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1)
>외전 17화>
칼란 디움의 어깨를 짚으며 모습을 드러낸 교황이 카리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세레누스를 한 차례 눈으로 훑었다.
“교황 성하.”
“……교황? 알기론 밖으로 나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 아이가 오랜만에 부탁해서 말이야.”
교황이 밀라이언을 힐끗 보곤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성큼성큼 카리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오, 확실히 신기하네. 억지로 죽음을 미루고 살아남았어.”
“…….”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교황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가슴골 사이를 꾹 눌렀다. 신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보단 신력을 억누르는 마력이 더 강했다.
신력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데 마력이 그것을 억눌러 막고 있다. 말 그대로 억지로 죽음을 미룬 것이다.
마력보다 신력의 힘이 더 커지는 순간, 멈췄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갈 거다.
교황이 턱을 매만지다가 이내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꽤 아슬아슬하네.”
원래는 마력 쪽의 힘이 더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신력이 지속성이라면 강제적으로 밖에서 주입된 마력은 소모성이다.
애초부터 몸이 과부하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크기만 주어진 듯했고 그나마 소모되어 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마력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즉, 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천칭도 머지않아 한쪽으로 기울며 균형이 깨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불 보듯 훤했다.
“……네?”
“아니, 열심히 살고 있어?”
교황이 손을 뻗어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린아이라도 대하는 듯한 그 태도에 그녀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가 이윽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
교황이 씨익 시원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타올라 꺼져 버릴 불꽃이면 그 순간만이라도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이 좋지.
“그래,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 하렴.”
“……교황 성하, 당신은.”
“신은 참 너무하지. 이기적이기 짝이 없어. 무르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몸이 그네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교황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아 봐도 돼?”
그녀가 카리나의 품에 안긴 세레누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리나는 아이를 한 번 내려다 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밀자 교황이 제 품으로 세레누스를 단단하게 안아 들었다.
가느다란 팔 사이에 자리 잡은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교황이 세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카리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이야, 어느 시기부터 조금씩 몸이 안 좋아질 수 있어.”
“…….”
“무슨 소리지?”
카리나가 조용히 있자 곁에 있던 밀라이언이 나섰다.
교황의 시선이 잠시 밀라이언에게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밀라이언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카리나를 향해 입을 다시 열었다.
“그래, 처음은…… 마치 약간 감기에 걸린 것 같겠어.”
카리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다 조금 피곤한 것처럼 몸에 힘이 빠지면서 기력이 없어질 거야. 만약 네가 지금 100m를 달릴 수 있다면 그게 90, 80, 7 0…… 점점 줄어들 거야.”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은 카리나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밀라이언이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며 교황에게 한 걸음 내디뎠지만 칼란이 그 앞을 가볍게 막아섰다.
“비켜라.”
“그녀의 대화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죽여 버리기 전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피로 물든 검아…… 네가 아무리 용을 쓰며 귀를 막고 눈을 가리려고 해도 정해진 것은 찾아오게 되어 있어.”
교황의 말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가 성큼 앞으로 다가서려고 하자 이번엔 칼란이 제대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교황 성하입니다. 예의를 지키시지요.”
칼란 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리나는 그저 입을 다문 채 그를 말리지도 그렇다고 교황을 향해 무언가 말을 던지지도 않았다. 조금 넋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건 신이 개입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희는 이미 원해서 신의 인도를 벗어났어. 그리고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는 단다.”
“도를 넘고 있다.”
교황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양이 곤란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기도 했다.
그녀가 밀라이언을 상대하는 걸 관두고 카리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각오하고 있는 일은 아주 천천히 찾아오겠지. 그러나 반드시 찾아올 거고.”
“그런가요.”
“그래. 불붙은 몸에 물을 뿌려 간신히 불을 껐지만 불씨는 여전히 네 안에 잠재되어 있고……. 그것은 반드시 다시 타오르고 말테지.”
세렌이 편안한 듯 꼬물거리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아이를 보다가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고개를 주억었다.
“신이 붙인 불이니 인간인 우리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지만 나도 신을 모시는 자. 나는 네게 독이 될 거야.”
“괜찮아요.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어요.”
모든 걸 알고서도 선택한 것이었다.
약간의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원망할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다.
