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2)
>외전 8화>
“아, 밀라이언.”
“이런, 낮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더니 둘 다 깨어 있는 줄은 몰랐군.”
밀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하게 망토를 벗고 재킷을 내려 둔 밀라이언이 느릿하게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렌의 코가 움찔거리며 두어번 움직이더니 이윽고 밀라이언에게 양팔을 내밀었다.
“빠아아!”
“안녕, 세렌.”
나직한 목소리에 세렌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건넨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테이블을 훑었다.
“손님이 왔었어?”
“으음…… 네.”
카리나가 슬쩍 고개를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곤란한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밀라이언의 표정이 순간 묘해지더니 미간이 좁아졌다.
“페리얼은 아니겠지.”
“…….”
“카리나, 페리얼이 여기에 왔었어?”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왔었어.’가 아니라 ‘아직 있어.’ 라고 대답하면 씻고 있는 페리얼의 목 밑에 검이 쇄도할 것 같았다.
“세렌이 보고 싶다고 해서.”
“……죽이고 오지.”
“아니, 세렌 이름은 페리얼이 지어 줬는데 왜 못 보게 하는 거야?”
“변태 같아서.”
밀라이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팽과 윈스턴은 별다른 사심 없이 그저 손주를 보는 마음으로 아이를 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크게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를 안아 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도 아니다.
물론, 팽은 세렌에게 죽고 못 사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페리얼은…… ‘품에 안고 볼을 꼬집어 보고 만져 보고 조물조물해 보고 싶어!’라는 의지가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변…… 태요?”
“몰라, 그놈은 예전부터 뻔뻔하기 그지없었다고. 언제 세렌을 데리고 몰래 도망 나갈지 몰라.”
“그러진 않을 거예요.”
밀라이언의 어린아이 같은 말에 카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나저러나 두 사람은 여러모로 사이가 좋았다.
아마 곤란한 상황이 있을 때 밀라이언에게 가장 먼저 의지할 대상은 페리얼일 것이다.
“밀라이언에게 페리얼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면 화낼 거예요?”
“무슨 소리야?”
밀라이언이 세렌을 품에 안은 채 카리나의 맞은편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기댈 상대가 있다는 건 중요하 잖아요.”
“그러고 보니 마린 에리얼이 수도에 오겠다고 난리더군.”
“마린이요? 왜요?”
“아이가 보고 싶대.”
“아…….”
그러고 보니 너무 뜬금없이 떠나왔었지.
연락이고 뭐고 하지 못하고 아지다하카의 능력으로 수도까지 옮겨왔으니……. 여러모로 당황 하지 않았을까 싶긴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와요?”
“안 된다고 하긴 했는데……. 그 성격이면 이미 오고 있을 것 같군.”
밀라이언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렌이 눈을 깜빡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쫑긋거리는 귀를 보아하니 아마도 페리얼이 돌아온 듯했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카리나가 그대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밀라이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카리나, 제가 돌…….”
기대감에 찬 페리얼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꺄아아!”
세렌을 제외하면 방 안엔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한 번 바라봤다가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려 페리얼을 바라봤다.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가 가볍게 아이의 귀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막아 주며 페리얼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죽고 싶나 보지?”
더없이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내뱉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귀를 막았으니 세렌의 눈에는 어쩌면 다정한 제 아버지의 얼굴만 보일지도 몰랐다.
“……자넨 대체 왜 여기에 있나? 눈치 없는 놈.”
“남의 집 멋대로 쳐들어온 네가 할 말인가?”
“못할 건 또 뭐야. 너도 심심하면 내 집 쳐들어왔잖아.”
페리얼이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두 사람의 얼굴은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표정만 보면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래, 차라리 마침 잘됐네. 나 여기 며칠 있으려고.”
“뭐……? 미쳤어? 안 꺼져?”
“……카리나, 정말 밀라이언 말 너무 험한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프네요.”
페리얼이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 내는 듯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밀라이언의 잇새로 으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될까요, 카리나? 밀라이언 없을 때 세렌이랑 놀까 하는데…….”
