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
>16 화>
“솔직히 말해 봐라. 그대의 꿈은 눈사람이었나?”
“눈사람이요? 그게 뭔가요?”
“…….”
비꼬는 말을 물음으로 받아치니 천하의 밀라이언도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부령에 눈이 내리면 그해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속설이 있다.
그 정도로 남부령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혹여나 내린다고 하더라도 쌓일 정도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서 북부에서는 흔한 눈사람이라는 단어도 그녀에겐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림 그리다가 얼어 죽고 싶었냐는 얘기다.”
“아뇨…… 오늘따라 딱 느낌이와서…….”
그녀가 꼬물꼬물 이불 속에서 손을 뿅 꺼내 돌돌 말아 쥔 종이를 침대 위에 올려놨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눈으로 한 시간째 잔소리를 퍼붓고 있던 밀라이언이 손을 뻗어 종이를 집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듯 고개만 빼꼼히 내민 카리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잠깐 봐도 되나?”
“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카리나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별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뛰어난 검술로 젊은 나이에 황제 직속 기사단에 들어간 인프릭.
뭐든 한 번 보면 곧잘 따라 하는 페르던.
손재주가 좋아서 복잡하고 아름다운 수를 놓는 아벨리아.
그에 비해 그녀가 연필로 그리는 흑백의 세계는 투박하기 그지 없었다.
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칭 찬할 때에 비해 다른 형제들을 칭찬할 때 훨씬 더 밝은 얼굴이었으니 카리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그녀의 스케치를 가져간 밀라이언의 눈이 아주 천천히 종이 위에 닿았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카리나는 진지하게 제 그림을 바라보는 밀라이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제 속살을 까발려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진지하게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밀라이언의 꾹 닫힌 입매가 열렸다.
“그대를 보면 겸손함도 병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네?”
“내가 비록 이런 쪽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전문적인 평가는 내릴 수 없지만, 살면서 본 그림 중에 손에 꼽을 정도야.”
밀라이언의 꾸밈없는 솔직한 한마디에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그림에서 시선을 뗀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될 법 한 실력이다. 내 저택의 지붕에서 보는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다곤 생각해 본 적도 없어.”
“…….”
“색을 칠했을 때가 기대되는군.”
비교할 대상도 없었고 부끄러워서 누군가에게 그림을 보여 주지도 않았으니 카리나는 더욱 스스로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그냥 해 주신 말이라도 기쁘네요.”
“난 이런 거로 농지거리를 하지 않아. 차라리 너는 가망 없으니 효율적으로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묻겠지.”
코웃음을 치며 내뱉는 거침없는 언사에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정 못 믿겠으면, 그림을 완성해서 내게 줘. 이쪽 방면으로 한가닥 하는 지인에게 전령을 날려 평가해 달라고 해 보지.”
밀라이언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카리나가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되면 드릴게요. 평가는 괜찮아요, 누구한테 평가받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그저 단지…….
자신을 봐 줬으면 했다.
그림은 어느새 외로움을 달래 줄 친구가 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무아지경으로 빠져 결국 사달이 났다.
조금 더 제 몸을 신경 썼으면 좋았을 것을.
체력이 좋아지지 않는 이유를 너무 집에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볍게 치부하고 말았다.
숨이 무척 뜨거웠다. 카리나가 이불의 시원함을 찾아 도롱이 윗 부분에 얼굴을 문질렀다. 천 부분의 시원함이 열을 식혀 것도 잠시였다.
카리나는 진심으로 이 도롱이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각하……. 저 여기서 이만 나가고 싶…….”
나와 볼 테면 나와 봐, 라는 매서운 시선이 카리나에게 닿았다. 카리나는 도로 입을 닫았다.
그가 탁자 위에 카리나의 그림을 조심히 올려 두곤 그녀의 새빨간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정말 오징어의 화신이라도 되나? 어째서 몸이 이렇게 약해 빠졌는지.”
잠시 멈췄던 잔소리가 또다시 시작됐다. 카리나는 토라진 표정으로 얼굴을 도롱이에 푹 파묻었다.
통통,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밀라이언의 시선은 이미 문 쪽으로 돌아간 후였다.
“각하, 마리아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새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성스러운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근육질의 사내였다.
