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0)
>130 화>
피가 흥건하게 새어 나와 붉은 카펫을 적시고 사용인들 여럿이 모여 밀라이언을 조심스럽게 들고 있었다.
고레든의 옆구리도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밀라이언의 상처는 상당히 심각했다.
무언가가 배를 뚫고 지나간 듯 내장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급히 천을 찢어 지혈을 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상처의 크기를 보아 큰 효과는 없었던 듯했다.
“……밀, 라이언……?”
뒤에서 들린 가느다란 목소리에 페리얼이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을 막기 전에 이미 그녀는 모든 상황을 눈에 담은 듯했다.
“밀라이언.”
“…….”
눈을 감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리나가 거칠어지는 제 호흡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대답이 없다.
그녀가 차마 바쁜 사용인들 사이로 파고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주먹을 꽉 쥔 그녀가 방금까지 밀라이언이 누워 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한층 더 진한 색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쪽에선 고레든이 엉성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리나가 사용인들에게 들려 멀어지는 밀라이언을 가만히 바라 봤다.
“페리얼…… 나, 이거, 지금…… 꿈은…… 아니죠?”
“카리나, 일단 잠시 방에 가 계시는 건…….”
“페리얼! 페리얼이……. 치료할 수 있죠? 기적……, 그 플루트로…… 페리얼의 기적은 치유의 힘이라고 했잖아요!”
카리나가 다급하게 페리얼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정돈 되지 않은 말이었지만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페리얼의 표정이 낭패감에 물들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카리나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옷자락을 한층 더 세게 쥐었다.
“페리얼……?”
“미안합니다, 카리나.”
페리얼이 제 팔의 옷을 걷어 올리며 손등을 아래로 향하게 뒤집었다.
그의 손목 혈관에 몇 개의 주사 바늘 자국이 있었다.
“……제 몸으로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하론 추출물을 넣었는데 그 때문에 지금은 기적을 쓸 수 가 없습니다.”
“아…….”
카리나가 페리얼의 옷자락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툭 떨어지는 손을 바라보며 페리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일주일이면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사실 카리나가 지하 실험실에 왔던 날 실험할 예정이었다. 하론이 어느 정도의 지속력을 가지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날 카리나에게 들켜서 하지 못했고 결국 실험을 한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능력이 돌아오기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어.’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치이기 때문에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기적을 쓸 수 없었다. 카리나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페리얼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손길이 닿기 전에 들린 목소리에 카리나의 고개가 들렸다. 페리얼이 냉큼 손을 내렸다.
고레든의 무거운 목소리는 지친 듯 힘이 없었다. 호흡도 불안정했고 다리 한쪽은 간간이 경련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카리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뇨. 일단…… 경…… 고레든 경도, 치료를…….”
더듬더듬 말이 떨렸다.
카리나가 눈에 가득 차오른 열기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상황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친 이를 잡아 놓을 정도로 이기적이진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이게 할 이성 한 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카리나의 말에도 고레든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
“우두머리 헤르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겨울잠에 들어간 마수를 죽이고 그 하론을 먹었습니다.”
“……하론을?”
“파악되진 않았으나 그 수가 대략 수백을 넘어가리라 생각합니다. 하론을 과다 섭취 한 탓인지 헤르타의 외형은 이전과는 다르게 변했고 그 힘은 인간이 상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고레든의 설명에 페리얼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론을 과다 섭취 했다고?
그런 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론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른 기능도 있는 건가?
“일단 알겠다. 그대도 고생했네.”
“……하론.”
카리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제 눈을 꾹 눌렀다.
‘겨우 하론 하나 때문에. 그게 뭐라고.’
자신이 대체 뭐라고……. 제 몸 까지 버려 가며 돌아왔는가. 위험했다면 도망치면 될 일이다.
헤르타도 있었고 밀라이언도 고레든도 강했다. 겨우 그 정도를 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에 더해 헤르타의 군대가 너무 많아 방심한 순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지키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냥 돌아왔…….”
이를 악문 카리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돌아왔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였으니까. 그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론 따위가 없었어야 했다.
자신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끔찍한 고통 속으로 몰아붙였다.
“물약…… 가져올게요. 일전에 급할 때 쓰려고 그려 둔 게 좀 있어요.”
“카리나!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날 위해서였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밀라이언 좀 부탁해요, 페리얼.”
흐린 표정으로 말하는 카리나를 보며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지금 누구의 탓을 하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페리얼은 멀어져가는 그녀를 향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단을 오르는 카리나를 바라보다가 고레든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대도 일단 치료를 할 테니 응접실에 가 있도록 하게. 금방 오지.”
“전 괜찮습니다.”
“두 번 말하는 건 싫어하네만.”
“……알겠습니다.”
페리얼의 목소리에 고레든이 묵묵히 대답했다.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응접실을 향해 멀어져 갔다. 페리얼은 밀라이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도착한 방에는 사용인 둘과 팽 그리고 다급한 손길로 밀라이언의 상처를 보고 조치를 취하는 윈스턴이 있었다. 윈스턴이 힐끗 그를 바라봤다.
“상태는?”
“상처도 상처지만 혈액 손실이 심각합니다. 일단 가져가셨던 물약을 쓴 모양이지만…… 상처가 심해서 그런지 큰 효능이 없습니다.”
페리얼이 답답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죽은 듯이 잠든 밀라이언은 상처를 보기 위해 헤집는 고통에도 작은 반응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도 물약이 그나마 지혈을 해 준 모양입니다.”
“카리나가 물약을 가져온다고 했어.”
“일단 상처를 먼저 봉합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내장은 크게 손상된 곳이 없습니다. 다만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말끝을 흐리는 윈스턴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래도 피가 멎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페리얼이 다른 손으로 제 팔을 꽉 붙잡았다.
“……미안하군. 바로 치료해 줄 수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살릴 테니까요.”
윈스턴이 고개를 숙이는 페리얼을 달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손과 옷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의원이란 굉장하군.”
페리얼이 낮게 중얼거렸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그에겐 무척 신기할 뿐이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윈스턴이 의료 상자에서 바늘을 꺼내 불에 달구곤 식혔다. 그것으로 조심스럽게 밀라이언의 상처를 봉합해 가기 시작했다.
미동도 없는 밀라이언을 보며 페리얼이 한숨을 삼켰다.
* * *
방이 아닌 화실로 올라온 카리나가 화실 책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가 서랍 가장 아래쪽을 열었다. 커다란 서랍 안에 가득 찬 물약을 하나 하나 조심스럽게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금방 나을 수 있겠지.”
빨리 가져다줘서 낫게 해 주자.
얼른 그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제게 입을 맞춰 줬으면 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카리나가 이를 악물며 물약을 바구니에 넣어 품에 들어 올렸다.
“나으면…….”
나으면 그는 또 숲으로 갈 것이다. 숲으로 가서…… 또다시 자신을 위해 무리를 하겠지. 괜찮다고 해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물약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힘껏 끌어안았다.
“……싫어.”
더는 됐다. 살고 싶지만 그것이 밀라이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게 나았다.
페리얼도 그랬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어떤 것인지도 모를 물질을 제 몸에 집어넣었다.
밀라이언도 페리얼도 자신을 아낄 줄을 몰랐다. 그건…… 분명히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두머리 헤르타가 등급 높은 하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무리를 했을 리도 없다.
카리나의 얼굴이 벼가 익듯이 천천히 수그러졌다. 밀라이언이 눈을 떴을 때 더는 자신을 위해 희생해선 안 된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곤 빠르게 화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