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3)
>143 화>
* * *
“오늘은 바빠서 낮엔 오지 못할 거야. 밤에는 올게. 좋은 꿈을 꾸고 있길 바라.”
카리나는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아주 긴 꿈. 종종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꿈이었다.
눈을 뜨고 싶어도 도저히 뜨이지 않는 꿈.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고 믿어. 쉬어도 좋으니 멈추지만 마.”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아서 그녀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어떻게 얼마나 흘렀는지,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없이 내려앉는 밀라이언의 목소리가 그의 하루하루를 유추하게 했다.
‘일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일어나야 할지 모르겠다.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괴로웠다. 카리나가 아주 천천히 숨을 삼켰다.
일어나자.
입술에 힘을 주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한참이나 끙끙거렸다.
단단한 족쇄에라도 묶인 듯 옴 짝달싹하기도 힘들었다.
‘제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제 몸을 꾹 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말 그대로 발악이었다. 제 몸을 사방으로 흔들었다. 답답함에 미친 듯이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한참 애쓰던 그녀가 움직이기를 포기했다.
일단 눈부터 뜨자고 생각한 그녀는 온 신경을 눈에 쏟았다.
다행히, 그녀는 한참 만에 간신히 풀로 붙은 듯한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뜬 그녀의 동공이 크기를 키웠다.
‘이게…… 뭐야?’
주변엔 온통 금색의 실이 가득 했다.
금빛으로 된 실들이 카리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가위로 자른다면 쉽게 잘릴 것 같았다.
그녀가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을 움직여 금색의 실 하나를 살짝 퉁겼다.
그러자 그 실에 빛이 생기더니 이윽고 눈앞에 거대한 화면이 떠올랐다.
-그림이라도 잘 그리게 되면 분명히 다시 돌아봐 주실 거야.
-와아……! 예쁘다.
카리나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그녀의 커졌던 눈이 이윽고 서서히 제 크기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기적을 봤던 날의 기억이었다.
처음…… 소망을 담아 그림을 그렸던 날의 기억.
이윽고 짧은 장면이 끝나고 그녀가 건드렸던 황금색 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실에 묶여 있던 손가락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풀린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실에 손을 댄 그녀의 앞에 또다시 장면이 떠올랐다.
-동생은 싫어! 날 이해해 주는 건 너희들뿐이야.
언젠가 쌍둥이들에게 질투를 했던 기억.
-나도 사랑받고 싶다.
가슴 아파서 울면서 그림을 그렸던 날.
-남자는 그런 성격이니 분명 자유로운 삶을 살겠지.
밀라이언을 봤던 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눈앞에 펼쳐졌다. 손 하나가 자유가 되고 자유가 된 손으로 또 다른 실을 하나둘 건드렸다.
모든 것은 추억이었다.
아픈 추억이 훨씬 많았지만 최근의 추억들은 모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던 기억이 수백 개의 가닥으로 얽혀 하나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를 묶고 있던 실이 부서지듯 흩어져 어두운 공간에 별빛처럼 흩뿌려졌다.
* * *
“후우.”
피곤함에 지친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문고리를 돌리려다 말고 잠시 멈춘 그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리며 그가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좋은 밤이야, 카리나.”
들려올 대답은 없었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밀라이언은 흐릿한 시선을 느꼈다. 그가 언제나처럼 숙이며 들어왔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네, 좋은 밤이에요. 밀라이언.”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밀라이언이 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침대에 앉아 쏟아지는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카리나였다.
혈색이 돌고 목소리를 내는 그녀 였다.
눈앞에 있는 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가 제 손으로 손등을 힘껏 꼬집었다. 다행히 통증은 있었다.
“카리나……?”
“네, 밀라이언.”
“카리나, 카리나……”
밀라이언이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그녀를 품에 끌 어안았다.
카리나가 입가를 푸시시 무너뜨리며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사람.
“보고 싶었어요.”
“내가…… 아니, 나도. 보고 싶었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눈앞이 몇 번이고 흐릿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몇 번이고 마주 치고 싶었다.
카리나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보던 밀라이언이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원래는 푸른 바다와도 같던 눈동자에 기묘한 황금빛 아지랑이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대, 눈동자가 조금 달라 졌어.”
“아…… 이상해요? 부작용인가…….”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낮게 중얼 거렸다.
밀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황급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그대가 무슨 모습이든 내겐 카리나…… 그대일 뿐이야.”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단단한 품도 상냥한 온기도 모두 그리웠다. 그녀가 힘껏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카리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새까만 어둠이 아니었다. 달이 존재하고 밀라이언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어떤 어둠이라도 절대로 두렵지 않은 곳이었다.
“다녀왔어요.”
“응……, 돌아와 줘서 고마워.”
두 사람이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카리나가 또다시 입꼬리를 허물어뜨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그의 품에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녀의 등을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밀라이언이 느릿하게 그녀와 몸을 떨어뜨렸다.
“카리나.”
“네.”
“……나와 결혼해 줘.”
밀라이언이 제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줄곧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눈을 뜨길 바랐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카리나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밀라이언, 나는…….”
“그대의 시간이 얼마가 남았든 상관없어. 일주일이든 하루든 1 년이든……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
당황한 듯한 카리나의 말을 잘라 내며 밀라이언이 제 말을 이어 갔다.
잔뜩 굳은 눈매에 담긴 의지는 그가 긴 시간 동안 고민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끝이 두렵지 않은 건 아냐. 몇 번이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 것 같았어. 하지만 그런데도 널 사랑해. 그 모든 걸…… 감내할 정도로 네가 좋아.”
“…….”
“그러니 함께하자. 언젠가 그대의 마지막이 다시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내가 곁에 있게 해 줘.”
밀라이언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허벅지에 얹혀 있는 손등까지 허리를 굽힌 채였다. 애원하듯이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눈을 보며 카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은 날 보면서 계속 불안해 할 거예요.”
“괜찮아. 그 이상으로 행복할 테니까.”
“난 계속 밀라이언에게 죄책감을 느낄 테고.”
“그건…… 미안해.”
밀라이언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 봐야 그녀가 절대 듣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카리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가 사라 졌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곁에 있을게. 그대를 불안하게 하지 않을게.”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그의 눈을 바라봤다.
만났을 때부터 올곧은 눈동자는 지금도 여전했다. 홍염을 담은 듯한 붉은 눈동자를 봤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래요, 어차피 억지로 섭리를 거슬렀어요. 운명 하나쯤 더 거스른다고…… 벌을 받진 않겠죠.”
카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요, 밀라이언. 나랑 결혼 해 주세요.”
그녀가 밀라이언의 반지 케이스 위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윽 고 천천히 작아졌다. 그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응, 기꺼이.”
밀라이언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긴 겨울을 지나 찾아온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