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3)
>외전 9화>
계단 아래에서는 벽에 기댄 윈스턴과 그 옆에 선 팽이 제법 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페리얼이 계단을 몇 개 내려가자 두 사람이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세렌 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응, 귀엽더군.”
팽의 말에 페리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긴 귀여웠다. 아이는 제 부모의 외모를 그대로 쏙 빼닮아서 아마 크면 제법 이성을 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둘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이 나이에 서로 대화를 나눌 상대가 그리 많진 않으니까요.”
“대개 제 하소연을 윈스턴이 들어 주는 편입니다.”
윈스턴의 대답에 팽이 말을 덧붙였다. 페리얼이 어깨를 으쓱이곤 몸을 돌렸다.
윈스턴이 그의 뒤를 쫓아오려 하자 페리얼이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급한 일도 없으니 오랜만에 회포나 풀도록 하게.”
윈스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페리얼이 묘하게 힘이 없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였다. 나이가 드니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만 생긴 것이 영 문제였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어른이 된 친구를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군.”
윈스턴의 물음에 페리얼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팽이 곁에서 윈스턴을 바라봤다. 페리얼에게 시선을 고정한 윈스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여튼 착해서 탈이군.’
사람의 곤란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제자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건 평생 말하지 못할 비밀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싶으십니까?”
윈스턴의 물음에 페리얼이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만 동떨어진 기분이라서.”
“어른이 되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이를 낳거나 나이를 먹거나 늙어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페리얼이 윈스턴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윈스턴이 옅게 웃었다. 그의 눈에 페리얼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곁에서 돌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떠나려고 하면 이미 오래전에 떠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럼 난 어른이 아닌 건가?”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보고 그걸 인정하고 체념해야만 하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는 아이도 있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에서 머무르는 성인도 있습니다.”
윈스턴의 나직한 목소리에 페리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자는 이해했지만 전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윈스턴은 페리얼의 시선에서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이어서 입을 열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잃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아픔을 겪고 수많은 실패를 하고 겨우 한 번의 성공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에게 조언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지.”
“그러니 조급해할 것 없습니다. 누구도 당신이 멀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윈스턴의 말에 페리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괜한 조급증과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늘 곁에 있었던 친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는 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각하, 페스텔리오 각하와 카리나 아가씨는 급하게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덧붙이는 윈스턴의 말에 페리얼이 얼굴을 굳혔다. 그가 이윽고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 저는 아직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초조해하지 않아도 언젠가 어른이 될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당신은 상냥한 분이니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페리얼이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울적한 기분은 하루 이틀 더 가겠지만, 그래도 윈스턴이 한 말 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멀어지는 페리얼을 보며 윈스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지켜보던 팽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윈스턴,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상냥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은데.”
“이쪽도 그런 척을 하는 것뿐이지. 나도 아직 멀었네.”
윈스턴이 한층 가벼운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던 이도 대화를 나누고 익숙해지다 보니 여러모로 편해졌다.
윈스턴이 다시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고용주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오늘 밤은 한 잔 기울여도 되는 건가?”
“……언제는 잔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는군.”
“자네가 매번 한두 잔 마시고 일이 있다며 도망가지 않았나.”
팽의 타박에 윈스턴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반박할 수가 없긴 했다. 까놓고 도망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팽은 생각보다 노련했고 주량도 셌으며 뭣보다 운동신경도 제법 이었다. 윈스턴으로선 솔직히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럼 오늘 밤도 한잔해야겠군. 며칠 할 말이 많았거든. 일단 내 방에 가 있게. 뒷정리만 하고 갈 테니.”
“어차피 세렌 아가씨의 자랑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윈스턴은 순순히 그의 말에 수긍하곤 몸을 돌렸다.
익숙하게 방을 찾아가는 윈스턴을 보며 오늘 밤 수다를 떨 상대를 찾은 팽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수도에는 최근 신예 화가 하나가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페리얼 가문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화가 ‘카리나’라는 존재였다.
그녀는 작품을 자주, 많이 내진 않았으나 꾸준했고 그것은 첫 경매 때 가격의 열 배까지 치솟을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카리나’의 작품을 소유 하고 있는지가 사교계에서 제법 큰 화제가 된다는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카리나’의 작품 모으기에 대한 눈치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이 가지고 있는 귀족은 그만큼 콧대가 높아졌고 가지지 못한 귀족은 그저 소외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의 작품은 독특한 화법과 대담한 화풍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데도 눈길을 사로잡는 묘한 채색법으로 사람들을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대개 풍경화였다.
