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28)
>128 화>
밀라이언이 더 이상 일어나지도 못하는 인프릭을 내려다보며 검집을 허리춤에 다시 꽂았다.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선 이미 태양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프릭이 부은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자 레오폴드 백작이 황급히 다가가 인프릭의 몸을 살폈다.
“괜찮으냐?”
“……예.”
” 아파?”
“……..”
밀라이언의 물음에 인프릭이 입을 꽉 다물었다.
아프긴 하지만 기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프릭이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그거의 수십 배는 더 아팠어. 하루하루가 절망과 고통의 나날이었겠지.”
“…….”
인프릭이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퉁퉁 부은 얼굴은 이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수려했던 외모가 완전히 곤죽이 되었다. 레오폴드 백작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인프릭의 손을 붙잡았다.
밀라이언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우습게도 이렇게 보고 있는 레오폴드 백작은 전 페스텔리오 공작인 제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픈 자식을 위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몸에 흙먼지가 묻든 말든 제 자식과 눈을 마주했다. 그것이 가장 밀라이언의 속을 뒤집었다.
그는, 레오폴드 백작은 분명히 이상적인 부모였다.
오로지 카리나만을 제외하곤.
“왜 카리나에겐 이렇게 해 주지 못했을까?”
밀라이언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백작의 시선을 밀라이언은 그저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 시선이 덜 갔을 수도 있어. 그대도 인간이고 카리나도 인간이야. 모든 사람이 찍어 낸 듯 같은 성격이 아니니 어떻게 전부 같은 마음으로 대하겠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페리얼의 표정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레오폴드 백작과 밀라이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백작의 말을 전부 부정하진 않아.”
“…….”
“그러나 부모만큼은 그래선 안 되지. 자식이 중간에 껴서 눈치를 많이 볼 수도 있고 소심한 성격일 수도 있어. 하지만…….”
밀라이언이 이를 악물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흥분하지도 않고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그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방금 자신이 본 것과 같은 이런 모습을 카리나는 평생 눈에 담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보다 눈에 덜 띈다고 해서…… 부모마저 그 존재를 가볍게 여기면 대체 아이는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 거지?”
“저는…… 그저…….”
레오폴드 백작이 한참 만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몰랐다고 몰랐을 뿐이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려던 레오폴드 백작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코 변명조차 될 수 없을 테니까.
“그대에겐 눈에 보이는 상처는 상처고 보이지 않는 상처는 상처가 아닌가?”
이야기를 들으며 인프릭이 끙끙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라이언이 그를 부축해서 일으키는 레오폴드 백작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감싸 줄 수 있었으면서, 눈을 맞추는 방법도 걱정해 주는 방법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녀에겐 대체 왜 그렇게 잔인했나.”
“저는 그저 그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잘하고 있다고만…….”
레오폴드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꽉 쥔 주먹에서 뒤늦은 후회가 느껴졌지만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카리나가 직접 선을 그었다.
“카리나가 일어나기 전에 떠나.”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 아이에게 제대로…….”
“이미 기회는 없어. 그대는 발 밑에 수없이 많이 놓인 기회를 발로 차고 나서 또 기회를 달라고 하는 거니까.”
밀라이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미간 을 좁혔다. 페리얼의 모습을 그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낮게 혀를 차며 그가 인프릭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답지 않은 소리를 했지만 네놈들이 지금 여기서 쫓겨나는 건 달라질 일 없다.”
“놓으십……!”
“꺼져. 한 번 더 네놈들이 무단으로 북부의 땅을 밟는다면…… 그때는 북부를 적으로 돌린 거라고 생각하도록 하지.”
밀라이언이 병사들에게 인프릭을 떠넘기며 말했다. 그러곤 우뚝 서 있는 레오폴드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작도 내가 뒷덜미를 잡아서 던져야겠나? 아무래도 툭 치면 죽을 것 같아서 내키지 않으니 제 발로 가는 게 어때?”
“……굳이 쫓아내셔야겠습니까?”
