가 결국 얼굴을 쓸어내렸다.
“널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네가 다른 자식들보다 눈이 덜 간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구나.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미안하다.”
“…….”
카리나가 대답 없이 밀라이언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밀라이언이 혀를 차며 그들을 노려봤다.
이윽고 두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열렸던 문이 닫히고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럼에도 카리나는 묻은 얼굴을 그의 품에서 떼어 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밀라이언이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카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아예 눕힐 기세로 밀어붙이는 그녀에 밀라이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카리나.”
“결국, 난 덜 아픈 손가락이었어요.”
“내겐 가장 아픈 손가락이야. 내 열 손가락 전부가 너야.”
카리나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에 입 안이 썼다. 그가 카리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당장 내일이라도 쫓아낼 테니까.”
“……저 사람들이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냥 나 없는 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귓불을 앙 깨물었다.
“아…….”
간지러운 통증에 그녀가 슬쩍 그를 흘겨봤다가 이윽고 밀라이언의 어깨를 양손으로 힘껏 밀어 침대에 넘어뜨렸다.
“카리나?”
그러고는 밀라이언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줬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카리나가 하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봤다. 카리나가 저도 이불 속에 폭 몸을 묻었다.
그리곤 이내 밀라이언의 품을 찾아 꼬물꼬물 움직여 그의 팔 사이에 자리 잡았다.
밀라이언이 헛웃음을 참으며 제 품에 들어와 편안하게 자리 잡은 카리나를 내려다봤다.
“그대,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하는군.”
“……몰라요. 요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잤어요.”
“잠? 왜?”
“밀라이언이 없어서요.”
밀라이언이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욕설이 절로 튀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키고 싶다.
“그래…….”
그가 간신히 끓어오르는 것을 짓밟으며 대답했다.
달아오르면 뭐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끙, 밀라이언이 낮게 신음을 냈지만 도리어 카리나는 제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그 행동에 밀라이언의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등허리가 굳고 근육들이 잔뜩 긴장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해도 그녀의 체향이 스멀스멀 코로 기어들어왔다.
‘……젠장.’
밀라이언이 이미 눈을 감아 버린 그녀를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자는 건 늘 있었던 일인데 오늘따라 이렇다는 건……
‘욕구 불만인가?’
아니면 그녀가 스스로 제 품에 안겼기 때문일까.
꼬물거리며 제 품에 파고드는 것은 무척 귀여웠다.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밀라이언이 이를 악문 채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체향이 더 짙어 졌다.
진정하기 위해 한 행동이 어쩐지 욕망을 한층 부추겼다. 그녀의 몸이 약해서 입맞춤 이외의 진도는 전혀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카리나.”
“…….”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숨소리도 제법 고르다. 밀라이언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리나, 정말 자……?”
“…….”
여전히 대답은 없다.
고른 숨소리를 보아 그녀는 제대로 잠든 것이 분명했다. 밀라이언이 뻐근한 제 다리 사이를 느끼며 낭패감 짙은 표정을 했다.
입맞춤조차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서글프기 그지없다. 두어 번 더 카리나를 불러 봤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밀라이언은 한참이나 끙끙 앓다가 결국 억지로 눈을 감았다.
차마 품에 그녀를 안고 있어서 뒤척이지도 그렇다고 화장실로 도망을 가지도 못한 밀라이언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무죽죽해졌다.
물론 아침에 눈을 뜬 그의 표정이 상쾌한 카리나에 비해 퀭했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 * *
카리나와 대화를 마친 다음 날, 레오폴드 백작과 인프릭은 말 그대로 쫓겨나듯 마차에 태워져 북부령에서 내보내졌다.
카리나는 일어나지 못했던 이른 새벽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밀라이언도 떠난다고요?”
“그래.”
“벌써요?”
카리나가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물었다.
밀라이언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떠난다곤 생각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있겠다고 했잖아요.”
“거의 다 잡은 녀석이었어. 금방 다녀올게.”
“언제 가려고요?”
“오늘 밤에. 낮에는 몇 가지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풀죽은 모습이 퍽 귀여웠다. 머리 위에 토끼 귀라도 달려 있었으면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으리라.
밀라이언이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최근 잦아진 발작에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를 잃을까 봐 조급증이 일었다.
혹시나 그 우두머리 헤르타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녀를 살릴 다른 방법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렇게 한 번 든 생각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도저히 서류나 처리하며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알겠어요. 다치면 안 돼요.”
“물론.”
“……그리고 그 사람들 돈은 챙겨 갔어요?”
“걱정하지 마. 마차에 꽉꽉 눌러 담아 줬으니까.”
밀라이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 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들어앉을 자리를 빼곤 전부 금화 보따리를 쌓아 보냈다. 물론, 카리나의 것이 아닌 공작가의 창고에서 꺼낸 금화였지만.
“이번에 가면 또 얼마나 걸려요? 일주일이에요?”
“아마도 그쯤 걸릴 거야.”
“다치면 안 되는 거 알죠?”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혔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속이 좋지는 않다.
“페리얼에게 가 볼래?”
“페리얼이요?”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 않나? 지하에 있는 실험실 말이야. 아마 하론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대에겐 조금 편할 거야. 일이 끝나면 데리러 갈게.”
밀라이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와 밀라이언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카리나의 눈을 보던 그가 냉큼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한번 시작하면 멈출 자신이 없었다.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 듯했다. 입꼬리가 절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녹턴이라는 웬 이상한 의사는 남았더군.”
“……녹턴이요? 그 사람도 왔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