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5)
>외전 21화>
“……너, 미쳤어?”
“이런, 그럴 리가요.”
“밀라이언은 둘째 치고 그 애 대부가 누군지 알고는 하는 말이지?”
카리나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세렌의 목숨에 문제가 생기거나 세렌이 진심으로 울음을 터뜨리면 언제든지 달려오겠다고 말해 주었던 아지다하카다.
그는 대부가 되었으니 살아가는동안 아이의 시간을 지켜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신력을 전부 잃어서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조차 없게 됐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아이가 납치당하는 꼴을 웃으면서 볼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소환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지.’
아지다하카가 알려 준 방법이다.
제 목숨에 문제가 생기면 그는 바로 알 수 있다. 카리나가 가진 기적의 힘으로 되살아난 아지다하카인만큼, 그녀의 생명력이 꺼져 가는 것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다고.
“대부? 아아……. 알고 있지요.”
“알 리가 없을 텐데.”
카리나가 헛웃음을 삼키며 대답 했다. 아지다하카의 존재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가 알 리가 없다.
“페리얼 칼로스 공작 아닌가? 어쨌든 얌전히 따라오면 아이도 영애도 무사할 거야.”
황태자가 옆에서 말했다.
카리나의 입술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아이나 밀라이언을 볼 때는 봄 햇살처럼 따사로웠던 시선이 얼음장보다 더 싸늘하게 뒤바뀌었다.
그 놀라운 변화에 황태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황태자는 예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자주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모르는 영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존재감이 옅고 기가 약한, 누군가의 말에 대들 줄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개 같은 소리 하시네요, 황태자 전하.”
“……뭐라고?”
“약 파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카리나가 울컥 차오른 짜증을 애써 억눌렀다.
생글생글 휘어진 눈동자로 웃고 있는 이스터는 이 상황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듯했다.
유약하게만 보였던 여자가 제 아이를 위해 가시를 세우고 날을 세우는 변화가 무척 신기했다.
“모성애는 참 신기하네요. 사람을 변하게 하잖아요?”
여전히 꿀 바른 듯한 목소리였으나 역겹기 그지없다. 이스터의 눈매가 한층 더 화사하게 휘어졌다.
“미쳤나, 영애?”
“미친 건 그쪽이시죠. 황제 폐하를 두고 이런 미친 짓을 벌이고……. 감히 그 애가 누구라고 더러운 손을 댈 생각을 해.”
“허! 북부에서 살더니 완전히 미쳤나 보군.”
황태자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단검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말했다.
카리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스터가 황태자의 손에서 단검을 자연스럽게 가져와 아이의 볼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카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 마.”
“조용히 따라와 주시면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휘어진 눈동자가 무척 다정하게만 보였다.
사람을 흘리는 시선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물론 카리나의 눈에는 그보다는 세렌의 오드아이가 그저 아른거렸다.
“사실 얼굴에 상처가 나거나 눈동자 하나 뽑는 것 정도는 제게 별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다고 가지고 있는 신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
“손이라도 댔다간…… 내가 널 죽일 거야.”
“그러니 움직이죠. 슬슬 시간이 부족하네요. 당신이 가지 않겠다면 아이만이라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이스터를 보며 카 리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호신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황태자의 허리춤에 달린 검도 신경 쓰인다.
저런 황태자여도 꾸준히 검술 훈련을 받은 남자다.
여기서 제 심장에 검이 박히거나 어쨌든 목숨이 위험한 사태에 직면하면 아지다하카가 곧장 오겠지만 그건 일단 최후의 선택이었다.
심장에 상처나 균열이 생기면 그만큼 살 수 있는 시간도 줄어 든다.
“어디로 갈 건데?”
이스터가 황태자의 품에 아이와 단검을 넘겨주곤 가볍게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또다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젠장.’
카리나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탓을 할 순 없다.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자신의 탓이다.
이스터가 그녀에게 사뿐사뿐 걸어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카리나.”
“누가 카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손 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꿈틀거리던 그것들은 마치 그녀의 몸에 스며드는 듯 보였다.
“뭐 하는…….”
욱신!
갑작스럽게 심장에 밀려드는 통증에 카리나가 숨을 삼키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스터가 그녀를 달래듯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쓰러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카리나의 심장, 신력과 마력이 균형을 간신히 맞추고 있는 것 같은데. 신력이 많아지면 어떻게 되나요?”
흥미로움과 호기심 가득한 물음에 카리나의 얼굴이 한층 더 괴롭게 일그러졌다.
괴롭게 신음하며 몸을 벌벌 떨며 무너지는 그녀를 따라 몸을 숙인 이스터가 고개를 옆으로 툭 기울였다.