“개소리는 싫어하는데, 내가 개가 아니라서.”
밀라이언의 거친 언사에 레오폴드 백작이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도착한 그가 멍하니 마차를 바라봤다. 새하얀 보따리로 가득 차 있는 마차 안은 사람 둘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건…….”
“카리나가 주기로 한 금화. 금화는 귀찮으니 금괴로 꽉 채웠다. 넉넉히 두세 배쯤 쳐 뒀으니 가져가도록 해.”
“필요 없습니다.”
밀라이언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레오폴드 백작을 거의 구기듯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레오폴드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제 발로 마차 안에 걸어 들어갔다.
비좁은 공간에 간신히 자리 잡은 레오폴드 백작이 다급히 밀라이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는 정말 죽습니까?”
밀라이언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레오폴드 백작의 눈을 바라 보던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죽어. 그러니 잊고 살아.”
“……정말로 그 아이의 곁을 지킬 수 없는 겁니까?”
“늦었어.”
단호한 밀라이언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은 고개를 떨궜다.
밀라이언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병사들이 문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아…… 저건 왜 아직 남아 있어? 쯧, 가서 마차 멈춰.”
밀라이언이 몸을 돌리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멀찍이 떨어진 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녹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밀라이언이 낮게 혀를 찼다. 허여멀건 낯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공, 공작 각하! 전…… 여기에 있을 수 없겠습니까?”
“없는데.”
“저는 카리나 아가씨가 아니라 윈스턴 스승님을 뵈러 온 겁니다. 백작 각하와는 가는 길이 맞아서 함께 오게 된 것뿐이고요.”
녹턴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윈스턴의 이름에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페리얼을 쳐다보자 페리얼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도 따로 윈스턴에게 전해들은 게 없었으니까.
“의원인가?”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짤막하게 고민한 밀라이언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쫓아내려고 한 건 카리나의 가족이었다. 허여멀건한 반죽 덩어리가 하나 남았더라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별관을 계속 쓰도록 해. 사람을 붙여 주지.”
“감사합니다.”
녹턴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밀라이언이 그대로 몸을 돌리자 페리얼이 그 뒤를 따랐다.
“넌 왜 밖에 있어?”
“소란스럽길래 구경. 카리나한텐 뭐라고 하려고 저렇게 쫓아내?”
“난 대련을 하고 싶어 하기에 그것에 응해 줬을 뿐이야.”
뻔뻔스러운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사태를 본 누가 대체 그걸 대련이라고 부르겠는가.
“하론은 언제쯤 가져오려고?”
“오늘 밤에 출발할 거다. 이번엔 제대로 가져오지.”
“시간이 없어. 혹시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카리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 우두머리 헤르타에게 있는 하론이 대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도 알아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정도로 커야 할 텐데.
“이번엔 가져올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
밀라이언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리얼도 이윽고 몸을 돌려 지하실로 향했다.
* * *
“페리얼?”
“아, 네. 왜 그러시나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요. 그래서 새벽부터 끌려 나갔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카리나의 물음에 페리얼이 잠시 고민했다.
사실 대답을 해 주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밀라이언이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해결했을 정도로 그녀에겐 숨기려고 했던 일이다.
‘그놈을 골려 주는 건 좋아하지만……’
가끔은 편을 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냥 새벽부터 깨워서 마차에 태워 보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 정말요? 새벽에 잠을 자야지. 가만히 보면 밀라이언이 더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뚱한 목소리를 내는 카리나를 보며 페리얼이 옅게 웃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발작이 없었나요?”
“네, 페리얼의 약 때문인지 오늘은 괜찮았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페리얼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론을 연구해서 그 힘을 액체처럼 추출하는 법을 알게 됐지만 그뿐이다.
그녀가 먹는 하론의 용량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빨리 돌아오면 좋겠네요.”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길 바란다니. 스스로 하는 말이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마음을 줘 더는 놓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러겠다고 했으니까요.”
“네, 그러면 좋겠네요.”
여유로운 오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