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4)
>144 화>
Epilogue
“……뭘 한다고 했나?”
“결혼. 지참금 챙겨서 구경 오던가.”
“……자네 미친 거 아닌가? 어제 막 깨어난 사람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청혼했는데, 문제 있나?”
버릇처럼 궐련을 꺼내 입에 물려고 하던 밀라이언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궐련을 구겨 재떨이에 버렸다. 그 모습에 페리얼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허, 금연이라도 하는 건 아니지?”
“애초부터 즐겨서 피운 건 아니야.”
밀라이언이 페리얼을 흘기며 대답했다. 웬만해선 전투에 나갈 때가 아니면 저택 내에서는 피우지 않기로 했다.
“흥분하면 제어가 좀 안 돼서 그렇지.”
밀라이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끔 피 냄새를 맡거나 자신의 머리끝까지 화나게 하는 놈들이 드물게 있었다.
괜히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한 나름의 조치 때문이지 즐겨서 피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은 언제 하려고?”
“이번 달?”
“……미쳤나?”
“화려하게 하고 싶었는데 카리나가 싫댔어. 그동안 나랑 더 있고 싶다더군. 시간이 아깝대.”
자랑하듯 그가 말했다. 풀어진 밀라이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페리얼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질리는 놈, 그렇게 좋나?”
“싫을 이유가 있나? 그토록 바라던 사람의 것이 됐는데.”
언제는 제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 자기가 그녀의 것이란다. 페리얼이 말을 잃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행복해 보이니 됐다. 살아난 그녀의 모습을 봤으니 그도 안심이었다.
“넌 언제 돌아가지? 계속 이곳에 있을 순 없잖나.”
“아, 이동용 기적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나. 한 번씩 가서 일처리를 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해.”
“아니, 꺼지라는 말이다.”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이 헛웃음을 삼켰다.
꺼지라니, 무슨 말을 저렇게 하는 것인지. 볼일 다 봤으니 필요 없다는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여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라곤 전혀 없다.
밀라이언이 찻잔을 기울이는 페리얼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카리나가 깨어날 시간이라서.”
“그래, 가라 가…….”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이 지친 듯 손을 내저었다.
그가 느릿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밀라이언이 응접실을 빠져나가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맙다.”
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닫혔다.
페리얼이 찻잔을 반쯤 기울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아슬아슬한 찻잔 속 찻물이 밑으로 조금 흘러내렸다.
“……허, 살다 보니 저 인간한테 고맙다는 말을 다 듣는군.”
황당함이 가득한 목소리였으나 표정만큼은 부드럽게 풀어진 채 였다.
페리얼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은은한 차향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 * *
“카리나, 일어났…… 나……?”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밀라이언이 그대로 굳어졌다.
“오, 왔군.”
“밀라이언?”
방 안의 풍경은 차마 그가 상상 하지 못한 쪽이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한 근육질의 중년 남자가 카리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뿐이랴, 그 품에 안긴 채 어쩐지 편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녀도 보였다.
밀라이언의 얼굴이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카리나, 아무리 그래도 벌써 바람을.”
“네?”
카리나가 도리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던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품에 안고 샛노란 눈동자의 사내를 노려봤다.
“아니, 밀라이언. 무슨 이상한 생각하는 거예요? 이쪽은 아지다하카에요. 드래곤이고…… 밀라이언이랑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아지다하카? 그 드래곤?”
눈앞에 있는 건 어떻게 뜯어봐도 인간이었다.
풍채가 제법 크고 구릿빛 피부와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남자.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기긴 했지만 드래곤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근육이 얼마나 많은지, 살짝만 쳐도 카리나는 10m쯤 가볍게 날아갈 것 같았다. 밀라이언의 눈이 한층 매서워졌다.
그가 그녀를 아예 제 등 뒤로 숨겼다.
애초에 아지다하카라는 드래곤은 고대어밖에 할 줄 모르는 거 아니었던가?
“필요할 땐 없더니 뭐 하러 이제 온 거지?”
“날 다시 살려 준 건 주인이었지. 주인이 죽으면 그녀의 축복에 의해 되살아난 내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지다하카는 무던히 애를 썼다.
제가 떨어뜨린 마력의 부산물을 먹고 몸의 기능을 최소화했다. 적당한 곳으로 숨어들어 그녀의 죽음과 함께 같이 잠에 빠졌다.
그들이 아지다하카가 모아 둔 마력이 전부 소멸하기 전에 그녀를 살려내지 않았다면, 아지다하카는 또다시 어딘가의 거대한 산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융합은 무사히 이뤄졌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아지다하카는 바뀐 세계를 둘러 봤다. 그러면서 언어를 배웠고 덕분에 현대의 언어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내 힘과 주인이 받은 축복이 서로 충돌해서 몸이 적응하는데 제법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지만 무사해서 기쁘구나.”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나야말로.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구나.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네.”
