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6)
>외전 12화>
사락, 뒤에서 들리는 천이 스치는 소리에 그녀가 예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색이 다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카리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세렌, 일어났니?”
“마아…….”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안아 달라는 신호에 카리나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세렌을 품에 안자 세렌이 포옥 품에 안겨온다.
“세레누스 님의 눈동자는 카리나 님의 눈동자를 고스란히 빼다 박은 것 같군요.”
“……음,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최근 유명한 화가 하나가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거 아시나요?”
칼란 신관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볍게 아이를 흔들며 등을 토닥여 주자 칭얼거 림은 금세 멈췄다.
세렌은 아무리 봐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어른스러운 듯했다.
“화가요? 어떤 화가요?”
“‘카리나’라는 이름의 화가라고 합니다.”
카리나가 뻣뻣하게 굳자 칼란 신관이 예의 온화한 미소를 만면에 띤 채 환하게 웃었다.
카리나는 슬쩍 시신을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 그 화가가 무슨 문제라도?”
“아뇨, 공교롭게도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이런저런 소문을 듣게 되지요.”
“무슨 소문인데요?”
“카리나라는 화가가 예술병을 앓고 있다거나…… 지금 수도에 와 있는 것 같다거나 하는 소문 말입니다.”
카리나가 칼란 신관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다지 적의가 있는 시선은 아니다. 그저 호기심이라는 건 카리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별생각 없이 가명을 쓰지 않고 같은 이름으로 낸 탓도 있으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뇨, 그 화가의 대단한 팬이라서요. 저도 경매에 참가해서 한 작품 낙찰을 받았거든요.”
“아…….”
카리나가 세웠던 날을 슬쩍 내려놨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녀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 사인 하나 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칼란 신관이 조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퍽 부끄러운 듯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카리나 그녀도 조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카리나 님의 그림은 신의 축복이 내려진 그림이더군요. 아름다웠습니다. 그 붓끝에서 펼쳐진 기적은 훨씬 더 아름다웠겠지요.”
칼란 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액자에 담긴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꺼내 왔다.
혹여나 흠집이 생기거나 색이 바래지 않도록 유리 상자와 같은 곳에 보관해 둔 것이 그가 정말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부끄러워지는 기분에 카리나가 볼을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칼란이 가져온 그림은 자신이 아직 예술병을 앓고 있던 때에 그렸던 초창기의 그림이었다.
“누군가가 구매한 그림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요.”
“어딘가 전시라도 해 놓고 싶은데, 솔직히 문제가 생길까 봐 무섭네요. 이런 그림은 두 번 다시 탄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카리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칼란 신관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가 유리 상자에서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하지만 유리 상자에 보관해 두기보단 그냥 전시해 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편이 그림의 본래 아름다움을 느끼기 좋거든요.”
시간이 흘러 색이 조금 바래더라도 그건 그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계산했다곤 할 수 없지만 그럴 것이라는 자신감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인은 해 주시는 걸까요?”
“칼란 신관께서 괜찮으시다고 하면요.”
“영광입니다.”
카리나가 그가 준 펜으로 캔버스 가장 아랫부분에 그리 크지 않은 사인을 했다.
칼란 신관이 무척 밝아진 표정으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 님께선 그림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시더군요.”
“아, 생각은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림을 망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일부러 남기지 않았다.
온전히 그림만을 즐겨야 할 때 갑작스럽게 화가라는 존재가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럼 제가 카리나 님의 사인을 받은 유일한 구매자겠군요.”
“그렇게 되네요.”
카리나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칼란 신관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그림을 유리 상자에 다시 넣지 않고 빈 의자에 올려 놓곤 다시 카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그림은 대단한 신력을 품고 있습니다.”
“……신력이요?”
“예술의 기적이라는 것 자체가 신이 내리는 축복이 아닙니까. 기적은 많이 봐 왔지만, 사실 저렇게까지 신력이 담긴 물건은 처음입니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손을 놨다. 만약 붓질 하나하나에 신력이라는 것이 담겨 있다면 그의 말이 맞겠지. 터지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그리고 세레누스 님을 감싼 신력도 제게는 보입니다.”
“……그렇겠죠.”
세렌은 정말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마력과 신력이 어우러져 태어나고 말았다.
그 탓에 드래곤의 예민함까지 물려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법 편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사랑스러우신 분입니다.”
“……고마워요.”
칼란 신관은 어쩐지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세렌이 어떻게 보이는지 의아할 정도다.
“세렌도 일어났으니 저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네, 세레누스 님과 카리나 님께 언제나 축복이 가득하기를.”
칼란 신관이 잍은 빛을 품은 손가락 끝을 세렌의 이마에 경건하게 가져다 댔다.
세렌의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까르르 웃으며 칼란 신관의 손가락을 냉큼 붙잡았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세레누스 님.”
