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
>15 화>
“내가 싫다고 하면 아픈 동생한테 짐이 넘어갔을 테니까요.”
“약혼은 당연히 내가 거절했을 거다.”
“아뇨, 그것 말고도…….”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여는 첫 다과회인데, 아픈 동생이 전부 하긴 힘들잖니. 동생은 처음이고 서투니까 네가 도와주렴.”
“카리나, 페르던과 아벨리아의 첫 사교계 데뷔이니 네가 곁에서 많이 도와주거라, 알았느냐?”
당연한 일이었다는 걸 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동생을 도와주는 형제자매도 많이 있으니까.
싫다고 할 수 없었다, 기대감 짙은 두 동생과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는 부모님 앞에서.
“왜 말을 하다 말아?”
“……으음,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어요.”
괜한 치졸함이라고 할까 봐 조 금 두려워진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찾은 휴식처에서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치를 보고 싶진 않았다.
“실없기는.”
밀라이언이 가벼이 대답했다.
“싫어하는 음식은?”
툭 던져진 물음에 카리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대답이 들리지 않자 밀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없나?”
“……기름진 음식은 맞지 않는 편이에요.”
“생긴 것만큼 말랑한 걸 좋아하는군.”
키득거리는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멈칫했다.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도르르 굴렸다.
카리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기적거리자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테라스에 준비된 둥근 식탁에 앉았다.
“앉도록 해, 식사는 곧 준비될 테니까.”
늘 그녀는 빼고 돌아가는 듯했던 백작저 위 식탁과는 다르게, 밀라이언은 카리나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을 애써 무표정으로 감추려 애쓰며 밀라이언의 앞자리에 앉았다.
* * *
밀라이언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테라스에는 투명한 돔으로 된 유리가 둘러싸여 있어서 바깥을 구경할 수 있으면서도 찬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각하, 이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카리나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테라스를 둘러싼 투명한 돔을 가리켰다.
유리로 된 돔의 윗부분은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어서 오색 빛깔이 찬란하게 아래로 드리웠다.
“유리로 만든 돔이다. 이곳은 겨울에 눈이 오면 풍경이 무척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나가서 먹기에는 날씨가 무척 추워서. 북부의 기술자들이 고민 끝에 생각 해 낸 거지. 관리를 잘해 줘야 하지만.”
밀라이언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시사철이 무척 맑은 레오폴드 백작령에서는 겨울도 그리 춥지 않았다.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한파가 불어 닥치거나 눈이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눈은 언제쯤 내리나요?”
“이르면 내달 초나 늦으면 말 쯤? 하지만 올해는 유독 날이 추운걸 보니 나는 내달 초로 내다 보고 있어.”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가 싫지 않다.
오징어처럼 질질 끌려 다녔던 때보다야 훨씬 좋았다.
“음식이 식겠어. 얼른 먹도록 해.”
밀라이언의 재촉에 그녀가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의 종류는 무척 다양했는데, 튀김 요리와 찜, 볶음 요리 등 다양했다.
카리나의 앞쪽에는 최대한 기름 지지 않은 종류의 음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밀라이언이 시종이 내려놓는 음식을 하나하나 참견해서 어디에다 두라고 명령을 한 덕분이었다.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느껴지는 배려에 그녀가 작게 웃었다.
“설마 식기를 잡다가 피를 토할 정도로 약한 건 아니겠지.”
“그 정돈 아니에요.”
그녀가 발끈 고개를 치켜들며 포크를 쥐었다.
버릇처럼 샐러드로 향하려던 포크의 끝을 멈추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배려해 주고 생각보다 다정하다.
‘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생각했어.’
카리나가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표정을 했다.
스스로의 생각이 짧았다는 건 인정했다.
이러다 이곳에서 정말 생을 마감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피해는 밀라이언이 고스란히 받게 될 거다.
“식사가 입에 맞지 않나?”
밀라이언이 음식에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은 카리나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젓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들곤 밀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각하.”
“그대가 내 부하야? 그냥 밀라이언이라고 불러도 돼. 리언이라고 불러도 되고.”
“……아, 네.”
그녀가 눈동자를 굴렸다.
이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카리나는 그것이 못내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그녀로선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갑자기 왜 불렀나?”
둥글게 눈꼬리를 휘자 남자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단단한 무인에서 장난이 그득한 한량으로.
카리나가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죄송해서요.”
“죄송?”
“……어쨌든 상황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찾아왔으니까요.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오겠다고 하면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당연하지.”
밀라이언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온 대답에 그녀가 탁자 아래로 내린 손을 꼭 쥐었다.