아지다하카가 한걸음 성큼 내디뎠다. 잔뜩 털을 세운 짐승처럼 경계하는 밀라이언을 보며 아지다하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곤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손을 뻗어 밀라이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하하! 제 반려를 지키는 자세는 아주 훌륭하군.”
“…….”
밀라이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걸 굴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뭘 굴욕이라고 부를까.
단 한 번도 그는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주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게는 찰나의 시간이겠고 인간에게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겠지.”
밀라이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그럼에도 걷는 길을 선택했다면 손을 놓지 말거라. 축복을 받은 예술가는 사랑을 갈망해서 처음엔 마음 얻기가 무척 쉽지. 하지만 실망하면 다시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단다.”
한번 실망하면 그들은 예술에 빠져든다.
그러면 다른 인간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에 빠졌으니 사람이 눈에 들어 오는 일도 없다.
“그런데 종종 자네 같은 인물이 있느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안으로 파고드는 존재가.”
아지다하카의 말에 밀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칭찬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린 아지다하카가 한 걸음 뒤로 물러 났다. 그가 보기에 두 사람은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쉽게 깨어지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떠날까 하는데, 이 아래에 마수 한 마리가 있더군. 데리고 가도 되겠나? 나처럼 주인이 죽으면 죽을 존재라네.”
“……아, 헤르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요.”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다하카가 마주 끄덕였다. 그가 두 사람을 한 번씩 끌어안더니 이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쿵, 바깥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정말 무지막지하군.”
“그러게요. 호쾌하신 분이에요. 그나저나 바람이라니……. 본인이 무슨 말 한지는 알고 있죠?”
“…….”
밀라이언의 입이 조가비처럼 꾹 다물어졌다.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긴 하지만 충격적이기는 분명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사랑해.”
그가 냉큼 말하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몸은 어때?”
“좋아요. 아지다하카 씨가 말하길, 몸은 예전보다 좋아졌을 거래요. 건강은 문제없으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말인가?”
밀라이언이 그녀를 덜렁 안아 침대에 앉히며 말했다.
몸은 여전히 가볍고 살은 여전히 물렀다. 그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네, 그러니까 여행도 갈 수 있어요.”
“그래, 바다를 보러 가자. 가보고 싶다고 했지?”
“겨울 산맥도 갈래요. 아지다하카씨가 거기가 보면 놀랄 거라고 했어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어디든 가고 싶고 안 해 본 것은 뭐든 그녀와 하고 싶었다.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언제나 밀라이언이 카리나에게 하던 것이었다. 그의 눈이 큼직 해졌다.
“그리고…… 키스 말고도 다른 것도 할 수 있고요.”
“……뭐?”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목을 팔로 감싸며 끌어당겼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꼬리와 손끝이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밀라이언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그녀의 입술을 살짝 핥으며 혀를 밀어 넣었다.
카리나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그 위에 올라탄 밀라이언이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입 안을 느릿하게 헤집었다.
짧은 키스를 마친 그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대는 부서질 것 같아서 내가 자신 없어.”
“……건강해졌다고 했어요.”
“응, 알지만…….”
밀라이언이 쓰게 웃었다.
아직은 과거의 그녀가 더 겹쳐 보였다. 건강해졌다고 해도 사실 크게 믿기지 않았다. 그 기색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카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늘은 이게 좋아.”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품에 끌어 안으며 말했다.
따뜻한 온기도 제품에 쏙 안기는 느낌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했다.
“결혼은 이번 달 말에 하자.”
“……결국, 이번 달 말이에요?”
“싫어?”
“아뇨, 난 언제든 좋은데…….”
“그럼 그렇게 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두 사람이 포근한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밀라이언이 몇 차례고 그녀의 몸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애정 표현이었다.
“이러다 닳겠어요.”
“안 닳아.”
카리나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냉큼 밀라이언의 입술과 제 입술을 포개었다. 밀라이언의 눈이 한차례 가느다래졌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오늘 온종일 침대에 있을 거면서……?”
“그대, 정말……!”
앓는 소리를 낸 밀라이언이 이내 카리나의 입술을 그대로 훔쳤다.
그가 제 셔츠의 단추를 한 손으로 풀며 그녀의 위에 올라탄 채 이를 드러냈다.
“그대가 자초한 일이야.”
“물론이죠. 밀라이언은 내 거잖아요.”
움찔, 밀라이언의 몸이 떨렸다. 그가 그대로 짐승처럼 그녀를 덮쳤다. 화창한 봄날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