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9)
>139 화>
그가 녹턴을 이곳에 두려고 했던 것은 윈스턴이라는 의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녹턴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윈스턴을 보고 저택의 별관을 내줬다.
“더 말 못한 건?”
“일전에 명령하셨던 카리나 아가씨에 관한 건 알아 왔습니다. 아마도 그 녹턴이라는 의원이 상대였던 것 같습니다.”
“……뭐?”
“그러니까 그 녹턴…….”
밀라이언의 입술에서 작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수많은 사람 중에 저 인간일 필요가 무엇인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남자 따위를…….
‘대체 얼마나 애정이 고팠으면……’
밀라이언이 지끈거리며 아파 오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북부 밖으로 쫓아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 주제를 모르고 손대선 안 될 것에 손을 댔는데 살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밀라이언의 말에 팽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죽이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윈스턴이 걸렸다. 충격 받을 것이 분명했다.
“윈스턴에겐…….”
“적당히 산적이나 도적에게 습격당했다고 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군요.”
팽의 말에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히곤 걸음을 멈췄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팽을 향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의외야.”
“이 나이 먹어서 사귄 몇 안 되는 동지는 소중한 법입니다. 특히 이 북부에선 말입니다.”
팽은 젊을 때부터 오랜 시간 페스텔리오 가문에서 일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와 보니 명예와 직위는 생겼을지언정 마음을 나눌 친우라고 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나이를 먹고 나니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려워졌다.
특히 이런 북부에선 그의 섬세한 신경을 이해해 줄 사람이 무척이나 드물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윈스턴이었다.
팽에게 있어 윈스턴은 드물게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대화하면 말을 중간에 잘라먹지 않고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정말 북부에서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람.
“막무가내인 주인님을 모시며 속이 썩어 문드러져서 위통에 약이나 먹고 있던 저에겐 천운이었지요.”
팽이 눈물을 찍어 누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밀라이언이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나이가 들어갈수록 팽에게 느는 것은 능글맞음 정도인 듯했다.
“……내키지 않으면 기정사실로 만들면 되잖아?”
밀라이언의 말에 팽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산적이든 도적이든 돈에 굶주린 놈들이다. 적당히 돈을 쥐여 줘. 사람을 죽이는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겠지. 사지를 토막 내든 잘라서 짐승에게 먹이로 던지든.”
밀라이언이 말을 이었다. 미안 하지만 녹턴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북부 밖의 일은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니 굳이 나서서 산적들을 토벌할 필요도 없지. 이용할 건 이용해. 네가 직접 가서 하고.”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팽이 허리를 굽혔다.
지금이야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굴고 있지만 한때는 북부의 어떤 전사들보다도 더 마수에 굶주려 있던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유순해진 줄 알 았더니.’
생각보다 윈스턴이 마음에든 모양이다.
윈스턴이야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편이니 의외로 대화하길 좋아하는 팽에겐 안성맞춤의 상대일지도.
‘스트레스를 풀 곳도 필요했던 모양이지만.’
밀라이언이 곧장 카리나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리나의 첫사랑이라고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가 했더니 하필이면……
“속상하게 골라도 저런 놈이군.”
물론 제대로 된 놈을 골랐어도 바다 건너 멀리 배를 태워 보냈겠지만.
차라리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카리나는 미련이 없고 자신 역시 놈의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니까.
밀라이언이 조심스럽게 카리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직 멈추지 않고 울리는 맥박이 그녀의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다.
그가 그제야 안도의 빛을 띠며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숨결이었다.
이러다 정말로 영영 눈을 뜨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드래곤은 실패할 때를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전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품에 파고들 듯 그녀에게 안겨 들었다.
언제나처럼 제 등을 안아 주는 손길도 쓰다듬어 주는 손길도 없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감정이 이토록 두려운 것인 줄 몰랐다. 애초에 그에겐 잃는다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 정도로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없었다.
“카리나…….”
작은 부름에도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다.
단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덜컥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다.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정체 모를 공포가 그를 잠식 했다.
전 페스텔리오 공작이,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마수에게 큰 상처를 입고 몸이 서서히 약해져 죽었다.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렵진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있었어도 그것이 두렵고 무섭고 이토록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두렵고 무서웠다. 잠식된 공포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젠장…….”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깨워서 제대로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그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저 말없이 그녀의 희미한 온기를 쫓아 손을 쥐고 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 *
포근한 온기가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어린아이처럼 품에 파고든 온기는 따뜻했지만 어딘가 서글펐다.
카리나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노력했다.
“카리나…….”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왜 부르는지 모르지 않는다.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그렇게 전해 줘야 하는데 몸도 눈꺼풀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고 싶어.’
일어나서 그를 품에 안아 주고 싶었다.
곧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젠장…….”
그의 곁에 있고 싶다.
울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가득 멘 그의 목을,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그를 안고 싶다.
‘난 괜찮아요.’
카리나가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커먼 공간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그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힘껏 몸을 뒤틀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한 번만……’
이제 더는 일어날 힘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몸의 한계가 왔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보자. 기다릴게.”
그의 말처럼 아침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제 눈을 뜰 힘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는 아주 조금 남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쉴 새 없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삶에 미련이 남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끝도 없는 공간에 허망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짧으면서 긴 시간을 줄곧 살아 오며, 그녀에게 삶이란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죽을 수 없으니 삶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었다.
겨우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이 자신을 이렇게 뒤바꿀 줄 누가 알았을까?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을 놓기 힘들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눈을 뜨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 써도 좋으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을 해야 했다.
함께해서 즐거웠다고도. 덕분에 삶이 이토록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고. 과거와 마주 볼 수 있었다고.
“제발 부탁해.”
그에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아침에 인사를 나누자고 대답해 버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방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카리나는 우두커니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전부 다 가져가도 좋으니까…….”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물이 도르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이 어딘지 모를 무저갱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이윽고 땅이 크게 흔들렸다.
갑작스럽게 밝아지는 시야에 카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손끝에 닿는 촉감과 익숙한 체향과 피부에 닿는 생경한 온기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