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2)
>132 화>
‘젠장!’
실험을 지금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실험을 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이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욕심이 이렇게 뜬금없이 다가온 상황으로 인해 최악으로 치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끝없는 절망이 그를 휩쌌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차게 식어갔다. 다급하게 아래로 내려가 윈스턴을 찾으려던 그가 방에서 나오는 인영을 발견하곤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페리얼인가? 쯧, 이젠 괜찮다니까 굳이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 놓았어.”
낮게 한숨을 쉰 밀라이언이 아직은 불편한 움직임으로 페리얼 쪽으로 걸어왔다.
상태가 상태였다 보니 물약을 들이부었는데도 완벽하게 낫지는 않은 듯했다.
“카리나는? 그녀도 상황을 알겠지? 걱정했을 것 같은데…….”
“…….”
밀라이언은 대답 없는 페리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초점이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시야가 아직 뿌연 탓인지 잠시 잠깐의 후유증인지, 밀라이언은 연신 눈을 깜박이며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눌러 댔다.
“품에 뭘 안고 있는…… 거지……?”
“……카리나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이 잔뜩 숨을 들이켠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불편하게 서 있던 다리를 움직였다.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등허리를 타고 찌르르 울렸다.
그런데도 밀라이언의 걸음은 빨랐다.
“……밀라이언, 카리나가 죽어 가고 있어.”
“……밑도 끝도 없이 그게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너?”
다가온 밀라이언이 페리얼의 품에 안겨 있던 카리나를 빼앗아 들었다.
그녀를 품에 안자마자 밀라이언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어두워졌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누구인지 정도는.
“그녀가 기적을 일으켰어. 뭔지도 모를 커다란 걸.”
페리얼의 말끝이 떨렸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빛무리는 난생처음 본 것이었고 봐 왔던 기록에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림은 분명히 사라졌다.
밀라이언의 이가 사납게 드러 났다. 그러면서도 카리나를 품에 안은 몸은 함부로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자네가…… 그녀에겐 본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난 그녀가 준 물약으로 금방 나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자네를 멈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어. 이게 그녀가 생각한 자네를 멈추는 방법이었겠지! 자네가……”
페리얼이 주먹을 꽉 쥐었다.
“밀라이언 네놈이, 그녀를 위해서 또! 숲에 갈 테니까!”
페리얼이 답답한 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생에 태어나 유일하게 가진 욕심은, 먼저 깨달은 감정은 밀라이언을 향한 것이었다.
카리나에게 밀라이언은 집착의 대상이었으며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밀라이언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밀라이언이 그녀를 세상 무엇 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카리나도 밀라이언도 죄가 없다는 걸 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원하고 아꼈던 것뿐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런데도 페리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괴롭고 마음이 아팠다.
드물게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자꾸만 서로 부서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여서. 정작 울고 싶은 것은 그였다.
“난……!”
크와아아아앙!
페리얼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땅이 크게 흔들리며 거대한 포효가 페스텔리오령을 거세게 흔들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
수군가 지반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뜯어내는 듯 격한 땅 울림이었다.
밀라이언이 황급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페리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올렸다.
“……뭐지, 이 살기는? 이런 거대 마수도 있었나?”
등줄기가 절로 오싹해졌다.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치는 살기는 난생처음이다. 수도에서 북부까지 오면서 마주쳤던 마수에게서도 헤르타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밀라이언, 괜찮나?”
페리얼이 밀라이언의 안부를 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밀라이언의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동공은 커다랗게 벌어졌고 손은 이미 검을 뽑아 든 후 였다.
“밀라이언……?”
“이건…… 마수가 아니야. 우두머리 헤르타도 이런 감각은 아니었다.”
최상위 포식자 앞에서 피식자가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밀라이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어떤 마수나 인간 앞에서도 포식자였고 강자였으며 또한 패자(覇者) 였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기분이었다.
숨을 멈춘 채 그가 조심스럽게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캔버스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빛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방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것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을 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숲의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의 옆을 가벼이 스쳐 지난 빛무리는 순식간에 겨울의 끝에 멈춰 섰다.
