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59)
>외전 15화>
* * *
“교황 성하.”
“싫어, 안 가니까 나가렴.”
새하얀 기도실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들린 축객령에 칼란 디움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교황이 어떤 식으로 나올 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마주 하는 것은 역시 피곤을 불러왔다.
“황실의 요청입니다.”
“네가 늘 잘 쳐 냈잖니. 내가 그런 하찮은 놀음까지 참가해야겠어?”
“사정이 좀 있습니다.”
돌려 말하기보단 직설적으로 입을 여는 칼란 디움의 말에 조각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있던 교황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꿀을 발라 놓은 듯 반짝거리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덕에 앞머리고 옆머리고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한 점의 더러움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얀 옷을 입고 있으나 눈빛만큼은 암울하고 어둡기 그지없었다.
교황의 황금빛 눈동자에 잠시 짜증이 스몄다가 사라졌다.
“예의 그 규격 외의 건이구나?”
“네, 카리나 님과 세레누스 님 도 강제로 참석하게 된 모양이라서.”
“이교도가 손을 뻗칠 걸 걱정하고 있네.”
교황이 무릎을 꿇었던 몸을 다리 힘만으로 가볍게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고 했다.
현기증이라도 인 것인지 가느다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칼란 디움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부축했다.
“식사는 언제 하셨습니까?”
“으음…….”
대답하지 않는 교황의 모습에 칼란 디움의 눈동자가 느리게 기도실 안을 훑었다.
음식이 거의 그대로, 손을 대지 않은 채 구석에 박혀 있었다.
칼란 디움이 그녀를 기도실에 있는 긴 나무 의자에 앉혔다. 교황이 피곤하다는 듯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교황 성하.”
“아……. 잔소리는 사양이구나, 칼란. 정말 귀엽지 못하네. 옛날엔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쪽 때문에 제가 변한 걸 좀 깨달으십시오. 어쨌든 싫으시더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내 소중한 아이가 부탁하니 들어는 주고 싶다만…….”
의미심장하게 말을 끌며 교황이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앞에 선 칼란 디움을 바라봤다. 옷차림 하나에도 감히 흠잡을 곳이 없다.
눈을 가늘게 뜬 교황이 이윽고 방긋 웃으며 손을 뻗어 칼란 디움의 멱살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잠……!”
자연히 칼란 디움의 허리가 숙어졌다. 옅은 남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팔 을 뻗어 넘어지지 않도록 의자 등받이를 붙잡은 그가 불만스럽게 교황을 바라봤다.
“하지만 분명히 가르쳐줬잖니, 칼란. 부탁할 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아.”
칼란 디움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교황을 내려다봤다.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부탁을 들어주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또 심술을 부릴 것이다.
그가 그대로 조금 더 몸을 숙여 고개를 살짝 비튼 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닫힌 입술 사이를 가르며 그가 천천히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가볍게 안을 훑으며 그녀의 혀를 옭아매고 제 쪽으로 빨아들인 칼란 디움이 느릿하게 그녀의 것을 놓았다.
길지 않은 짧은 키스 끝에 교황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 칼란 디움이 물러나며 숙였던 몸을 살짝 세웠다.
시선을 내리자 그녀가 퍽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칼란 디움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진득한 입맞춤 뒤의 경건하기 짝이 없는 행동거지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교황은 칼란 디움이 입을 맞췄던 손을 빼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80점.”
“……뭐가 또 점수를 깎아 먹었 습니까?”
“귀엽게 누님이나 누나라고 했어야지. 옛날엔 울먹거리는 눈으로 ‘부탁해요, 누나……’하고 잘만 불렀는데.”
머리가 커서 시커메졌다며 툴툴 불만을 토한다. 칼란 디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른 여자를 위해서 무릎을 다 꿇고. 질투해야 하나?”
“……당신께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세레누스 님은 평범하지 않게 자랄 겁니다. 꺼져 가는 불꽃을 마음에 담을 테고 평범하지 않은 걸 느끼고 평범하지 않은 걸 보겠죠.”
칼란 디움의 말에 교황이 딱딱한 나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깜빡였다. 가늘어진 시선이 칼란 디움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처럼 말이지?”
칼란 디움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신전에 들어와 제법 고생을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칼란 디움의 팔을 붙잡고 옆자리에 앉혔다.
“신의 사랑이란 인간에겐 참 잔인한 법이지. 감당할 수 없는 걸 내려놓고는 축복이라고 말해. 그러니 난 신을 사랑하지 않아.”