가운을 걸친 것을 보면 의원인 것 같은데, 몸은 적장의 목을 몇 개나 따온 장수와 다름이 없는 듯했다.
밀라이언이 힐끗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여 카리나를 가리켰다.
“……이 아가씨를 도롱이로 만든 건 각하의 작품이십니까?”
“헛소리 말고. 여행을 길게 해서 몸이 약해진 모양이야. 오늘도 미련하게 온종일 찬바람 쌩쌩 부는 지붕에 앉아 있었어. 좀 살펴봐.”
“온종일이라니…….”
겨우 네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6배나 부풀리는 것은 너무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카리나가 억울 하다는 듯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카리나가 훌쩍 고개를 숙였다.
궁둥이를 쭉 잡아 빼며 도롱이 밑으로 쏙 사라진 카리나에 의원, 마리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밀라이언을 쳐다봤다.
“뭐하는 거야, 영애? 빨리 와서 안 앉아?”
“제가 의원 싫다고 했잖아요.”
열이 올라서는 걷는 것은 물론 제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말은 잘한다.
밀라이언이 헛웃음을 삼켰다. 밀라이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원은 싫어요.”
“그러면 부를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얼른 와서 진찰 받아. 애도 아니고 의원이 싫다니 무슨 소리야?”
“쉬면 나아요.”
“그대가 일단 제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게 되면 생각해 보도록 하지.”
밀라이언이 카리나에게 훌쩍 다가가 그녀의 뒷덜미를 대롱대롱 들어 올렸다.
자랑스럽게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한 것 같은 배부른 표정으로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침대 위에 다시 덜렁 내려놨다.
“아니, 각하! 대체 귀한 아가씨께 무슨 짓입니까! 데리고 오실 거면 정중하게 안아 주셔야지요!”
마리아가 사색이 되어 둥글게 말린 채 굳어진 카리나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마리아의 탓하는 언사에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보통은 이렇게 데리고 온다만. ”
“누굴 말입니까?”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맥을 재며 밀라이언과 대화를 나눴다.
카리나가 의원을 싫어하는 것 같아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열에 취한 카리나는 피부에 느껴지는 감각도 무척 둔한 듯했다.
“말 안 듣는 놈들.”
“그거야 병사들이 아닙니까.”
“안 되나?”
“네.”
밀라이언의 반문에 마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북부는 원래부터 마수 사냥에 동원되는 일이 많다 보니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신분 체계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약했다.
그들은 강함을 증명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대개 성격도 호탕하고 호방한 이들이 많았다.
공작 본인도 어릴 때부터 용병들과 어울려 자랐기 때문인지, 평범한 귀족들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해 주십시오. 남부의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처럼 그렇게 거칠지 않습니다.”
조곤조곤한 마리아의 설명에 미간을 좁히고 있던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알고 있다. 말랑한 게 딱 그런 것 같긴 해.”
그런데 카리나의 손목에 손가락을 올려 맥을 재던 마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검지를 들어 밀라이언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곤 부드럽게 웃으며 카리나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눕혔다.
“피곤하면 주무십시오, 아가씨.”
다정한 목소리에 카리나의 눈이 제 의지를 배반하며 서서히 감겼다.
‘안 되는데…….’
들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곤한 피로는 순식간에 그녀를 수마로 끌어들였다.
카리나가 잠들자 마리아가 의자에 앉아 재차 맥을 짚었다. 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왜 그리 표정이 어두워?”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허벅지 위에 올린 그가 턱을 괸 채 가볍게 물었다.
“맥이 너무 약하게 잡힙니다.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마리아가 손목에서 맥을 재다 말고 손가락 두 개를 펼쳐 그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박동하는 맥이 무척 불안정하고 흐릿하고 약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얇은 천을 그녀의 몸 위로 덮은 뒤 심장 부근에 귀를 바싹 붙여 가져다 댔다.
심장 소리가 무척 멀고 흐렸다.
그녀의 몸을 몇 군데 더 눌러본 마리아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가 카리나의 소매를 걷어 팔 을 뒤집고 몸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핏줄도 얇고 핏기도 없고.’
그녀의 눈꺼풀을 들어 이곳저곳을 살핀 마리아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북부엔 드물긴 하지만……. 이건 마치 예술병을 닮았는데요.”
“예술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