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27)
>127 화>
* * *
밀라이언을 뒤로한 카리나는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아무리 페리얼이 지하실을 실험실로 달라고 했다지만 내려가는 길도 어둡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런 곳을 맨날 혼자 왔다 갔다 한 거야?’
카리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혼자 다니기엔 너무 스산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카리나는 열린 문틈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페리얼?”
“카, 카리나?”
구석진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던 페리얼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를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밀라이언을 피해서 도망 왔어요.”
페리얼이 온갖 약품과 플라스크로 가득한 책상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쪽에 앉아 계십시오.”
어중간하게 서 있는 카리나를 향해 페리얼이 말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테이블 앞에 앉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페리얼을 보며 카리나가 가볍게 다리를 흔들었다.
“네, 근데 뭘 하고 있었어요?”
“하론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론……, 무슨 연구요?”
“하론이 예술의 기적을 상쇄하는 것 같아서요.”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상쇄?”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자 차를 타서 자리로 돌아온 페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론에 예술을 완성하더라도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실험하던 도중이었어요.”
제 혈관에 넣어 볼 생각이었다는 말을 페리얼은 조용히 목 너머로 삼켰다. 말을 했다간 얼마나 화를 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가 여상한 표정으로 찻잔에 차를 따르고 카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오폴드 백작이 쫓겨난 거 들었습니까?”
“내보냈다고는 들었어요. 금화도 같이 실어서 보냈다고 하던 데요.”
카리나의 말에 페리얼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고민하듯 망설이던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밀라이언이 그렇게밖에 말하지 않던가요?”
“네,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있었나요?”
“새벽부터 끌려 나갔다곤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끌려…… 나가요?”
페리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엔 밤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던 덕에 그도 우연히 본 광경이었다.
밀라이언이 해가 뜨기도 전에 내려와 직속 기사들을 진두지휘 했다.
기사들을 별관으로 보내 레오폴드 백작과 그 후계자를 끌고 나왔다. 곤히 자던 도중에 끌려 나온 두 사람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페리얼이 새벽녘의 일을 떠올렸다.
* * *
“윽……. 이건 또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페스텔리오 공작!”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공작께선 대체 이 무슨 무례한……!”
콰득-!
밀라이언이 말없이 검을 뽑아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밤새 단단해진 땅에 꽂힌 검은 깊이 박혀 쉽게 뽑힐 것 같지도 않았다.
밀라이언은 말없이 손잡이의 머리 부분에 손바닥을 얹었다.
멀리서 밀라이언을 발견하고 뒤따라온 페리얼이 근처 벽에 기대어 섰다. 긴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새벽바람에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그는 가볍게 하품을 하며 일련의 상황을 구경했다.
“잠은 잘 잤나?”
“무슨…….”
.
“그래, 잘 잤다니 그것참 다행이군. 그럼 이제 나가.”
밀라이언이 반문하려던 인프릭의 말을 잘라 냈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였다. 말 그대로 그는 제 할 말만 하고 있었으니까.
불친절한 통보에 인프릭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라이언은 입을 열었다.
“하룻밤 재워 줬잖아. 지금은 아침이고 여긴 내 집이야, 나가.”
“뭐…… 뭐라고요?”
인프릭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밀라이언이 낮게 한숨을 내쉬자 인프릭이 주먹을 쥐었다.
이것이 얼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체 이 새벽부터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밀라이언의 왼손에 들린 검집이 인프릭의 턱 밑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종이 한 장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틈새였다. 인프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읏…… ”
“카리나가 깨면 정말 걸어선 못 나갈 줄 알아.”
밀라이언이 낮은 목소리로 사납게 말했다.
몸을 떨던 인프릭이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이를 악물며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우습다는 듯 밀라이언의 동공이 풀어졌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뽑아.”
“뭐…….”
“그 검으로 날 한 번이라도 벤다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이곳에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좋아. 혹은 카리나를 데려가도 뭐라고 하지 않도록 하지.”
밀라이언이 눈을 빛냈다. 붉은 안광이 새벽녘 안개 속에서 위험하게 번뜩였다. 인프릭이 숨을 삼켰다.
