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1)
>141 화>
* * *
“밀라이언, 시끄러운 것도 어느 정도 정리됐어. ‘카리나 레오폴드’의 존재는 그녀가 원하던 대로 사라질 거야.”
페리얼의 말에 창백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카리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밀라이언이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의 장례식엔 북부 귀족 외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는다고 전했고 페스텔리오 공작가와 칼로스 공작가에서 같이 주도하기로 했다고 알렸어.”
“그래.”
“그녀를 살릴 준비도 다 했고.”
기운 없는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페리얼이 보석 상자에 담긴 하론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카리나의 죽음을 들었던 그날, 밀라이언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벌겋게 짓물러 충혈된 눈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나마 하론이 그녀의 생명에 다시 숨을 불어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음이 분명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페리얼과 윈스턴이 급히 달려왔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멍하니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카리나였다.
윈스턴과 페리얼 그리고 밀라이언은 한참을 그런 카리나를 바라 봤다.
알게 모르게 카리나에게 호감을 느끼던 사용인들은 물론 병사들 역시 쉽게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북부인에 비해 분명히 연약했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돌아 다니지 않았던가. 언제나 상냥하게 웃고 사용인들에게도 병사들에게도 다정하던 그녀다.
누구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혹시나 불면 날아갈까 제대로 다가가 보지도 못했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충격은 더했다.
밝았던 저택의 분위기는 하루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우중충해졌다. 누군가는 레오폴드 백작에게 분노했고 누군가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흘 동안 페리얼을 비롯해 밀라이언은 ‘카리나 레오폴드’의 죽음을 널리 알리는 것에 힘을 썼다. 동시에 녹턴을 쫓아냈다.
카리나의 죽음을 들은 녹턴은 그제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발광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밀라이언은 이미 그에게 분노했고 녹턴은 병사들에게 맞아 질질 끌려 영지 밖으로, 이윽고 북부 검문소 밖으로 쫓겨났고 죽음을 맞이했다.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도적 떼의 습격에 의한 죽음이었다.
사흘, 그들이 부서진 제정신을 부여잡고 분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그럼 마지막은 이 늙은이의 차례겠군요.”
“괜찮겠어? 내가 해도 되는데.”
페리얼이 하론이 담긴 상자를 윈스턴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윈스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은 권력과는 거리가 먼 평민이었으니 두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해 줄 것도 없었고 녹턴의 일로 그도 여러모로 고생했다.
“해야지요.”
가장 처음 그녀의 병을 발견하고 난생처음 살고자 하지 않는 이가 안쓰러워 그 뒤를 쫓았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살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그가 하고 싶었다.
페리얼은 카리나에게 손을 댔다가 실패할 경우를 두려워했다. 밀라이언은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낼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윈스턴이 그녀의 살을 가르고 심장 위에 하론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실패에 질려 버린 젊은이들보다는 낫겠지.
오래 살아온 사람은 생각보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었다.
여린 새싹은 오랜 세월 속에 풍파를 견디며 거대한 고목이 되어 간다. 고목이 몇 겹이나 두꺼운 껍질로 몸을 두르듯, 나이가 들면 무뎌지는 것이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 열정, 체력, 감각, 모든 것들이 무뎌진다.
그리고 그중 가장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젊을 땐 생각지도 못했던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이가 들수록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스스로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조금씩 무던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 지금 당장도 괜찮습니다. 두 분께선 언제쯤 하는 게 좋으실 것 같으신지요.”
“그러면 지금 당장.”
밀라이언의 말에 윈스턴이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해 둔 가방에서 의료 도구를 꺼냈다. 사람의 살을 가르기 위한 메스를 꺼내는 도중 시선이 느껴졌다. 윈스턴의 움직임이 멈췄다.
“괜찮으시다면 팽 집사를 제외하고 두 분께선 밖에 나가 계셔 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지?”
“등에 구멍이 뚫릴 것 같습니다. 이러다 없던 긴장도 생길 지경이군요.”
윈스턴의 말에 밀라이언과 페리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윈스턴의 눈빛을 받은 팽이 석상처럼 서 있던 몸을 움직였다. 팽이 윈스턴과 밀라이언, 페리얼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분께선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윈스턴이 하는 상황을 보고 제가 불러 드리겠습니다.”
