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47)
>외전 3화>
* * *
“세상에, 이게 누구야. 어서 와!”
영지로 입성하자마자 마중을 하러 나온 듯한 마린 에리얼이 말에서 뛰어내려 냉큼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그 작은 몸에 무슨 힘이 있는지 카리나를 번쩍 들어 올려 뱅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까지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카리나? 아…… 설마 마님이라든가, 뭐…… 공작 부인 같은 오글거리는 호칭을 써야 하는 건 아니지? 봐주라.”
“아니, 괜찮아.”
밀라이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떨떠름한 눈을 했다.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곤 제 말에 카리나를 태우려는 마린 에리얼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지?”
“아…… 오는 내내 독차지했으면 이제 여자들끼리의 시간도 좀 주십쇼, 각하.”
껄렁껄렁한 목소리의 마린 에리얼이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카리나도 딱히 싫은 기색이 없었다. 순순히 말 위에 올라탄 그녀를 보며 밀라이언이 애꿎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삼켰다.
마린 에리얼이 냉큼 말 위에 올라타더니 빠르게 말을 출발시켰다.
후다닥 도망가는 꼴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밀라이언의 눈에는 도둑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곧바로 제 말에 올라타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거, 먼저 저택에 가 있으면 안 됩니까?”
“네노…… 아니, 에리얼 자작 자네가 뭘 할 줄 알고?”
“주변 조금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애인이 친구랑 같이 있을 때 눈치 없이 남자가 자꾸 사이에 끼는 거 아닙니다. 미움받는 거 몰라요?”
카리나를 앞에 앉힌 마린 에리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카리나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꼴에 밀라이언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카리나?”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잖아요. 마린 말대로 먼저 가 계세요.”
“……카리나.”
“저 행렬이랑 같이 자작령을 한 바퀴 돌고 싶은 건 아니죠……?”
카리나의 손가락이 밀라이언뒤 를 쫓아오는 공작가 행렬로 향했다.
밀라이언이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스러움이 역력히 느껴졌으나, 그렇다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도 그대와 있고 싶어.”
“오늘 저녁에 같이 있을 거잖아요. 먼저 가요. 오는 내내 나 신경 쓰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잖아요.”
“잤어.”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는 걸 잤다고 하진 않아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의 말문이 턱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닌데, 틀렸다고 반박하고 싶다.
그녀가 숨을 들이켜는 밀라이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앞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린의 영지고 위험한 일은 없어요. 혹시 있더라도…… 알잖아요. 난 아마 괜찮을 거예요.”
“…….”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리나는 제가 내뱉은 단어가 그다지 그를 달래는데 좋지 못 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가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히자 이윽고 그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저녁을 먹기 전엔 들어가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래, 그대가 원하니 강요하진 않아. 자작저에 가서 기다릴게.”
“네, 조금 이따 봐요.”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나는 그를 보며 카리나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순순히 물러나는 밀라이언을 보며 마린 에리얼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바닷가 쪽으로 말머리를 힘껏 돌렸다.
“카리나, 너 진짜 대단하다.”
“뭐가?”
“난 각하를 제법 어릴 때부터 봤거든. 북부는 뭐…… 알다시피 제법 교류가 많아서. 각하가 꼬꼬마일 때부터 봤거든.”
마린 에리얼이 제 무릎께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만큼 키가 작았던 시절이라는 걸 표현하는 듯했다.
카리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때부터 뭐에 집착하는 일은 없었어. 부모를 제외하면 크게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의무는 있는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 느낌이었어.”
호탕하기 짝이 없는 마린 에리얼이 날카롭게 그의 과거를 분석했다.
과거가 들춰지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밀라이언이 듣는다면 그대로 검을 뽑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사이를 보면 알겠지만 대개 앙숙이면 앙숙이었지. 근데, 참 신기하단 말야. 말도 험했을텐데 도대체 저 인간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까지 한 거야?”
단출하게 진행된 결혼식에 마린 에리얼을 비롯해 북부의 가문들에서 이런저런 선물을 보냈다.
그 뒤로 사실 카리나와 마린 에리얼은 제법 편지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으음…… 그냥, 그 솔직한 면?”
“저걸 솔직함이라고 표현하는 너도 특이하기 짝이 없구나.”
가감 없이 제 생각을 내뱉는 마린의 말에 카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무언가를 계속 숨기는 사람보다는 뭐든지 호탕하게 털어놓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는 듯했다.
“어쨌든…… 최근의 각하를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지. 누군가를 위해 저렇게 헌신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바뀐 밀라이언은 북부의 군주로선 별로야?”
“아니, 좋아. 훨씬 인간다워서. 난…… 그러니까 우리는 대개 몬스터 토벌이나 사냥에서나 각하를 제대로 봤거든. 완전히 짐승 그 자체야.”
마린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녀가 고삐를 잡은 말은 무척 통제가 잘 되었는지 큰 흔들림도 없었다.
이윽고 새파란 바다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항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마린이 말을 멈췄다.
“짐승?”
