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
>13 화>
“그대는 이 새벽에 잠도 안 자고 뭘 하는 거야?”
“그…….”
카리나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 등잔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 위를 꼭 눌렀다.
“그, 그러는 공작 각하가 여긴 어쩐 일로…….”
“아…….”
카리나의 질문에 밀라이언이 민망한 듯 뒷목을 매만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입을 다물어 버린 그녀가 신경이 쓰여서 저도 모르게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하기엔 여러모로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별택의 온도조절기가 망가졌었던 기억이 나서 바람도 쐴 겸 확인하러 왔다.”
밀라이언이 떠오르는 말을 적당히 내뱉었다.
“아, 그런가요.”
평소라면 왜 굳이 공작 본인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법했으나 카리나는 지금 정상적인 사고를 할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리나를 위아래로 훑던 밀라이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법 거리를 둔 채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카리나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발자국 내딛자 카리나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밀라이언은 그녀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마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그들이 도망치려는 방향을 유추해 내는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의 어색한 움찔거림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밀라이언이 한마디 하자 카리나는 한 발자국 더 물러났다.
맘 같아선 뒤돌아서 방에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애.”
“…….”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괜찮니? 라는 질문에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의견을 묻는다면 그 의견에 대해서는 입을 뻥긋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카리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밀라이언이 큰 보폭 두 번 만에 카리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호흡과 목소리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기 때문이다.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도망가려 했으나 밀라이언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 것이 빨랐다.
밀라이언은 카리나의 손을 붙잡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카리나를 끌고 달빛이 비추는 창문 근처로 데리고 갔다.
은은한 달빛 아래, 가늘어진 붉은 눈동자가 카리나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었다.
‘열이 높군.”
“……괜찮아요. 쉬면 나을 거예요.”
“두 달이나 무리해서 왔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밀라이언이 작게 중얼거렸다.
쯧, 혀를 차는 목소리는 자책에 가까웠다.
카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밀라이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따지자면 말하지 않은 자신의 탓이 아닌가.
이윽고 밀라이언의 시선이 매섭게 카리나에게 닿았다.
“그대는 몸이 좋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그걸 미련스럽게 참고 있나? 아픈 걸 참는 건 미련한 곰탱이나 하는 짓이야.”
“곰탱…….”
오징어에 이어 이번에는 곰탱이다. 카리나는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카리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전장에서 아픈 걸 숨기다 사달이 나면 목이 달아나는 건 그대가 먼저일 거야! 일을 더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미리미리 말을 했어야지.”
“…….”
“그래, 안 그래?”
매섭게 뜬 눈이 카리나를 탓하고 있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더 키울 생각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의원에게 받아온 약도 있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대역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못 했나? 안 했나?”
“네? 아, 자, 잘못…….”
그의 기백에 눌려 잘못했다고 말하려던 카리나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왜 갑자기 아닌 밤중에 뜬금없이 추궁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오죽 어이가 없었으면 휘청거리던 눈앞이 잠깐 또렷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카리나의 시선을 보던 밀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 앞에 손가락이 툭 솟아났다.
누가 봐도 전투를 해 근력이 길러진 사람의 강건한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무려 여섯 개다.
“그대, 이거 몇 개로 보이지?”
카리나가 눈에 힘을 줘서 가늘게 떴다.
보통은 두 개로 나뉘어져 보이곤 했으니, 당연히 저 숫자에서 나누기 2를 하면 되겠지.
그녀가 단순하게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세 개요.”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제 손가락을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카리나를 바라봤다.
제대로 맞췄나 싶어 어깨에 힘을 주자 그가 헛웃음을 훅 내쉬었다.
“그대, 당장 본 저택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도록 해.”
“네? 왜요?”
그녀가 황당함에 고개를 들자 밀라이언이 세 명으로 나뉘어 있었다.
부리부리한 여섯 쌍의 눈이 카리나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멍 하니 고개를 내려 다시 손가락을 바라봤다.
‘……두 개였구나.’
그녀의 눈이 낭패감에 물들었다.
“두 개도 네 개도 아니고 세 개라고 말한 것을 보니 원래는 여섯 개로 보였던 모양이군.”
밀라이언이 날카롭게 말했다.
카리나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군.”
흠칫, 카리나의 몸이 떨렸다. 그녀의 눈이 한층 가라앉았다.
“전 괜찮아요.”
그녀가 버릇처럼 말을 내뱉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다. 그저 가장 멀리, 가장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었을 뿐이다.
한숨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카리나의 무릎 아래를 손으로 받친 밀라이언이 그녀의 등을 받쳤다.
“여긴 아픈 사람이 쉬기엔 문제가 많아. 본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지. ”
“하지만…….”
“내가 그리 내키지 않는 건 알겠지만 악독한 인간으로는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밀라이언의 말에 그녀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카리나가 물끄러미 밀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부담스러운듯 힐끗거렸다.
“돌볼 사람을 부를 테니 자도록 해.”
“……의원은 안 돼요.”
“……뭐?”
“의원은 절대 안 돼요. 아셨죠……?”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카리나의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가 다시 뜨이길 반복했다.
밀라이언이 몇 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다시 닫았다.
“일단 쉬도록 해.”
“……약속했어요.”
제대로 침대에 누운 것도 아닌데 몸이 가로로 눕혀졌다고 금세 잠이 몰려왔다.
밀라이언의 낮은 한숨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몸을 감싼 따뜻한 온기에 오들오들 떨리던 몸은 어쩐지 진정이라도 한 듯 얌전했다.
* * *
한참을 앓고 나니 머리가 조금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카리나는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고 생각했던 머릿속이 한층 맑아졌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과 푹신푹신한 이불, 으슬으슬 떨리는 몸은 여전히 춥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침대는 축축했다.
“정신이 좀 드나?”
“각하?”
잔뜩 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뒤늦게 이불로 입을 푹 가렸지만 이미 새어 나간 목소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눈을 도르르 굴리자 창문 옆에서 달빛에 의지해 서류를 보고 있는 밀라이언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이마에 올려져 있던 젖은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천천히 상황을 이해한 그녀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끙끙거리고 있으니 짧게 한숨을 내쉰 밀라이언이 손을 내저었다.
“열은 전혀 내리지 않았으니 누워 있도록 해.”
“왜……, 여기에…….”
“의원은 죽어도 부르지 말라고 하고 그대를 돌볼 사람을 부르기엔 시간이 애매했어. 아침까진 내가 잠시 곁에 있기로 한 거다.”
또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가 어정쩡한 자세로 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자 밀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눌러 자리에 눕혔다.
밀라이언의 손길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게 아니라 너무 얼떨떨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아파서 눈을 떴을 때 물을 갈아 주던 시녀 이외엔 딱히 누군가와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마치 자신을 돌봐 주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여기 계속 계셨던 거예요?”
“그럼 내가 멀쩡한 집무실을 두고 왜 여기에 있겠나.”
“왜요……?”
잔뜩 잠긴 몽롱한 목소리로 카리나가 물었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도르르 굴리는 그녀를 바라 보며 밀라이언이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의원도 없는데 아픈 사람이 어찌 될 줄 알고 눈을 떼?”
” ……하지만 내가 귀찮지 않아요?”
“아픈 환자를 돌보는 데 귀찮은 게 무슨 상관이야? 그대는 객이고 나는 주인이야. 그대가 이곳에 눌러앉는 순간 그대가 제시한 약속은 성사됐으니 제대로 손님 처럼 굴어도 좋아.”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붉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배시시, 멍청하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어 긴장이 풀린 근육이 멋대로 움직인 결과도 있지만, 그냥 그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