“정확히는 마력이 신력을 막고 있는 형상이네요. 마치 선과 악이 대립하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 사이로 향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듯이. 카리나가 이를 악문 채 억지로 버티고 섰다. 오랜만의 통증에 뒷골이 띵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파직, 어딘가에서 균열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손을 늘어뜨렸다. 괴로웠던 호흡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멈췄던 모래시계가 다시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손을 뻗어 그대로 이스터의 목을 붙잡았다. 이스터는 미간을 좁혔으나 그녀의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것처럼.
“내가 널 지금 죽이고 싶은데…….”
카리나의 눈동자가 서서히 황금 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눈동자를 잠식해 가는 금빛 눈동자를 보며 이스터는 오싹 한 등줄기에 전율했다.
“이건 정당방위겠지?”
목소리가 서늘하다.
이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유쾌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일을 눈에 담았다.
붉은색의 마력을 새하얀 신력이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이봐, 교주! 시간이 없어.”
“아,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며 한걸음 물러나려는 이스터를 카리나가 조금 더 힘을 줘 붙잡았다.
카리나의 새하얀 손길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팔랑, 새파란 나비 한 마리가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미친, 저게 뭐야……?”
마치 하늘에 먹구름이라도 낀 듯 세상이 어두워져갔다.
황태자가 고개를 젖힌 채 황당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카리나도 이스터도 고개를 젖혀 황태자와 같은 것을 보지 않았다.
어두워진 세상에서 먹잇감을 보는 포식자처럼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에 이스터는 그저 눈을 번뜩였다.
‘가지고 싶어.’
눈앞의 것을 가지고 싶다.
이스터는 속에서 들끓는 욕망에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이것은 제 것이다.
제 물건이었다.
손을 뻗은 이스터가 카리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푸른 나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족히 수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나비가 쏟아지는 달빛을 가로막으며 이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씩 보자면 아름답기 짝이 없었으나 모여 있으니 지독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그것들이 이스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리나는 푸른 나비가 이스터의 몸을 갉아먹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그 순간, 나비들이 이스터를 향해 쏜살같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비……?”
그제야 주변 환경에 눈을 돌린 이스터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짜증스럽게 나비들을 팔로 내치려는데 그것들이 이스터의 팔에 떡하니 내려앉아 입을 쩍 벌렸다.
꿀을 빨아 먹는 대롱 주둥이가 있어야 하는 나비에게 마치 육식 동물과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그것은 작고 연약하게 보였으나 무언가를 뜯어먹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스터도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듯 다급히 나비를 내치며 뒤로 물러났다. 카리나의 시선은 오로지 이스터에게 닿아 있었다.
그것이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초월자의 눈과 같아서 이스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저것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눈이었다. 용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포식자와 피식자의 먹이사슬과도 같았으니까.
“그걸 내놔요!”
이스터가 제게 달려드는 나비들을 보곤 황태자에게로 뛰어가 세렌을 빼앗아 들었다.
이스터를 잡아먹을 듯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거리며 날아들던 나비들이 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스터가 단검을 쥔 손을 세렌의 눈 바로 앞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이의 푸른 눈동자에 단검이 박힐 것이다.
카리나의 황금빛 눈동자가 풍랑에 휩쓸린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세렌에게서 손 떼……!”
“거절할게요. 조용히 따라오시지요.”
“교주! 문제가 생겼다지 않나! 벌어 둔 시간은 이미 끝났어! 경비병들이 몰려올 거야.”
황태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계획이 제대로 흐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이스터가 세렌과 카리나를 데리고 도망간 후 자신이 그녀가 이교도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뿌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꼴이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자신의 처지 또한 온전하지 못하게 됐다.
이스터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를 내놔. 그럼 쫓지 않을 게. 밀라이언도 내가 막는다고 약속할게.”
카리나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세렌을 향해 웃어 주자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녀의 가슴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서.”
카리나가 초조함에 다시금 그를 재촉했다.
한참이나 세렌은 웃지도 않은 채 제 모습을 바라봤다.
아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가더니 굵고 말똥만한 눈물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교주!”
“……약속은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지켜.”
카리나가 위협하듯 허공에서 비행하는 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스터가 바닥에 세렌을 내려 뒀다. 그러곤 혀를 차며 로브를 뒤집어쓰고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바라보며 황태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쫓아갔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카리나가 머릿속 상상을 지워 버렸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고 있던 나비들이 순식간에 바스러져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중 남은 나비 한 마리가 팔랑 거리며 이스터의 뒤를 쫓아 그의 로브 안쪽에 쏙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카리나! 젠장! 기다려!”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가 급히 세렌을 향해 달려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다급히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세렌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흐으…… 흐아아아앙!!”
난생처음 듣는 울음소리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위쪽에서 우당탕탕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