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0)
>외전 6화>
여러모로 곤란하기 짝이 없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카리나는 지금 예정일이 너무 가까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지금 아무 데도 못 가. 당장 다음 달이 출산 예정일이야.”
“드래곤은 마법을 쓸 수 있지. 순간 이동 정도라면 문제가 안 돼. 수도에 저택이 있나?”
“……그런데?”
“잘됐군. 여관 생활도 질린 참이거든. 헤르타도 퍽 싫어하는 것 같고. 신세 좀 지도록 하지.”
아지다하카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말에 밀라이언이 헛웃음을 삼켰다.
대체 눈앞의 인간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밀라이언의 혈관이 한층 툭 튀어나왔다.
“……죽고 싶나?”
“자네가 날 죽일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도 없겠군.”
아지다하카가 놀랍다는 눈으로 박수를 쳤다.
놀리고 있는 것이 명명백백했다. 그가 한참 만에 얼굴을 벅벅 문지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수도.”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돼. 소음이 문제면 조용한 곳으로 가면 되는 일이니까.”
카리나의 목소리를 가로챈 밀라이언이 냉큼 말했다.
카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혹여나 백작가 사람들과 마주칠까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가는 편이 좋았다.
“그럼 준비가 다 끝나면 말하는 걸로.”
아지다하카가 성큼성큼 빈방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제 집을 헤집고 다니는 줄 알았다.
불쾌한 듯 아지다하카를 노려본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그대에게도 문제는 없을 거야. 저놈 멱살을 붙잡아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주지.”
밀라이언의 의기양양한 말에 카리나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그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미 제법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은 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단단한 가슴이 퍽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 * *
아지다하카의 도움을 받아 수도로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출산일이 다가왔다.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동시에 무척이나 생경하면서도 경이로웠다.
그러나 두 번 하라고 한다면, 솔직히 카리나는 지금으로선 자신이 없었다.
“으아아아앙! 으아아앙!”
터진 울음소리를 들으며 카리나가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산파가 그녀의 품에 아이를 안겨 주자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쪼글쪼글한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던 카리나는 말없이 입을 벌렸다. 제 배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 아이를 품고 있었구나.’
이 감정은 단순히 벅차오른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말로도 생각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품에 안기는 따뜻한 온기가 아이의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카리나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인가 다시 눈을 뜨기 위해 일부러 눈에 힘을 줬지만 쉽지 않았다.
눈꺼풀에 무슨 무거운 추라도 달린 듯했다.
“피곤하시면 주무세요, 마님. 아이는 각하께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산파가 카리나의 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아이를 데리고 가 부드러운 하얀 천에 돌돌 감쌌다. 멀어져 가는 아이를 보며 카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으아아아앙!”
또다시 터진 울음소리에 카리나가 손가락을 꿈틀거렸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조금 더 안아줘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카리나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며칠이 꼬박 지난 후의 일이었다.
중간 중간 깨서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다시 잔 기억은 있지만, 대개의 시간을 잠만 잤기 때문인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땐 오랜 시간 잠을 잔 까닭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온몸은 젖은 듯 무거웠다.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잡아 올린 것은 마지막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나 싶었는데.’
머리로 생각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아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카리나는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리나?”
“……이…… 라이…… ㅇ…….”
목소리가 잔뜩 쉬었는지 가라앉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리나는 몇 차례 애꿎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인 입 모양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물. 일어날 수 있겠어?”
밀라이언이 그녀의 등을 제 팔로 단단히 받쳐 주며 조심스럽게 앉혔다.
허리와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물을 몇 모금 마신 카리나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아이는요?”
“그대의 뒤쪽에.”
“……왜 여기에 있어요?”
“그대가 옆에 없으면 울어. 내가 안아 주면 잠깐 괜찮았다가도 또 멀어지는 것 같으면 울더군.”
밀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밀라이언이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가 카리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동자가 그대를 닮았더군.”
“저를요?”
“그래. 양쪽 눈 색이 다른 건 처음 봤는데…… 전부 그대의 색이야.”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버석버석한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깃털처럼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카리나가 가볍게 그의 볼에 입맞춤을 했다.
“머리카락은 밀라이언을 닮았는데요.”
“그렇더군.”
드문드문 보이는 남색 머리카락에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오동통한 볼을 슥슥 쓰다듬었다.
아이가 칭얼거리듯 몸을 움직이더니 이윽고 눈을 번쩍 떴다.
왼쪽의 황금색 눈동자와 오른쪽의 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아이가 무언가를 찾는 듯 양손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좌우로 움직이는 짤막한 팔을 카리나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아 봐.”
“……다칠 것 같아요.”
“그런 걸로 따지면 내가 더 심했어. 잘못 잡으면 부서질 것 같아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생각 보다 너무 가벼워서 그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봐야 했다.
“참고로 여자아이야.”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가 소리에 예민한 건 맞는 것 같아. 조금 냄새가 나는 것도 못 참는 모양이고.”
“……그래요?”
“그나마 우리들 목소리는 익숙해졌는지 울지는 않지만. 그래서 일단 이쪽으론 팽 이외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아 뒀어.”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고 하던데. 그 감각이 그녀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하도록 노력해야지.’
실제로 아이는 카리나가 조금 움직이거나 밀라이언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예민하게 귀를 쫑긋거리며 칭얼거렸다.
밀라이언과 카리나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말이다.
카리나가 아이를 침대에 눕힌 채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아이의 귀를 막아 주었다.
아이의 눈이 조금 커진 듯했다.
“이렇게 하면 조금 조용하려나?”
작은 아이가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화악, 밝아진 아이의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에 밀라이언과 카리나의 눈이 놀라움에 젖어 들었다.
“웃는 건 처음 보는데. 그대가 귀를 막아 준 게 좋았나 보군.”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는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족쇄라고 깨달은 후부터 황금빛 눈동자가 그다지 달갑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아름다웠다.
아이가 품고 있는 색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카리나가 미소 지었다.
“……정말 신기해요.”
“뭐가?”
“아이요. 그냥, 내가 엄마가 됐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요.”
이 작은 생명체가 제 배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밀라이언과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꿈만 같은데 이 품에 아이까지 있다는 것은 더욱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정했어요?”
“아이의 얘기를 전해 듣곤 페리얼이 가지고 달려왔어.”
“페리얼이요?”
“그래, 세레누스 (Serenus) 는 어떠냐고 하더군.”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이자 밀라이언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아이가 사는 세계가 소음이 아니라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함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더군. 아이의 시간이 빛나길 바란대. 여러 모로 말이야.”
“쓸데없는 전쟁이나 싸움도 없이 말이죠?”
“그래, 언제나 쓸데없이 이상적인 놈이야.”
그러면서도 이렇게 전해 준 것을 보니 밀라이언도 그다지 싫지 않은 듯했다.
‘세레누스 페스텔리오’라.
약간 중성적인 어감이긴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좋네요. 밀라이언이 괜찮으면 저도 좋아요.”
“나야 언제나 그대의 마음에만 좋으면 좋지.”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을 보는 아이의 눈이 퍽 다채롭게 반짝여서 카리나가 슬쩍 그를 밀어내곤 아이를 품에 안았다.
“잘 부탁해, 세레누스.”
카리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행히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저도 마음에 든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애칭은 세렌이 좋겠는데.”
“좋네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품에 안자 아이가 꼬물꼬물 그녀의 품으로 파고 들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꾸벅꾸벅 다시 졸기 시작하는 아이를 바라보던 카리나가 밀라이언과 눈을 마주친 채 소리 없이 웃었다. 따뜻한 햇살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내리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