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0)
>140 화>
* * *
장막처럼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의 어둠 사이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다.
카리나는 잠시 아주 깊이 가라 앉은 정신을 붙잡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밀라이언.”
“카리나?”
밀라이언이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크게 뜨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불안에 카리나가 옅게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며 그와 시선이 맞았다.
‘황금빛 눈동자?’
익숙한 푸른 눈동자가 아닌 것을 발견한 밀라이언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시간대를 가늠하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창문 쪽으로 향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둥글게 뜬 은빛의 달이,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가라앉아 있던 정신을 일깨웠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그녀가 고개를 숙여 손을 쥐었다 폈다.
‘그래도 움직여.’
그에게 닿을 수 있다.
카리나가 남은 힘을 쥐어짜 힘껏 팔을 뻗어 그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카리나…… 몸은…….”
“밀라이언.”
나직한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눈이 불안함에 물들었다.
“응.”
“사랑해요.”
마주친 눈동자에선 오로지 따뜻함만이 엿보였다.
밀라이언이 그대로 굳어졌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를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했다.
밀라이언이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카리나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벌어졌다.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부 줬어.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
“…….”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에 밀라이언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급하게 그녀를 올려다봤다.
미안하다는 듯, 안쓰럽다는 듯 설핏 일그러진 그녀의 눈꼬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내게 있어 밀라이언은 유일무이한 사람이에요. 삶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도 그저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당신이 알려 줬어요.”
“카리나, 나도……,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대가 있어서 내 지루했던 삶이 즐거워졌어. 그대가 있어서 최선을 다해 살자고 생각 했어.”
밀라이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떠날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
덧붙여 입을 열려던 그가 여느 때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답게 미소 짓는 카리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응, 고마워요.”
카리나가 붙잡고 있는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미안해요. 나 거짓말을 해 버렸어.”
“……괜찮아. 상관없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대답했다. 거짓말을 수백 번 했든 수천 번 했든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애절한 그 표정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한 차례 비비곤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사실 내일 아침에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니, 괜찮을 거야.”
그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있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카리나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시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게 마지막이 될 것 같았어요.”
“……그대는 괜찮을 거야.”
울컥 차오르는 것을 꾹 억누르며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길 바라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곧이라도 흩어질 듯 위태롭다.
밀라이언이 다급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카리나가 그의 뺨을 감싼 채 그대로 고개를 숙여 밀라이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럽게 닿은 말캉한 온기에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서툴고 무척이나 짧은 입맞춤이 었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뿐, 평소와 같은 깊은 입맞춤은 아니었다.
“카리나……, 그러지 마…….”
그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시간이 부족하네요.”
카리나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볼을 감쌌던 손에 힘이 풀리며 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다급히 카리나의 몸을 받쳤다.
“……카리나?”
“밀라이언, 나…… 조금만 잘게요…….”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밀라이언이 제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입 안쪽 여린 볼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정신을 조금 들게 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카리나를 침대에 눕히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그래, 잘 자.”
밀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침에, 보자……. 기다릴게.”
카리나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에 힘을 줘 쓰게 웃었다.
그녀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거니와 더는 앞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의 목소리조차 서서히 멀어져갔다.
“몇 번째 아침이든 상관없어. 오다가 힘들면 쉬어도 돼. 천천히도 괜찮으니까, 돌아와 줘.”
흐리게 웃은 카리나의 고개가 옆으로 툭 떨어졌다.
밀라이언이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오르내리던 가슴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혈류를 돌게 하며 미약한 온기를 전해 주던 심장은 멎은 듯 맥박도 뛰지 않았다.
그녀를 살게 하던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제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속이 공허했다.
온몸이 뜨거워지고 눈이 시큰거렸다. 가지 말라고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가고 싶지 않은 것은 그녀일 테니까.
“그대는 끝까지…… 살려 달라곤 하지 않는구나.”
혹여나 실패했을 때 자신이나 페리얼이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도록.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제 이기심 하나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욕심 한 번 부리지 않았다.
“그대가 울질 않으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프게 내려 앉았다.
이윽고 떨어진 물방울이 새하얀 침대 위에 툭툭 떨어져 짙은 자국을 만들었다.
번져 가는 그것을 보며 밀라이언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울 수밖에 없질 않나.”
상실감이, 공허함이, 결국 눈앞에 나타나고만 두려움의 결말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죄였다.
밀라이언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선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지 말라고 외칠 상대도, 온기를 찾아 품에 끌어안을 상대도 더는 없었다.
카리나는 죽었다.
예상보다 빨리, 제 속을 다 뒤집어 놓은 채로.
다채롭던 세상이 순식간에 흑백으로 뒤바뀌었다.
* * *
‘카리나 레오폴드’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며칠 되지 않아 북부를 지나 수도와 남부령까지 닿았다.
레오폴드 백작은 남부령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소식을 들었다.
“……누가, 죽었다고?”
“설마요……. 아닐 겁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습니다!”
제 자리에 주저앉은 레오폴드 백작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그를 보던 인프릭이 북부령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을 돌리려 했다.
물론, 밀라이언이 붙여 놓은 호위에게 얻어맞고 다시 마차에 구겨 넣어졌지만.
넋을 놓은 레오폴드 백작이 남부령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식은 남부령을 지나 백작 부인에게도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백작 부인이 실신하고 두 쌍둥이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울음만 터뜨렸다.
사교계에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퍼졌다. 카리나가 바라는 대로였다.
‘카리나 레오폴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주치의였던 녹턴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북부령에서 남부령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도적의 습격을 받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었다.
얼마나 처참했으면 첫 발견자가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였다. 온전한 시체조차 찾을 수 없어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참상이었다고 한다.
윈스턴 역시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며칠이나 앓아 누웠다.
겨우 사체 몇 조각을 수습한 그가 직접 장례를 치르고 팽이 내 준 양지바른 곳에 그의 시체를 묻었다.
레오폴드 백작가는 한동안 두문 불출했고 가문이나 영지의 운영 조차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았다.
뒤늦은 후회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