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1)
>131 화>
그녀가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밀라이언의 방에 들어갔다. 윈스턴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밀라이언의 살결에 날카로운 바늘을 찔러 넣는다. 그것을 계속 해서 반복했다.
“카리나, 괜찮습니까?”
“네, 이거 물약이에요. 부족하면 더 그려 줄게요. 부족…… 할까요?”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밀라이언에게 효능이 좋다고 들었거든요.”
“네…….”
카리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페리얼이 그녀의 등을 슬쩍 밀었다.
카리나가 놀란 듯 페리얼을 바라봤다.
“인사도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페리얼의 말에 윈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내 천천히 죽은 듯 잠 든 밀라이언에게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그의 볼에 닿은 손끝에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차갑네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밀라이언의 눈을 훑었다.
꾹 닫힌 눈꺼풀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천히 그의 얼굴을 훑던 카리나가 손을 거뒀다.
꾹 다물린 입매도 닫힌 눈꺼풀도 흐린 호흡 소리도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한참을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몸을 돌렸다.
“방에 올라가 있을게요. 고레든에게도 하나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망설임 없이 나오는 대답이 더 불안했다. 밀라이언의 가장 큰 상처를 봉합한 윈스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페스텔리오 공작께선 괜찮을 거라네. 내가 약속하지.”
“네, 부탁드려요.”
카리나가 흐리게 웃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몸을 돌린 그녀가 방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처음에는 느릿하기 그지없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지막엔 거의 달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림을…… 그려야 해.’
머릿속이 점점 강박관념에 사로 잡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조여왔다.
곧장 화실로 뛰어 들어간 그녀가 문을 닫고 그대로 기대어 섰다.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캔버스 속 드래곤에게 향했다.
오로지 선만이 그 존재를 알려 주고 있었다. 색을 칠하고 음영을 주고 숨을 불어넣으면 그것은 생명을 갖고 전율할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드래곤의 원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저 이것에 몸을 맡기고 붓을 움직이면 된다.
완성하고 싶다.
완성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
카리나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시뻘건 불길이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자아가 잠식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감각은 익숙한 것이다.
광기에 자아를 빼앗긴 때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미안해요, 밀라이언.”
카리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가 나무 팔레트에 물감을 짰다. 붓을 쥐고 색을 묻혔다.
이기적이라도 좋았다. 그가 희망을 잃고 절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래도록 그의 곁에 있지 못해도 괜찮았다. 앞으로 그와 함께 할 시간이 짧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죽을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희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뭣보다 자신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일만 겪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밀라이언이 나으면 분명히 다시 숲으로 향할 것이다. 고레든은 그것을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마수라고 평가했다.
그 의미는 밀라이언이 또 다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그가 숲으로 돌아가 버릴 이유를 없애면 되잖아?
누군가 머릿속에 그렇게 속삭였다.
우두머리 헤르타를, 그가 이끄는 마수를 전부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세계에서 사라진 최강의 종족을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카리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살짝 풀린 눈은 광기에 젖어 반짝였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순식간에 색이 입혀진다.
텅 빈 눈동자에 생기가 담기고 새하얗기만 했던 드래곤의 비늘이 날카롭게 빛났다.
재깍재깍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도 태양이 넘어가 붉게 물드는 노을도 내려앉는 밤의 고즈넉함도 그녀의 눈에는 어느 것 하나 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엔 캔버스만이 담겼다.
‘조금만……’
구름 한 점 없는 청량한 하늘과도 같던 눈동자에 천천히 금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서서히 제 영역을 넓혀 가는 황금빛이 이윽고 카리나의 눈동자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한 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카리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카리나는 그림의 완성을 앞두고 다시 붓에 물감을 묻혔다.
그녀가 팔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녀의 손이 붓 터 치 한 번을 남기고 멈췄다.
갑작스러운 방해꾼에 카리나가 미간을 좁혔다.
아름다운 황금빛이 탐욕스럽게 푸른 눈동자의 3분의 2를 잡아먹은 채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문고리가 움직이더니 곧 문이 열렸다.
“카리나, 밀라이언이…… 일어 났…… 카리나?”
“아…… 페리얼.”
카리나가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온 페리얼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숨을 멈췄다.
어떻게 멈추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리도 끔찍하고 아름다운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카리나의 주변은 엉망이었다.
쏟아진 물과 마구잡이로 던져진 물감과 붓, 그림은 완성 직전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빛에 거의 침식당해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황금이다. 그것은 탐욕을 부르고 이기심을 부르며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다.
예술병에 걸린 이의 욕망을 자극해 그를 미치게 한다.
페리얼과 눈이 마주친 카리나가 눈꼬리를 휘며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해맑았으나 곧이라도 흐릿하게 흩어질 것 같은 미소였다.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건네는 것처럼.
“카리나, 대체 무슨…….”
“밀라이언을…… 멈출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서요. 난 그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평생에 처음으로 가지게 된 욕심이에요.”
붓에 힘을 준 그녀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캔버스에 가져다 댔다.
“카리나, 하지 마십시오.”
“밀라이언은 내 거예요. 그 사람은 다치면 안 돼.”
“카리나!”
비명처럼 내지르는 페리얼의 목소리에도 카리나의 손은 움직였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카리나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확신하건대, 페리얼은 그것이 카리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리나의 눈동자가 완전히 금빛에 물들며 캔버스가 빛을 뿜었다.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캔버스에서 발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드래곤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캔버스에선 그저 커다란 빛무리 하나가 나왔을 뿐이다. 캔버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창문을 빠져나갔다.
카리나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그림에 염원을 담았다. 저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녀의 염원을 이뤄 줄 것이다.
툭, 데구르르-
눈앞이 흐릿해지고 물체가 두 개로 나뉘어 보였다.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에 카리나가 고개를 툭 기울였다.
‘뭐지?’
그녀가 눈에 힘을 줬다. 그래도 흐릿해진 세상은 다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어……?”
세상이 기울어지고 있다.
“카리나!”
달려오는 페리얼도 기울어져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기울어지고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세상에 어둠이 드리웠다.
* * *
페리얼이 다급히 달려와 무너지는 카리나의 몸을 받아 냈다.
그녀의 몸을 받아 낸 그의 눈이 큼직하게 뜨였다. 숨결이 흐리고 호흡이 불안정했다. 굳이 자세히 진찰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상태는 위험했다.
그뿐이랴, 몸은 어찌나 차가운 지 모른다. 심장의 통증과 함께 지독한 열을 몰고 왔던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그 증세가 달랐다.
“젠장!”
그녀의 그림에 있던 드래곤이 자취를 감췄다.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배경 조금뿐이다. 그렇다고 드래곤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페리얼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페리얼이 카리나를 품에 안은 채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건 예술병이다.
예술병의 후유증이다. 그리고 그 숨결이 꺼져 가기 일보 직전 이었다.
페리얼은 태어난 가문이 그렇다 보니 다른 이들보다는 예술병 환자를 많이 접했다. 개중에는 조치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된 이들도 있었다.
그녀와 같은 창조자는 처음이지만 예술의 숨통이 끊기는 순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예술의 혼이 서서히 꺼져 가는 걸 목격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그것이 사라지기 직전의 느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리나에게선 그 들과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죽어 가고 있어.”
카리나의 예술의 혼은 말 그대로 생명 그 자체다.
그녀가 지닌 생명의 불꽃이 그녀의 혼이었다.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
그 사실이 페리얼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