“내가 그대를 싫어해서도 귀찮게 여겨서도 아니야. 단순히 위험해서 그런 것이니 첫날 내가 한 말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마. 게다가 사과는 이미 그때 한 번 하지 않았나.”
“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가지고 있는 병에 대해서 말을 하는 편이 좋을까?
카리나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말을 해도 상황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최악은 그가 레오폴드 백작가에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식사 맛있게 하겠다고요.”
말끝을 붙잡은 밀라이언에게 카리나가 적당한 말을 덧붙였다.
“그대는 정말 싱거워.”
밀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추궁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다음부턴 그대가 들기 편한 음식도 다양하게 준비하라고 이를 테니 얼른 들지 그래? 이러다 주방장이 울겠어.”
“네? 아, 네.”
밀라이언의 재촉에 카리나가 다급하게 포크로 찜기에 쪄서 나온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
카리나가 눈을 홉떴다.
“맛있나?”
“네, 무척이요.”
“르버에게 전해 주지.”
밀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샐러드 외에도 먹을 만한 것이 무척 많아서 그녀는 드물게도 다양한 음식에 손을 옮겼다.
오랜만에 배가 불렀다. 카리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밀라이언은 종종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카리나는 흠칫 놀라면서도 그의 말에 신중하게 답을 했다.
어쩌면 그녀가 줄곧 바랐을, 별 것 아닌 대화가 오가는 짧은 식사 시간이었다.
* * *
“도대체 그대는 생각이 있어? 없어!”
잔뜩 일그러진 밀라이언의 노성을 들으며 카리나가 귀를 틀어막았다.
잔소리라고 툴툴댈 수 없는 것은, 엄연히 이번에 잘못한 것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온몸에 이불이 둘둘 감싸져서 무슨 도롱이처럼 되었다.
두툼한 이불 밖으로 볼록 튀어 나온 것이라곤 카리나의 얼굴과 손뿐이었다.
“죄송해요.”
“차라리 얼음이 되고 싶었다고 말을 해. 아예 욕조에 얼음을 들이 부어 줄 테니까.”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으르렁거리듯 한껏 사나워진 밀라이언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리나가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슬쩍 풀어진 채라서 포르르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지는 못했다.
지금껏 이런 종류로 혼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보니 생소하고 무척 신기하면서도 속이 간질간질 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흐물흐물 풀어진 카리나의 입매를 보며 밀라이언의 눈썹이 쓱 치켜 올라갔다.
“웃음이 나와?”
스산한 목소리에 그녀가 냉큼 입매를 굳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제 결백을 증명하는 듯한 모습에 밀라이언이 헛웃음을 흘렸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주 인간 난로가 되지 그러나. 연료비도 아끼고 좋겠군.”
“각하 추우세요?”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매섭게 치켜뜬 밀라이언의 눈을 마주 본 카리나가 눈에 힘을 준 채 고개를 저었다.
도롱이처럼 얼굴만 쏙 튀어나온 사람이 고개만 도리도리 젓고 있으니 무척 우스운 꼴이었다.
카리나가 밀라이언 공작의 저택에 온 지도 열흘째였다.
사실 와서 일주일을 앓아 누워 있었으니, 저택을 둘러보는 것도 겨우 3일째라는 얘기였다.
그나마 첫날은 식사가 끝나는 즉시 방으로 돌려보낸 공작 덕분에 자유롭게 운신하게 된 것은 이틀째 였다.
요는, 오늘 아침 일찍 해가 뜨는 것을 보겠다고 로브 한 장만 걸치고 지붕으로 올라가 그림을 그린 카리나의 행동이 문제였다.
본래 지붕에 올라가기 전 밀라이언과의 약속이 있었다.
첫째는 반드시 밀라이언이나 집사, 팽에게 말하고 갈 것.
둘째는 옷을 두툼하게 입을 것.
마지막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지붕에서 내려와 몸을 녹일 것이었다.
문제는 카리나가 마침 눈을 떴을 때는 저택은 아직 조용해서 누군가를 깨우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져온 옷이 없어서 두툼하게 걸칠 것도 없었으며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략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도 저택이 소란스러워질 때까지 네 시간가량을 지붕 위에 웅크린 채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것은 밀라이언이었다. 식사 권유를 하기 위해 방을 방문한 밀라이언은 지붕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그녀를 발견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그대로 카리나의 뒷덜미 를 낚아채 지붕에서 끌어 내린 것이 이 결과였다.
도롱이를 물려고 할 때마다 노려보는 밀라이언 덕분에 카리나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이불에 꽁꽁 싸매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