축 처진 목소리로 페리얼이 말했다.
“아니면 오늘 놀 수 있으면 돌아가도 괜찮겠지만요.”
카리나를 힐끗거리며 덧붙인 페리얼의 말에 밀라이언이 헛숨을 들이켰다. 저놈이 제대로 작정했다는 것이 물씬 느껴졌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저랬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쫓아다니곤 했다.
비단 밀라이언, 자신에게만은 아니었다. 페리얼은 여러모로 끈기가 강한 놈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성적에 관해서 대놓고 교수와 지식 배틀을 벌일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그는 물러날 수 없는 선을 정해 놓고 그 이상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 선 직전까지는 얼마든지 물러나 주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밀라이언은 지금 이것이 페리얼의 마지막 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귀찮아지겠는데.’
여기서 놈을 쫓아내는 건 간단하지만 그 이후가 더 귀찮아질 것이다. 밀라이언이 물끄러미 페리얼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나랑 싸울 거야?”
밀라이언의 질문에 페리얼이 고개를 기울였다.
“인내심 싸움이라면 자신 있는데.”
빙긋 웃는 페리얼의 말에 밀라이언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그가 세렌을 앞으로 내밀자 페리얼이 냉큼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왜 나한테 안 보여 주려고 했던 거야?”
“……아.”
“뭐?”
“세렌이 너무 귀엽잖아. 그리고 넌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고.”
세렌을 품에 안은 채 동실동실 흔들던 페리얼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차마 믿기지 않았던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페리얼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쉼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윽고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네, 진짜 변했군.”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팽에게도 윈스턴에게도 몇 차례나 들었던 말이다.
밀라이언이 페리얼을 못마땅하게 한 번 힐끗 보고는 이내 팔짱을 꼈다.
“뭐 문제 있나?”
“아니.”
페리얼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기특한 아이라도 지켜보는 듯한 그 미소에 밀라이언이 퍽 떨떠름한 시선을 했다. 그가 이내 한숨 을 푹 내쉬었다.
“그냥 기뻐서. 자네가 아버지라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거든.”
아이를 품에 안기 전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카리나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렌은 페리얼의 품에 안겨도 칭얼거리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처음 안겨 보는 품이 신기한 듯 그의 옷자락을 이리저리 당기며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정말, 아버지가 되었군.”
페리얼이 세렌의 이마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두 친우의 모습을 쏙 빼닮은 아이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전하지 못한 사랑은 결국 스러져갔지만 그다지 후회는 없다.
제 행복보단 두 사람이 행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축하해.”
페리얼이 제법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입술 밖으로 뱉었다.
언제나 혼자 다니는 것을 즐기던, 까칠하고 혈기왕성했던 친우는 벌써 저 멀리 앞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행복해 보여서 기뻐.”
페리얼의 진심 어린 말에 밀라이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랜 과거라도 떠올리는 듯 잠시 멀어져 갔던 페리얼의 시선에 빛이 다시 돌아왔다.
페리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밀라이언의 품에 아이를 돌려주었다.
“아이를 한 번 안아 봤으니 됐네.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페리얼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더 놀려 줄 마음이었지만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저 아주 조금 부러운 마음이 치고 올라왔을 뿐이다.
“페리얼.”
“음?”
“자주는 안 되겠지만 종종 보러 와도 돼.”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어릴 때로 돌아간 듯 퍽 짓궂은 미소를 띤 채 그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그거 영광이군.”
몸을 돌려 빠져나가던 페리얼이 문 밖에 선 채 가만히 손을 내려 다봤다.
닿았던 온기가, 들려왔던 심장 소리가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심장에 전기가 통한 듯 아팠다.
“……어른이 되어 가는 건가.”
아카데미의 시절은 제법 멀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아이를 보는 것은 새삼 기분이 남달랐다.
제 앞길을 살아가는 것에만 급급했던 친구가 조금씩 앞서가고 있었다. 자신이 따라가기엔 아마 한참 멀었겠지만.
적당히 생각을 마친 페리얼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저택의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