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7)
>외전 23화>
밀라이언은 검을 쥔 팔을 늘어 뜨린 채 천천히 움직였다. 시뻘건 눈동자가 안광을 번뜩였다.
이윽고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그가 느릿하게 출구를 막았다.
밀라이언은 의자를 가볍게 부숴 문 손잡이 사이에 끼워 막아 버리곤 가볍게 검을 움직였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페스텔리오 공작!”
“청소.”
나직하게 대답하는 밀라이언의 목소리를 들은 아지다하카가 시종이 들고 있는 와인 잔을 하나 빼앗아 테라스 난간에 가볍게 걸터 앉았다.
그가 맹수처럼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밀라이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흐음, 확실히 전쟁의 신의 가호를 받긴 받았군.’
워낙 물렁물렁하게 굴어서 저게 진짜로 그 미친 전쟁 신의 가호를 받은 놈이 맞나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 살벌하기 짝이 없다.
그 찌릿찌릿한 기운에 아지다하카는 오랜만에 싸늘해지는 피부를 느꼈다.
아지다하카는 술잔을 기울이며 폭주해서 결국은 능력이 발휘되어 버린 카리나를 떠올렸다.
‘견고하게 쌓아 둔 둑이 터졌으니……
머지않아 결국 물이 새고 말 것이다.
급히 다시 보수공사를 해 두었지만 그뿐이다. 심지어 그동안 능력은 성장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발휘될 수 있을 정도로.
즉, 상상력이 그녀의 그림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둑이 무너질 시기가 아주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어차피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길어야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짧아진 것뿐이다.
콰앙.
촤악!
사정없이 뭔가를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핏빛이 아지다하카의 눈을 사로잡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림한 악마를 바라 봤다.
경악한 표정의 귀족들은 차마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 했다.
밀라이언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네놈들은…… 감히 그 더러운 것을 이곳에 발 들이게 한 걸 뼈저리게 후회해야 할 거다.”
밀라이언은 눈을 부릅뜬 채 죽은 남자의 머리를 발로 툭 차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음산했고 깊었다. 짙은 분노에 누구 하나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황제조차 그 광경에 잠시 넋을 놓은 듯 말이 없었다.
“감히, 이교도 따위가…… 내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 죗값은 가문이 짊어져야 할 거고.”
그의 검이 날카로운 대리석을 뚫고 바닥에 박혔다. 무슨 진흙에 검을 박아 넣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너희가 지키려던 것은 내 손에 죽을 것이고 너희들의 알량한 목숨은…… 개미 몸뚱어리만큼의 가치도 없을 거다.”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살기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저게, 북부의…….’
북부의 수문장이자 황제조차 건드리지 않는 괴물.
파수꾼의 실체를 본 이들은 그 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었다.
“건드려선 안 될 걸 건드렸어. 감히…… 감히……!”
그는 온몸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네놈들 따위가 내 삶을 건드렸다.”
그녀는 삶이었다.
그의 유일한 숨구멍이자 그의 세계 그 자체였다.
감히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그에게 그만한 가치를 주는 것이 없다.
그냥 두어도 서서히 시들어 갈 이를 감히, 감히…….
꽈악,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검을 쥔 밀라이언의 얼굴엔 오로지 분노와 절망만이 가득했다.
감히……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가치 없는 것들이 건드렸다.
그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유일한 것을, 오랜 시간 끝에 그가 구축한 이름을 하찮은 욕심이 기어코 깨부쉈다.
시간이 흘러도 깨진 그릇은 원래대로 붙지 않을 것이다. 아슬 아슬하게 버텼던 세계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그도 시간이 흘러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빼앗아야 수지에 맞았다.
어떤 것도 그만한 가치를 가질 순 없을 테니…… 적어도 그만한 크기의 것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귀족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누군가의 앞에 멈춰선 그의 검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
겁에 질린 상대가 히익!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벌벌 떠는 남자가 다급히 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밀라이언은 그 움직임을 단 한 걸음에 따라 잡았다.
“사, 살려 주게 나는, 나는 자네에게 손댈 줄은 몰랐어……!”
비명과도 같은 변명이었지만 밀라이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한 점 미련도, 감정도 없는 움직 임이었다.
그는 마치 고깃덩어리를 보듯 시체가 된 것을 내려다봤다.
푹, 푸욱, 푹.
밀라이언이 이미 죽어 버린 몸뚱어리에 몇 번이고 검을 찔렀다.
언제나 제 감정을 절제하며 선을 지키던 밀라이언의 180도 뒤 바뀐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도 잠시 말을 잃었다.
