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3)
>외전 19화>
밀라이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달래듯 느릿하게 쓰다듬는다.
“신관은 왜 그만뒀지?”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이스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마른세수를 하고서야 간신히 입술을 뗐다.
그 모든 것은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나 카리나는 그렇기에 더 가면처럼 느껴졌다.
저 얼굴 위 피부만큼이나 얇은 가면을 벗기면 그 아래에 다른 얼굴이 하나 더 있을 것 같았다.
“그저 기도만으론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깨닫고 신전에서 나와 의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마을에 전염병이 유행했었습니다.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기도했는데도…… 신께선 제 말을 들어주지 않더군요.”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이스트가 배시시 어린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수줍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누구든 한순간에 넋을 잃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래서 신전을 뒤로하고 의원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차라리 이편이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더라고요.”
주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 중에는 어쩐지 과하게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밀라이언도 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대단하군.”
밀라이언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스트의 분홍빛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둥글게 휘어졌다.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그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단해?’
밀라이언이 겨우 저런 일로 누군가를 칭찬할 사람이던가. 카리나가 조금 기묘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밀라이언?”
그녀의 부름에 밀라이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스트의 시선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마주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밀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카리나를 바라봤다.
“응, 카리나.”
그가 허리를 굽혀 카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 움찔 몸을 떨었다.
“잠…… 아니 밖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냥. 뭔가 온기가 느끼고 싶어졌어.”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채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살 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밀라이언의 멍했던 눈의 초점이 금세 돌아왔다.
‘……이쪽을 이용하는 건 무리군.’
이스트가 주변을 훑는 척하며 생각했다.
과연 철혈이라고 불리는 북부의 공작이다. 수문장이니 괴물이니 하는 소문이나 귀족들이 두려워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신의 가호도 있지만, 그 자체가 조금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 여자도 재밌네.’
유일하게 제 능력을 자력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뿐이랴,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니 감화시키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만이 자신의 묘한 기류를 느낀 듯 긴장하고 있었다.
‘아…… 이것도 탐나는데.’
이스트의 붉은 혀가 입술을 핥으며 드러났다 사라졌다.
오랜만에 탐나는 것들이 많다. 역시 황실이라 그런지 보석이 많았다. 적어도 저것들을 얻으면 한동안은 재밌을 거다.
“어리광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스트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구는 그 모습에 카리나는 낮게 타박하면서도 세렌을 한쪽 팔로 안으며 다른 손으론 그의 볼을 살살 문질러 줬다.
이스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괴물을 받아들이는 포용력도 놀랍군.’
저 정도로 함께했다면 그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성향에 대해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일말의 꺼림칙함도 없이 그를 대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바람 좀 쐬러 갈까요?”
“으음, 아니. 시간제한이 끝난 모양이야.”
한 차례 귓가를 쫑긋거린 그가 한숨처럼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더니 그녀에게 맞춰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가 연회장 입구를 턱으로 가리켰다.
“칼란 디움 추기경 각하, 예르 하시르 칼리움 리피트 교황 성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입구부터 황제가 서는 상석까지 길게 늘어진 붉은 융단을 밟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의 사람들이 묵례를 했다.
“……추기경?”
그들을 따라 묵례한 카리나의 입술이 달싹였다.
“몰랐어?”
“어, 그냥 상급 신관이라고만 생각해서…….”
카리나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정체다. 물론, 실력이 뛰어나신 분이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추기경이라곤 예상하지도 못했다.
당황한 듯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확장됐다.
“모를 수도 있지. 추기경이 아니었으면 내 앞을 가로막는 순간…….”
목을 베어 죽여 버렸을 거라고 하려던 밀라이언이 뒤늦게 옆에 있는 사람이 카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밀라이언이 제 입 안을 세게 깨물었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모두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밀라이언은 가볍게 묵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덕분에 카리나 역시 굳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끝났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오며 밀라이언을 발견한 듯 퍽 반가운 얼굴을 했다.
밀라이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 반가움에 대한 대답을 보여 줬다.
“모두 일어나게.”
황제가 가장 상석에 있는 황좌에 앉으며 말했다.