카리나를 보던 교황이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반대로 아이에겐 마력이 가득했다. 마력이 아이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영글지 못한 아이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몸이 조금 더 성장하면 그것은 도리어 아이의 힘이 될 것이다.
‘흘러넘치는 마력을 막고 있는 건……’
아이가 품은 신력과 종종 칼란이 채워주는 신력이고.
“사실…….”
교황이 세렌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카리나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교황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내키지 않는다면 말하진 않으마.”
어깨를 으쓱인 교황이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아이야.”
“네.”
“어차피 불타오를 거라면 화려하게 타오르렴. 누구도 잊지 못하도록, 그 불이 꺼져도 오랜 시간 이 아이가 너를 기억할 수 있도록.”
교황의 말에 카리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천천히 다물렸다. 새삼 아이가 혼자 남게 될 사실이 속을 아리게 했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면 좋으련만.
기억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곤 물끄러미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에겐 가호를 걸어 두었으니 적어도 여기에 있는 하루는 편안할 거야.”
“네, 감사합니다.”
카리나가 교황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다가 금세 허물어졌다. 우유 냄새가 풍기는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다음에 오면 기도실로 놀러 오렴. 다과나 하자.”
“……어,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도피처라서. 딱히 거기서 기도만 하는 건 아니야.”
털털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대답에 카리나가 미소를 흘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거침없고 털털한데 분위기가 마치 따스한 태양을 닮았다.
‘……신기한 사람이야.’
교황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 것 같았다.
황제가 눈이 부실 정도로 뜨거운 여름날의 태양 빛이라면 그녀는 마치…….
‘따사로운 봄 햇살 같아.’
따갑지도 아프지도 않은, 겨울 동안 얼어 버린 것들을 놀라지 않도록 포근하게 감싸 조심스럽게 녹여 주는 따스한 햇살 말이다.
교황이 가볍게 카리나의 머리를 쓰다듬곤 몸을 돌렸다.
“그럼 재밌게 놀다 가렴.”
“실례하겠습니다.”
칼란 신관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곤 교황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밀라이언이 곧장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세렌의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애절함과 절박함이 피부에서부터 느껴졌다.
카리나가 살짝 까치발을 떼어 밀라이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나직한 카리나의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우리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 그렇지 않으면 밀라이언에게 속삭여 주는 것인지 모를 담담한 목소리였다.
* * *
“이런, 곤란하게도 재밌는 걸 발견해 버렸어요.”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 자란 성년이라기엔 앳된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그가 손에 쥔 것을 가볍게 손가락 사이로 뱅뱅 돌리다가 발을 돌렸다.
“저런 괴물이 존재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저건 확실히 도움이 될 만한 괴물이다.
저 몸 안에 품고 있는 것을 보아 여러모로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호의를 얻기도 어렵진 않을 듯했고.
“저걸 가져야겠네요. 준비하세요.”
“……저자는 페스텔리오 공작의 아내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물론 그것도 흥미롭긴 한데…….”
사내의 짙은 분홍색 눈동자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그렸다. 휘어진 그 시선에 담긴 잔인한 장난기에 눈동자가 한 차례 반짝였다.
그가 의복을 정리하곤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건 그 여자가 품에 안고 있는 물건.”
“……교주, 저 아이는…….”
앞에 서 있던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페스텔리오 공작이 아이와 아내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이미 수도 내 귀족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이 수도까지 방문을 해서 제법 긴 시간 동안 자리를 잡은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생글생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던 분홍색 눈동자가 한층 더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가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 눈앞에서 쩔쩔 매는 중년 남자의 어깨에 올렸다.
“백작, 난 부탁한 게 아니잖아요. 이건 명령이지 부탁이 아니에요.”
그가 힘을 줘 백작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귀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숙인 남자를 내려다보던 분홍색 눈동자가 다시금 둥글게 휘어졌다.
“백작이 원하는 걸 가지려면 내게 협조를 해야죠.”
“하지만 페스텔리오 공작은 용서도 자비도 없는 자입니다. 그가 지금 품에 안은 가족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는…….”
“걱정하지 마세요, 살루타리스께서 다 우리를 헤아려 주실 테니.”
분홍색 눈동자가 상대의 시선을 올곧게 마주 본 채 말했다.
백작의 어깨가 움찔 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백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럼 적당히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나머진 알아서 해결할 테니.”
“아, 그리고…… 교황이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상정 내의 일이에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발걸음을 돌린 그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