팽의 말에 밀라이언과 페리얼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간만 좁혔을까. 불만이 물씬 느껴졌다.
“안 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 보지 않으면 되잖아. 윈스턴.”
“솔직히 말해서 이미 방해입니다.”
윈스턴이 웃는 낯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밀라이언과 페리얼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얼마나 날카로운 목소리인지 귀가 베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절 믿는다면 이만 나가 계십시오.”
윈스턴의 목소리와 팽의 재촉에 밀라이언과 페리얼이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무겁기 짝이 없는 발걸음이었다.
밀라이언과 페리얼을 밖으로 내보내고 팽이 다시 들어왔다.
“자네도 긴장한 표정이군.”
“누군가의 생명을 손에 뒀는데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팽의 말에 윈스턴이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윈스턴이 천천히 그러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팽의 눈치는 무척이나 빨라서 윈스턴이 말하지 않아도 그에게 필요한 것을 척척 가져다주곤 했다.
“할 수 있겠나?”
“해야죠.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윈스턴의 대답에 팽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윈스턴의 메스 끝이 그녀의 심장 위에 닿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그녀의 살결을 갈랐다.
* * *
팽이 응접실까지 데려다줬으나 두 사람은 10분도 되지 않아 그녀의 방문 앞으로 돌아왔다.
방 안은 적막했고 복도는 한층 더 적막했다. 밀라이언과 페리얼이 굳은 표정을 한 채 난간에 기대섰다.
“조용하군.”
페리얼과 둘만 있을 땐 먼저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는 밀라이언이 운을 띄웠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페리얼이 간신히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조용하네.”
“……무사하겠지.”
“따져 보자면 사실 간단한 작업이잖아. 난 손 떨려서 도저히 할 자신이 없지만.”
페리얼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페리얼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카리나가 돌아오면 뭘 할 거야?”
“결혼.”
밀라이언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밀라이언, 자네는…… 그녀를 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난 그녀와 친구로만 있어도 불안할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려워서 지금처럼 대할 자신이 없어.”
카리나는 떠날 것이다.
자신보다 빨리, 일말의 희망도 없이 확실하게. 그녀의 의지도 자신들의 의지도 아닌 그저 그 모든 조건을 감수하고서도 그녀를 살리기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카리나와 그들 사이에 정해진 기간이자 약속이었다.
함께하는 동안 때때로 떠오르는 그 사실이 몇 번이고 그를 괴롭힐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아프고 괴롭다. 이 아픔을 두 번이나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짧은 세월을 끝으로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녀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수십 수백 번 후회하겠지. 그리고 눈을 감을 때도 뜰 때도 두려울 거다.”
밀라이언의 대답에 고개를 숙이 고 있던 페리얼이 시선을 들었다.
밀라이언은 여전히 꽉 닫힌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약간의 미련도 버리지 못할 거야. 기적을 간절히 바라며 수없이 연구에 돈을 투자할지도 몰라.”
“……그래.”
“한 번 겪은 슬픔을 알기에 그 시간이 더 두렵지만 그럼에도 곁에 있어 줬으면 했어. 살았으면 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고통 속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해.”
눈을 감아서 추억할 것이 몇 개 되지 않는다면, 겨우 반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뿐이라면…… 그 긴 시간을 얼마나 괴롭게 버티고 있을까.
사후 세계 따윈 믿지 않는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는 생각을 버릴 수도 없었다.
혹시 모를 환생까지 긴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그 시간에 하루에 한 번, 행복했던 기억을 매일매일 다르게 떠올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녀와는 못해 본 게 너무 많아.”
연애도 해 보고 싶었다. 아침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언젠가 그 표정에서 작은 근심 조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다도 산도 겨울 산맥 너머도 그녀와 함께 가야 했다.
해 보고 싶다고 한 것들을 전부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사랑도 나누고 싶었고 그녀의 온기에 한껏 파묻히고도 싶었다.
“앞으로의 5년은 나와 카리나의 욕심이 이어 낸 시간이야. 그러니 욕심껏 살 거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더 이상 상관없었다.
그저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와의 시간이다. 끝이 정해져 있어도 좋았다. 그 시간 동안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밀라이언의 말을 끝으로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달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밀라이언이 난간에서 몸을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