이따금 사람이 나올 때가 있었지만 아주 멀리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근 경매에 나온 그림에선 수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듯 한 풍경이 있었기 때문에 한창 ‘화가 카리나’에 대한 얘기는 뜨거운 감자였다.
아무래도 그 화가가 수도에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었다. 화가는 한 명이고 수요는 상당했으니 가격이 치솟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오죽하면 페리얼 가문에 흘러 들어오려는 뒷돈의 수가 너무도 많아서 페리얼이 크게 화를 냈을 정도다.
한 번 더 뒷돈 얘기가 들려오면 그 가문은 무조건 경매 참여자 명단에서 제외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다행히 그 덕분에 뇌물로 인한 걱정은 완전히 줄어들었다.
레오폴드 백작가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카리나 레오폴드의 죽음 이후 칩거에 들어간 지 무려 1년 반 만이었다.
장녀가 죽고 칩거에 들어간 레오폴드 백작가는 사교계에 두문 불출했다.
레오폴드 백작은 집에서 일을 처리했으며 황실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쌍둥이와 레오폴드 백작 부인은 아예 사교계에 발길을 끊었다.
그나마 꾸준히 나오는 것은 인프릭 레오폴드뿐이었는데 그는 언제나 훈련과 맡은 업무만 하곤 집으로 곧장 돌아가곤 했다.
그 덕분에 그들은 1년이 넘어서야 ‘카리나’라는 화가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쌍둥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인프릭과 레오폴드 백작은 그 ‘화가 카리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1년 반 만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인프릭이 달려와 레오폴드 백작에게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살아 있다고……?”
“네, 최근까지 낸 작품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프릭이 1년 전에 비해 한층 더 살이 빠지고 주름이 짙어진 레오폴드 백작의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여전히 그는 나이보단 젊어 보였지만 드문드문 노쇠하고 피로한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페스텔리오 공작 역시 수도에 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카리나도……. 보러 가시겠다면 채비하겠습니다.”
인프릭의 물음에 레오폴드 백작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아이에게 거부를 당한 것은 난생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그 이후 레오폴드 백작 역시 깊이 생각해 봤다.
아이의 외로움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아이의 방에서 자고 아이가 되어 그 방에서 나왔다.
그래 봐야 떠나간 것은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구나……. 살아 있었구나.”
짙은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로 레오폴드 백작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일그러져 엉망이 된 표정에는 지독한 후회와 괴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과 그러지 말라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살아 있다면 됐다.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괜찮았다. 그 아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됐다. 그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대로 두자꾸나.”
아이는 스스로 둥지를 떠났다. 새로운 둥지를 만들었다. 더는 오지 않겠다고 정한 것이다. 그것이 그 아이가 내린 벌이라면 마땅히 받는 게 맞다.
“우리가 더는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구나.”
“…….”
“카리나 레오폴드는 죽었다. 카리나는 이제 카리나로 살게 두자꾸나.”
스스로가 집안이 싫어서 성을 벗어던지고 나갔다. 뒤늦은 후회도 뒤늦은 사과도 전하기엔 너무 늦었을 거다.
그렇다면 그저 바라는 대로 살게 두는 것이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레오폴드 백작이 몇 번이고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지친 목소리가 안도감에 젖은 채 몇 번이고 흘러나왔다. 인프릭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신전에 갈 생각이다.”
“네, 일이 끝나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레오폴드 백작의 말에 인프릭이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날 이후, 인프릭은 가끔 부모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 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과연 좋은 부모가 되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인내하고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이겠지.
많은 것을 참고 배려해도 생각 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침몰 하는 배도 있는 법이다.
레오폴드 백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인프릭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소중한 여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제 아버지를 생각하면 서글펐다.
레오폴드 백작은 그날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신전에 가고 있었다.
기댈 곳이 필요했으리라고 인프릭은 감히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거대하고 견고했던 아버지에게도 지난 1년은 괴로웠던 시기였을 테니까.
집안 모두에게 그랬다. 쌍둥이들은 장난기가 사라졌고 어머니는 기운이 사라졌다.
‘……슬슬 나갈 시간이네.’
인프릭이 옷을 챙겨 입고 저택을 나섰다. 언제나 같은 크기의 저택이 오늘따라 한층 더 크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