산맥과 산맥 사이라는 기묘한 위치에 존재하는 거대한 절벽.
절벽 주변을 한 바퀴 빙 돈 빛 무리는 빠르게 절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빛무리가 흩어지며 절벽 곳곳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이윽고 절벽 사이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빛무리가 사라진 후에도 숲은 조용했다.
겨울의 끝, 겨울 산맥은 언제나 짐승과 마수의 영역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까득- 후두둑,
까드득- 후두둑.
산맥이 커다랗게 뒤틀리며 돌 무더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돌과 흙먼지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고요와 정적만이 가득하던 숲은 기묘한 소음으로 뒤덮였고 민감한 생물들이 후다닥 절벽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새는 파드득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설치류들은 재빠르게 다른 나무 구멍 속으로 숨어 들었다.
몇 차례나 반복해서 절벽은 비틀리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굳어진 몸을 서서히 움직이려는 것처럼 그것은 이리 저리 몸을 뒤틀었다.
멀리서 본다면 마치 절벽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오래도록 쌓여 굳은돌이 떨어지고 고동색의 탁한 무언가가 틈 사이로 엿보였다. 긴 잠에 빠져 있던 짐승이 기지개를 켜듯 절벽이 불쑥 높아졌다.
쿵. 쿵.
쿵. 쿵.
절벽이 조금씩 높아질 때마다 숲이 흔들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땅에 박혔고 고동색의 탁한 비늘이 빛을 받아 밝아졌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절벽의 잔해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작은 산사태와도 같았다. 돌덩이가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땅이 울리며 흙먼지가 사방에 휘날려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투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돌이 순식간에 기묘한 생물체의 발밑에 가득 쌓였다.
-아아…….
쇠를 긁어내리는 듯한 낮고 거친 음성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언어이긴 했으나 발음도 발성도 모두 이상했다. 무엇보다 그 목소리는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게서 흘러 나왔다.
후두두둑.
온몸을 뒤덮고 있던 흙더미가 이윽고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놈이 눈을 떴다. 샛노란 눈동자가 굴러다니며 주변을 훑었다.
거대한 몸체는 산맥의 반이나 될 정도로 높고 커다랬고 고동색의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짙은 회색의 발톱과 길쭉하게 뻗은 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기묘한 일이군.
드래곤이 목을 쭉 빼내어 숲을 샅샅이 훑으며 중얼거렸다.
뜨거운 숨결에 태풍이라도 몰아친 듯 숲의 나뭇잎들이 크게 요동쳤다. 오랫동안 굳어 있었던 몸은 뻑뻑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고룡, 에이션트 아지 다하카가 거세게 뛰기 시작하는 제 심장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말라 버린 핏줄에 돌기 시작하는 혈액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려 줬다.
근육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고 차가워져 이윽고 말라 버렸던 숨결은 다시 뜨거워졌다.
아지다하카의 표정이 묘해졌다. 머릿속을 울리는 한 가지 사념이 자꾸만 그의 기분 좋은 새 시작을 방해했다.
그는 이러한 사념을 알지 못하니 아마도 그를 살린 이의 염원인 게 분명했다.
-나쁘지 않지.
아지다하카가 등에 달린 날개에 힘을 줬다.
오랜 시간 굳어 단단한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것에 조금씩 마력을 불어넣자 날개가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이 숲의 마수를 죽이면 되는 건가. 잔인한 주인이로고. 내 아이와 다름없는 녀석들을 죽이라고 하니.
쯔쯧, 아지다하카는 혀를 찼으나 그렇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것을 돌려받을 때가 되기도 했지.
딱 한 번이었다.
딱 한 번 아쉬움에 혀를 찬 아지다하카는 작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며 숨을 폐 끝까지 깊게 들이마셨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놈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땅이 울리고, 페스텔리오 공작령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위협적인 포효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아지다하카의 포효가 끝나고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의 위협에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마수와 짐승들의 자취를 쫓아 아지다하카는 발을 내디뎠다.
학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