“교황 성하께서 하기엔 불경한 말이었습니다. 밖에선 언동에 주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 앞에서 일 저지르는 너랑 내 관계만큼 불경할까?”
교황의 뻔뻔한 말에 칼란 디움이 결국 말을 잃었다. 이 사람한테는 늘 자신이 휘둘리는 것만 같다.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꾹 문지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이 그걸 즐기지 않습니까. 해서는 안 되는 짓이나 배덕감에 흥분하는 당신만 할까요.”
“말투가 불손해졌다, 칼란.”
옆에 앉은 칼란 디움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뚱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어깨를 으쓱이는 칼란 디움을 본 교황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그런 나한테 발정 하는 건 너잖아.”
“……제발 좀 말투나 단어에 격식을 갖출 수 없습니까?”
“네 앞인데 굳이. 그리고 연회는 참가하겠다고 전해.”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칼란 디움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황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사람 앞에 나가는 건 질색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제 아이가 부탁했으니 들어주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식사 제때 안 하시면 한동안 얼굴 볼 일 없을 겁니다. 식사도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정말 귀엽지 않아. 어쩌다 저런 딱딱한 게 됐지.”
“당신이 날 살려서 주워 온 날부터 나도 당신 멀쩡히 살게 하겠다고 결정했으니, 후회할 거라면 시간 되돌려서 날 줍지 않는 것부터 하십시오.”
문을 닫고 나가며 남긴 칼란 디움의 말에 교황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시간을 되돌리면 그녀는 그를 살릴 것이다.
추운 겨울날, 맨발에 허름한 천 조각 하나 걸친 채 눈 위에 잠들어 있던 그 순간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 너구리 같은 영감을 봐야 한다니, 정말 끔찍한데.”
그래도 오랜만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다.
교황이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어 버린 음식을 가져와 입에 넣으며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카리나, 그냥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네? 아니, 준비 다 했는데요?”
“준비 다 하고 나니까 더 안 될 것 같아.”
밀라이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카리나가 미간을 좁히자 밀라이언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몇 차례나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가 퍽 심각해 보인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무슨 일 생겼어요? 그런 거면 안 가야죠.”
“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와 세렌을 내보낼 수가 없어.”
밀라이언의 심각한 표정에 아무래도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다. 밀라이언이 저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거니까.
“조금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 요. 어쨌든 무슨 일이 있는 거면…….”
“그대와 세렌을 누가 채 가면 어떡하지?”
“……예?”
“너무 꾸민 거 아닐까? 물론…… 그대가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만…….”
밀라이언의 심각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리나가 결국 말을 잃었다.
세렌이 태어난 후, 그는 정말로 이런 얼굴 붉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었다.
카리나가 말을 잃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이걸 상대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뭐라고 한마디를 해 줘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밀라이언, 당신 정말…….”
“미안. 하지만 진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야. 예뻐.”
밀라이언이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애정 어린 입맞춤에 카리나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돌렸다.
“당연히 예뻐야죠.”
“응.”
“밀라이언 모여 주고 싶어서 불편해도 꾹꾹 참은 거니까요.”
“…….”
밀라이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곤란한 듯 가느다래졌다.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이윽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러지 않아도 예뻐. 언제나, 그대가 유일하게 내게 감정을 주니까.”
“그래도 요즘 나가지 않았으니 전혀 꾸미지도 않았잖아요.”
“내 심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하지만 오늘은 좀 자제해 줘.”
휘어진 눈동자가 기꺼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밀라이언 역시 오늘은 제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이 흐트러짐이 없다. 황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개 이렇게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곤하겠지만 한두 시간만 버티는 거로 하자. 세렌, 미안하다.”
“빠앙!”
볼을 건드리는 밀라이언의 손가락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는 그다지 어두운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세렌이 얼마나 견뎌 줄지는 분명히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먼저 간다고 했죠?”
“응,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마중 나갈 테니까 걱정 말고 시간 맞춰서 와.”
“알겠어요.”
쪽, 그녀가 밀라이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세렌이 말똥 말똥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이내 저를 품에 안은 카리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아! 마아!”
“아, 그럼. 우리 세렌도 사랑해.”
카리나가 아이의 부드러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가 기어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 볼게.”
“네, 조금 이따 봐요.”
“응.”
밀라이언이 세렌의 볼에 입을 맞추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문을 나선 밀라이언의 표정은 미묘하게 가라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