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6)
>외전 2화>
* * *
시녀들이 들어와 식기를 치우는 내내 식사를 마친 카리나에게선 말이 없었다.
쉽게 토라지지 않는 이가 토라진 것을 보니,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가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밀라이언이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카리나, 에리얼 자작에겐 언제쯤 가고 싶나? 대충 다음 주 정도면 답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요?”
“응, 그럼 다음 주 이맘때쯤 출발하는 거로 할까? 길게는 못 있겠지만 일주일 정도는 거기에 있을 수 있을 거야.”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 에리얼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밀라이언은 처음으로 그녀와 연을 맺은 사실에 대해 아주 조금 감사를 하고 싶어졌다.
“좋아요.”
“그래. 그럼 그렇게 준비하라고 팽에게 말해 둘게.”
“미안해요. 괜히 짜증을 냈어요. 그냥 요즘 울컥할 때가 많아서. 아무래도 윈스턴이나 페리얼이 오면 하론이 무슨 문제를 만든 건 아닌지 물어봐야겠어요.”
가장 빠른 방법은 세상을 여행하고 있을 아지다하카를 만나는 것이다.
그의 몸에서 떨어진 마나일 테니 몸의 변화도 그가 가장 빨리 감지할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만.
카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가 있는 것을 그녀도 인정은 하고 있었다.
“아냐, 그대의 잘못은 아니지. 나도 조금 더 조심할게.”
“아니에요.”
카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댔다.
또 밥을 먹으니 몰려오는 건 잠 밖에 없다. 이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억지로라도 밖에 산책을 하러 가야 할 듯했다.
“먹고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혼자서?”
“네, 그냥 산책이요. 멀리 가진 않을게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팽이 커다란 접시에 과일을 가득 담아 가져왔다. 밀라이언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그를 노려봤지만 팽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와, 여름이라 그런지 달콤하네요.”
카리나의 포크가 또 쉬지 않고 움직인다. 밀라이언은 몇 개 집어먹지도 않은 과일이 깔끔하게 자취를 감추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책 다녀올게요.”
“……공작가를 너무 벗어나진 말고.”
“네.”
카리나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윽고 식당에서 나가자 밀라이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 수배해. 아무래도 뭔가 문제 생긴 거 같아. 윈스턴이랑 페리얼에게도 연락하고.”
“윈스턴에겐 연락하겠습니다. 이 늙은이의 생각엔 아마 드래곤께선 이 일과 무관할 것 같군요.”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이상하다니까. 애초에 불안정한 방법이 었으니…… 후유증이 있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식성이 조금 바뀌신 게 대략 한 달 정도 됐고 먹는 양이 늘어 나신 건 두 달 남짓 되셨습니다. 잠이 많아지신 것도 그쯤 되신 것 같고요.”
팽의 말에 밀라이언이 얼굴을 굳혔다.
짜증스럽게 굳어진 표정에선 예민한 기운이 날카롭게 풍겼다. 팽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텅 빈 접시를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음, 그리고 그 한 달 전쯤 마님과 각하께서 첫 동침을 하셨지요.”
팽이 조금 더 직설적인 말을 던졌다.
풀풀 풍기던 날카로운 기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말을 손쉽게 이해한 밀라이언의 표정에 당황이 떠올랐다.
“……카리나가 임신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최근 마님의 행동과 변하신 식성을 생각해 보면…….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팽이 확언했다.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힌 채 이마를 짚었다. 기뻐할 일이지만 동시에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나빠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녀의 시간이 아이에게 할애되길 바라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서로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아픔이 더 커지길 바라지 않았다.
“……확실한가?”
“윈스턴이 곧 올 테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선대 마님께서도 비슷하셨으니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알겠다.”
밀라이언이 피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카리나에게 뭐라고 전할지 벌써부터 속이 답답했다.
‘지우자고 하면 화내려나.’
밀라이언은 그녀에게 아이에 관해선 어떤것도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지우고 싶다면 지우는 것이고 지우고 싶지 않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함께 키울 것이다.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겠지만 반드시 그녀의 미련이 될 것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어느 쪽이든 그녀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으면 했다.
* * *
“회임하신 게 맞습니다. 3개월 쯤 되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윈스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카리나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가 천천히 가라 앉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한편으론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임신 증상에 대해선 저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것보단 하론으로 인해서 바뀐 거라고 생각 하는 게 더 앞뒤가 맞았어요.”
카리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덜컥 찾아온 소식이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녀가 슬쩍 옆을 바라보니 밀라이언이 퍽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할 줄 알았던 그는 생각과 달리 아무런 말도 없었다.
윈스턴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각하께서도 그다지 놀란 기색은 없으시군요.”
“……팽이 혹시나 한다고 말은 해 줬었거든.”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의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요? 왜 나한텐 말 안 했어요!”
“확실하지 않은 걸 말해서 그대를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말은 해 줬어야죠.”
“미안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기뻐해야 할지, 스스로의 안일함에 멍청하다고 벽에 머리를 박아야 하는지.”
밀라이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자책에 카리나의 미간이 좁아 졌다.
윈스턴이 적당히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허리를 굽힌 그가 팽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방 밖으로 나갔다.
“왜 밀라이언이 멍청해요?”
“그대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어. 이건…… 그대의 발목을 붙잡을 일이야. 난 그걸 바라지 않았어.”
“난 당황스럽긴 하지만 싫지는 않아요. 애초에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고요.”
밀라이언이 숨을 들이켰다.
그가 느릿하게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덮었다. 답답함에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미래를 생각 하지 않을 순 없다.
“아이는…… 그대의 미련으로 남을 거야. 얼마 안 되는 그대의 시간을 온전히 그대를 위해 쓸 수 없게 될 거고…… 내 아픈 손가락이 되겠지.”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도 아프도록 이해하고 있다.
정해진 삶을 살게 된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은 어쩌면 해선 안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아이에겐 상처가 될 테고 그녀에겐 미련이 될 테고 그에겐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테니까.
“그래서 그 현실을 전부 떠나보내고 나면요? 밀라이언의 욕심은 어때요? 키우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키우고 싶어. 생각하는 걱정을 뛰어넘을 정도로 우리들의 행복이 될 테니까.”
“그럼 됐네요. 언젠가…… 당신이 혼자가 되더라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됐어요. 내 욕심도 있어요. 난 가족을 원했으니까요.”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양 볼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일그러진 밀라이언의 얼굴을 보며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괜찮겠어?”
“네, 솔직히 이미 뱃속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이걸 죽일 자신도 없어요.”
“그럼…… 마린 에리얼에게 가는 건…….”
“그건 갈 거예요.”
단호한 목소리에 밀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마린 에리얼이 얼마나 걸걸한 말투와 언어를 구사하는지 밀라이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교에 좋지 않다고 장담하지.”
“벌써 아빠 노릇하려고요?”
“……아빠 노릇까진 아니지만 마린 에리얼이 여러모로 그대의 정신에 좋지 않을 거라는 의견은 확고해.”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영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제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기묘했다.
이 작은 배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갈래요. 바다는 보고 싶거든요.”
“……알겠어. 예정대로 하도록 할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밀라이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적긴 했지만 한 층 더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언제든.”
밀라이언이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 위를 한 차례 문질렀다.
그의 눈이 느릿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