저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이미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저것은 처벌도 처단도 아니다. 그저 먹잇감을 사냥하는 본능만 남은…… 마치, 미쳐버린 짐승과도 같았다.
“페스텔리오 공작, 도가 지나치네.”
황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의 말에 밀라이언이 두어 번 몸뚱어리를 더 찌르곤 움직임을 멈췄다.
시체는 정말 고깃덩어리였다. 온전한 부위가 아무데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낮게 가라앉은 밀라이언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바닥에 있는 시체만 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차가운 시선은 황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라는 겁니까? 반역죄치곤 제법 간단한 대가가 아닙니까, 폐하.”
그가 간신히 인내심을 발휘했다.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황제에게 덤비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미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놈들을 전부 눈에 담았다.
“페스텔리오 공작.”
“폐하께서 직접 나서서 내 앞에서 이것들의 배를 친히 가르실 것을 보여 줄 게 아니라면 거기 앉아 계십시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켰다.
황제에게 대한다고 하기엔 오만하기 짝이 없으나 동시에 두려웠다.
그들은 도대체 그와 결혼한 여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변하게 했는지.
황제는 그의 말에 이마를 짚었다. 밀라이언이 다시 연회장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던 대로 오늘부로 이교도는 누구도 이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연회장의 음악은 멎었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로 숨은 누군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이 보였다. 밀라이언은 그것을 한 놈도 놓치지 않았다.
그 뒤로는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다. 도망치는 이들은 테라스로라도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그곳은 아지다하카가 웃는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종종 밀라이언이 잘못 짚으면 교황이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그러나 대개 밀라이언의 선택은 옳았고 교황이 지적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벌써 열 명에 가까운 귀족이 죽어 갔다. 이윽고 밀라이언이 다음 사내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 맨 처음 이교도 교주를 소개해 줬던 네거티브 백작이었다.
“딱히 남길 말은 없겠지.”
“죄송, 죄송합니다……. 저는 그 저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그 딸도 머지않아 볼 수 있겠군.”
“가, 각하 제발, 제 딸만큼은!”
“네 딸이 소중했으면…”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숨죽인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내 딸도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밀라이언의 검이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남자의 심장에 검을 밀어 넣었다.
갈비뼈를 가르며 들어오는 감각에 네거티브 백작이 차마 반항하지 못하고 꺽꺽 숨을 들이켰다.
“제발제발, 제 딸만큼.”
푹, 심장에 검이 박혔다.
그가 빠르게 검을 빼며 그대로 그의 목을 향해 횡으로 그었다.
촤악!
몸이 쓰러지기 전에 머리가 또 다시 날아갔다.
이윽고 바닥을 구르는 네거티브 백작의 몸뚱어리를 가볍게 발로 찬 밀라이언이 살점과 피가 묻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이마를 짚었다.
이토록 많은 귀족이 이교도와 연관되어 있을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전부 죽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 앞에서.
“지금 도가 지나친 짓을 했다는 건 알고 있나, 페스텔리오 공작?”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황제는 그렇다고 그를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밀라이언은 아까보다 진정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린 북부로 들어갑니다.”
“돌아가겠다는 건가?”
“그리고 앞으로 3년, 문 닫습니다. 물자도 사람도 감히 내 땅을 밟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공작.”
“폐하, 내 아내는…… 그녀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당신과 나만큼 많지 않다고.”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에 황제가 숨을 멈췄다.
멈춰 놨던 모래시계가 결국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밀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그는 전부 없애고 북부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급히 처리할 건이 있으면 저택으로 보내십시오. 그리고…… 저들의 가족은 말씀하신 대로 반역죄와 동등하게 처벌해야 할 겁니다.”
“…….”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곧장 아지다하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회장에선 이미 누구 하나 멀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갈 건가, 놈에게?”
“그래.”
“내 생에 등 뒤에 다 큰 남자를 태워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오랜만에 나도 좀 화났으니…… 특별히 허락하지.”
아지다하카가 잔을 바닥으로 던지며 난간을 밟고 섰다.
그가 가볍게 난간 아래로 몸을 날리더니 이윽고 거센 광풍이 불어닥쳤다.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거대한 붉은 용이 눈을 샛노랗게 빛내며 콧김을 훅 내뿜었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그의 등에 올라탔다. 포악한 짐승의 눈이 연회장 내부를 천천히 훑더니 이윽고 테라스를 부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크와아아악!
커다란 포효가 수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두 마리의 괴물이 하늘 높이 모습을 감췄다.
이미 보고받았던 내용이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결국 제 몫으로 남은 뒷수습에 기어코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