허리를 굽혔던 귀족들이 하나둘 허리를 폈다. 넓은 연회장에 귀족이 제법 됐다. 황제의 시선이 밀라이언을 향해 움직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여 주는군, 페스텔리오 공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
무뚝뚝한 목소리로 밀라이언이 대답했다. 어쨌든 황제이기 때문에 불손한 목소리를 하거나 표정을 하진 않았지만 무감정한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불러도 나오지 않더니 아이가 자네를 수도에 눌러 앉히는군.”
“아이가 몸이 약해서 요양차 잠시 온 것뿐입니다. 아이가 괜찮아지면 다시 돌아갈 예정입니다.”
“아쉽군. 짐은 자네가 이 수도에 있었으면 하네.”
입맛을 다시며 황제가 말했다.
저토록 든든한 검이 제국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의 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로선 탐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인재였다.
“북부를 대신 맡아 줄 가문을 구해 주신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밀라이언의 말에 귀족들 사이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북부의 소문은 무성했다. 물론 직접 와 본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느끼겠지만, 대개의 귀족은 북부로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북부를 그냥 둬도 괜찮으시다면 부디.”
“말이 그렇다는 거네. 살벌하게 굴지 말게.”
황제가 턱을 괸 채 가볍게 대꾸 했다.
생각보다 황제는 밀라이언의 태도를 관대하게 봐주고 있었다. 그렇게 사이가 나빠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역하게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 공작 부인은 처음 보는…….”
입술을 달싹이던 황제가 묘한 표정을 했다. 그가 곤란한 듯 턱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갑작스럽게 불참할 것 같다고 전언을 올린 이유가……’
아무래도 이런 이유였기 때문인 듯했다.
제 아내의 일에는 끔찍하게 나선다고 하더니 친히 레오폴드 백작저까지 가서 협박을 하고 올 정도일 줄은 몰랐다.
카리나 레오폴드는 공식적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따지고 보면 페스텔리오 공작 부인이 된 것은 ‘카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평민이었다.
사정은 대충 알고 있었다. 결혼 전 페스텔리오 공작이 평민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당부를 해 두며 사정을 설명해 왔다.
“아, 공작 부인은 나와 처음 만나는 거겠지. 어떤 이가 그의 철옹성 같은 마음을 녹였나 했더니 사랑스러운 이였군.”
“……감사합니다.”
묘한 표정으로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적절한 감사 인사만 내뱉었다. 그러곤 냉큼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쪽도 상대하기 불편한 쪽이군.’
황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가 불편해하는 걸 눈치챈 듯 밀라이언이 냉큼 카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제의 입이 벌어졌다가 허탈하게 닫혔다.
그가 이윽고 대화를 포기하고 좌중을 둘러봤다.
“그래, 오랜만의 대연회라 북적 북적한 것이 보기 좋군.”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번에 이렇게 그대들은 모은 것은 당부를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다시 한번 결속을 다지기 위함이네.”
처음 듣는 얘기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웅성임도 커졌다.
황제가 가볍게 팔걸이를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 ‘살루타리스’라는 이름의 이교도가 제국 내를 어지럽히고 있네. 문제는 그 교주가 자신을 신으로 칭하며, 환술에 가까운 기묘한 힘을 부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황제의 목소리에 귀족들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들은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수도의 귀족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제법 깊은 곳까지 침투한 것 같으니 발견하면 곧장 내게 직통으로 알리거나 황실 경비대에 알려야 함을 잊지 말게.”
황제가 매서운 눈으로 연회장 안을 천천히 훑으며 경고했다.
“각지에도 공문을 보낼 테지만, 그들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가 있다면 반역죄로 처분할 거네.”
황제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웃는 얼굴이 퍽 무르게만 보이던 사내는 어느새 차갑기 짝이 없는 시선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나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선이 매서웠다.
“누구라도…… 특히 귀감이 되어야 할 귀족의 임무를 지닌 자네들은 결코 해선 안 될 일임을 알고 있으리라 믿네.”
귀족들이 대답 대신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그에게 충성을 표했다.
카리나가 밀라이언을 따라 가볍게 묵례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던 이스트가 없다.
‘……귀족이 아니라 쫓겨났나?’
동행인이라곤 해도 귀족이 아닌 건 맞으니 불편할 수도 있긴 하겠지.
그렇게 생각해도 될 문제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한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