칼란 신관의 인사에 세렌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곤 순순히 칼란 신관의 손을 놓았다. 카리나가 그 신기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하죠.”
칼란 신관과 신전 내 마차 정류소에 가니 기사 둘이 대기하는 것이 보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다음에 뵈어요.”
칼란 신관이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칼란 신관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손에 닿은 온기가 퍽 따뜻하다.
“칼란 추기경 각하, 접견이 끝나셨다면 제발 밀린 일 처리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칼란 디움 추기경이 퍽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좌하는 상급 신관의 표정 미묘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세레누스 님 때문입니까? 아니면 카리나 님?”
“둘 다입니다. 세레누스 님의 예민함에는 늘 경탄하지만, 카리나 님도 재밌는 걸 품고 계시더군요.”
스스로 신력을 막고 죽음을 미룬 듯했다.
그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가설을 몇 가지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신력과 상반되는 마력 쪽에 가까운 힘일 것이다.
“세레누스 님께서 신전에 들어 와 주시면 좋을 텐데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페스텔리오 공작은 제 것에 손을 뻗는 신경에 거슬리는 상대는 누구든, 설령 황실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아이는 자라면서 더욱 거대한 힘을 품게 될 것이다. 어차피 필연적으로 그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굳이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마력이 아이의 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신력을 억누르고 있지만 그뿐이다.
일주일에 한 번, 칼란 디움은 꾸준히 아이의 터져 나오려는 신력을 눌러 주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겐 별로 미움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상대가 품고 있는 호의를 굳이 적의로 바꿀 마음은 없었다.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건드려도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있다.
페스텔리오 공작은 건드려선 안 되는 쪽이었다.
“다만, 누가 이쪽으로 오는 편이 좋다는 조언을 했는지는 조금 궁금하군요.”
그냥 알았을 리는 없다. 처음 만났을 때 카리나 님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아이의 대부가 조언해서 오게 되었다고.
상대가 누구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칼란 디움이 카리나와 세레누스를 만나게 된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페스텔리오 공작가에서 제법 큰 기부금을 냈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서 일반 신관인 척 슬쩍 나와 본 것뿐이었다.
세레누스는 오는 내내 주변의 소음에 퍽 괴로웠던지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달래는 카리나의 얼굴은 어쩔 줄 몰라 보였다.
그나마 아이는 카리나의 품에서 만큼은 제법 편안해 보였지만.
아이의 주변을 어지럽히는 소음은 아이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다.
신력으로 인한 몸의 과부하를 견디기 위한 마력의 부작용이라고 봐도 옳겠지.
“알아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페스텔리오 공작가는 정보 쪽으론 너무 철저해서. 그리고 그 옆엔 칼로스 공작가도 있으니까요.”
알아봤다가 꼬리라도 잡히면 곤란해진다.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손을 대지 않는 편이 편했다.
칼란 디움이 오늘 받았던 사인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칼란 디움은 그림에 순식간에 반해 버렸다.
응축된 거대한 신력이 그림 안에서 나갈 때만을 기다리며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밥 많은 돈이 들었지만 사지 않았으면 도리어 후회 할 뻔했다.
그 신력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보지 못한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억지로 터뜨려 보라면 터뜨릴 순 있지만 또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그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 질지도 의문이었으니.
“하지만 아이에 대해 눈치채면 욕심내는 이들도 많겠습니다.”
“특별하신 분이니까요.”
“일거리가 많나요?”
“아침부터 접견을 핑계로 일을 전부 미뤄 둔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충분히 많습니다.”
타박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칼란 디움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설마 페스텔리오 공작의 팔불출이 그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 했지만.
“그러고 보니 세레누스 님의 생일이 곧이군요. 선물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기왕이면 그것이 그 대부라는 인물을 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칼란 디움이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교황 성하께선?”
“오늘은 온종일 기도만 드리고 계십니다.”
“그렇군. 저번처럼 너무 굶지 않으시도록 해.”
“네.”
신전은 결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감히 황실의 권위를 넘보지도 않고 서로의 선을 지켰다.
그것이 그들이 나름의 결정권을 유지하며 교황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사실 역대 교황들이 전부 그런 복잡한 걸 귀찮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권력에 욕심이 없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법이지.
“서류는 이쪽을 처리하시면 되고 황실에서도 문서가 몇 개 내려왔습니다. 협조 요청 같습니다만.”
“협조 요청?”
“불순한 종자들이 최근 제국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 같으니 황실에서 열릴 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합니다.”
칼란 디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가 안경을 꺼내던 손을 들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 그 이교도 건입니까?”
“네.”
“당장 결정하고 싶은 문제는 아니군요. 그 건은 마지막으로 미루겠습니다. 다른 것부터 처리하죠.”
“네, 알겠습니다.”
칼란 디움이 안경을 걸치고 가까이 있는 서류를 집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