“이기라는 것도 아니야. 딱 한 번 내 몸에 그 검을 대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크게 다치더라도 절대 항의하는 일은 없을 거다. 페스텔리오 가문을 걸고 맹세하지.”
“……정말입니까?”
” 물론.”
밀라이언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페리얼이 번뜩이는 그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만약 자신이 인프릭의 입장이었다면 그는 그대로 꽁지를 말고 도망쳤을 것이다.
밀라이언이 달게 구는 일은 그다지 없다. 즉, 그만큼 화가 났다는 얘기다.
망설이던 인프릭이 조심스럽게 검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레오폴드 백작이 인프릭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 말아라, 인프릭.”
“아버지, 카리나를 두고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길 순 없어도 검 끝은 한 번쯤 닿지 않겠습니까.”
인프릭이 비장하게 말했다.
지켜보고 있던 페리얼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완전한 헛웃음이었다.
‘무지하다는 게 저렇게 무섭군.’
페리얼이 생각하는 사이 인프릭이 기어코 레오폴드 백작의 손을 피해 검을 뽑았다. 밀라이언이 바닥에 꽂힌 검을 뽑는 대신 검집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쥐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인프릭의 표정이 기어코 험악해졌다.
기사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검이 아니라 검집을 쥐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밀라이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약간의 불이익이지.”
“필요 없습니다!”
“필요할 거야. 검이면 곤란하기도 하고.”
밀라이언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달은 페리얼이 인프릭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밀라이언이 검이 아닌 검집을 들었다는 건…….
‘걸어가긴 힘들겠군.’
페리얼이 생각하며 벽에 몸을 기댔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인프릭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밀라이언은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않고 있었다.
밀라이언은 검을, 아니 검집을 쥔 손을 늘어뜨리고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않았다.
“먼저 덤비도록 해.”
밀라이언의 흘러넘치는 여유에 인프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그대로 검을 쥔 채 밀라이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밀라이언이 지루한 표정으로 검집을 들어 달려드는 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으아아앗!”
까드득-
날카롭게 벼려진 검과 둥글게 잘 깎인 검집이 맞부딪쳤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검을 쳐 내며 팔을 들어 그대로 인프릭의 어깨에 내려쳤다.
“윽!”
잇새로 흘러나오는 비명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만난 이래로 가장 가볍고 산뜻해 보이는 미소라서 인프릭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밀라이언의 눈이 번뜩였다.
곧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준 밀 라이언이 그것을 그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 으억! 악! 흐악!”
“페스텔리오 공작 각하, 그만 하십시오!”
“싫은데.”
“허……?”
예의라곤 없는 뒷골목 시정잡 배 같은 목소리에 레오폴드 백작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다시 고개를 돌린 밀라이언이 보란 듯이 한층 더 빠르게 검집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악! 악! 졌……! 항……, 억!”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는 인프릭을 보면서도 레오폴드 백작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움직이려고 하면 밀라이언이 한충 격하게 팔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인프릭이 입이라도 벌리려고 하면 타이밍 좋게 아픈 곳을 두드리는 밀라이언의 행동에 인프릭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페리얼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타앙-!
인프릭의 검이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프릭의 허벅지를 향해 검집을 휘두르던 밀라이언이 그 몸에 닿기 직전 검집을 멈췄다.
또다시 다가올 격통에 몸을 웅크렸던 인프릭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검 떨어뜨렸잖아. 주워.”
“제가 졌…….”
입을 열려는 인프릭을 흘겨본 그가 혀를 차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검을 주워 손수 인프릭의 손에 그것을 쥐여 줬다.
“제가 졌습느…… 흐억!”
“그대는 안 졌어. 계속 버티고 있어.”
그 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인프릭이 바닥을 굴러도 밀라이언은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손에 검을 쥐여 줬다.
온몸이 흙과 먼지투성이가 되어 얼굴과 팔다리가 퉁퉁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밀라이언은 멈추지 않았다.
“공작 각하! 이제 제발 그만하십시오!”
콧대 높은 레오폴드 백작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때까지 밀라이언의 대련을 가장한 구타는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