“응, 넌 모를걸. 정말 적이었으면 꽁무니 빼고 도망가고 싶었을 거야. 자, 여기가 바다야.”
마린이 카리나를 붙잡아 말에서 내려오는 걸 도와주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말없이 수평선 너머로 향했다.
새파란 바다와 새파란 하늘이 겹쳐지는 중간이 마치 그러데이션처럼 보였다.
“……신기한 냄새가 나.”
“바다 냄새야. 좋지? 이 영지 안에선 어디에 있든 이 냄새가 매일 함께 하거든.”
마린 에리얼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체향과 가까운 냄새였다.
카리나가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 위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몇몇 개의 배를 눈에 담았다.
“……예쁘다.”
“그치!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곳이야. 해적 놈들이 가끔 귀찮게 하긴 하지만.”
마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묘한 울음 소리의 새와 일렁이는 파도, 종종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생명체까지 모두 그녀의 눈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코끝을 맴도는 옅은 소금 냄새와 눅눅한 바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밀라이언과 둘이 이 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저긴 모래사장. 맨발로 걸으면 기분 좋아. 괜찮으면 나중에 배도 태워 줄게.”
“배 위에서 그림도 그릴 수 있을까?”
“뭐……. 흔들리는 게 괜찮다면? 큰 배를 띄우긴 하겠지만 바다란 놈이 워낙 제멋대로여야지. 그래도 멀리 나가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사실 마린 에리얼은 카리나에게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려고 했다.
그런데 카리나의 시선에 오로지 바다만이 가득 담겨 있어서 쉬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카리나.”
“응?”
“너, 오래 못 산다는 얘기가 있던데. 진짜야?”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한껏 낮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물씬 느껴졌다.
카리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응.”
“……그렇군.”
담담하게 나온 대답에 마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천천히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씩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호기심에서 물어본 건 아냐. 하지만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물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혹시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지.”
“아냐, 숨길 마음도 없었고.”
주어진 생명에 끝이 있다면, 적어도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은 그 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리나가 밀라이언과 제법 오랜 시간 이야기해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준비가 필요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뿐이다. 동시에 멀어질 시간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슬픔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감당하라고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쿨하다니까.”
손을 뻗은 마린이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칭찬이라도 하는 듯한 그 손길에 카리나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근데, 너 뭔가 재밌는 냄새 난다?”
“재밌는 냄새?”
“뭐라고 해야 하지……”
마린이 카리나의 목덜미에 코를 묻곤 한참을 킁킁거렸다. 마치 짐승이 주인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 집 개가 얼마 전에 새끼를 뱄는데, 그거랑 비슷한 냄새가…… 나네……?”
“……개?”
“어, 아니. 미안. 네가 개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괜히 후각이 좋아서.”
마린이 더듬더듬 입을 열어 변명했다.
“우리 부모님은 에리얼 가문의 후계자라면 오감이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 취미가 눈 가려 놓고 냄새 맞추게 하는 거였거든.”
“아…….”
독특하기 짝이 없는 부모님이다. 그러나 말하는 내내 마린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그만큼 다정했던 부모라는 얘기겠지.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새끼를 밴 짐승은 그런 특유의 냄새가 있거든.”
마린이 두 손을 허공에 이리저리 내저으며 말하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말해도 당황한 상태에선 정상적인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그러니까…… 너 임신했어?”
“……마린, 대단하다. 약간 무서울 정도로.”
카리나가 멍하니 대답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팽과 진찰을 했던 윈스턴 그리고 밀라이언과 자신 정도일 것이다.
페리얼이 아는지는 모르겠다. 윈스턴이 페리얼에게 임신 사실을 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마린 에리얼이 전해 들었을 리는 없다는 거다.
“아, 역시. 그 꼬꼬마였던 인간 이……. 허! 감회가 새롭다 못해 조금 놀라울 정도네.”
마린이 입술 사이로 헛웃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카리나는 그녀가 눈치채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마린은 카리나가 아이를 뱄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발톱을 세우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응?”
“각하 말이야.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거든.”
“……그래?”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이자 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듯했지만 묘하게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공작저에서 열렸던 작은 연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축하해, 카리나. 내가 부디 처음으로 널 축하해 준 타인이었으면 좋겠군.”
“친구 중에선 네가 처음이야.”
카리나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조금 어색했지만, 다행히 마린은 그런 망설임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거 좋은데? 그리고 우리는 이만 돌아가야겠네.”
새끼를 품은 짐승은 수컷이건 암컷이건 날카롭기 그지없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밀라이언을 생각하면 조금 더 골려 주고 싶긴 했지만, 카리나를 생각하면 빠르게 돌려보내는 게 맞을 듯했다.
“각하보단 널 많이 닮았으면 좋겠는데.”
마린이 아까보다 한층 더 조심스럽게 그녀를 말 위에 태우며 말했다. 카리나가 순순히 말에 자리 잡으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정말로 밀라이언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흑마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 밖에 밀라이언이 퍽 초조한 기색으로 제자리에서 벌처럼 8자를 그리며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는 건 굳이 비밀로 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린 에리얼이 박장대소를 한 것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