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9)
>외전 25화>
* * *
“엄마!”
멀리서 도도도 달려오는 아이를 본 카리나가 몸을 숙여 달려오는 아이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뭘 했는지 아이의 손이 온통 흙 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탓하지 않았다.
“우리 세렌, 뭐 했어?”
“어, 세렌이 성 만드러써요!”
아이가 카리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카리나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아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레누스를 따라간 곳엔 혹여나 아이가 쌓은 모래성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팽이 있었다.
“마님, 오셨습니까?”
“팽이 수고가 많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엄마! 세렌이 만드른 성!”
카리나가 아이의 곁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세레누스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서툴게 쌓아 간 것이 분명한 모래성에는 팽의 손길이 종종 보였다. 무너지지 않도록 기반을 잡아 준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새하얀 장갑에는 흙이 드문 드문 묻어 있었다.
카리나가 아이의 볼에 입을 맞 추며 부러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우리 세렌이 이제 성도 지을 줄 알고 다 컸구나.”
“헤헤! 엄마랑 세렌이랑 아빠랑 살 수 이써!”
“집 하나가 더 생겨서 엄마는 기쁘네. 근데 너무 작아서 세렌 이랑 아빠랑 엄마를 빼면 팽이나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가겠다.”
“헉!”
아이가 숨을 훅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색이 다른 양쪽 눈동자에 순수한 당황이 담겼다.
아이는 무척이나 난감한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모래성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어…… 어……, 하나 더 만드러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만 더?”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세렌이랑 엄마는 집이 있으니까 저기에다가 잘 옮겨 뒀다가 혹시 비가 오는데 집이 없는 친구들이 있으면 자고 가라고 하는 거야. 개미나 나비가 비가 와서 쉬어 갈 수도 있잖아.”
카리나의 말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카리나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푸른색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와 그녀의 손가락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님.”
뒤에서 팽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낮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 달라는 제스처에 팽은 더 입을 열지는 못했다.
“봐, 이렇게 나비가 쉬어 가잖아.”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아이를 조곤조곤 달랬다.
실망하지 않도록, 아직은 좋은 것만 바라볼 수 있도록.
아니나 다를까 세레누스는 바싹 바닥에 엎드려 나비가 모래성 안에서 팔랑거리던 날개를 접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아!”
아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며 카리나가 빙긋 웃었다.
그녀가 엎드린 세레누스를 조심 스럽게 일으키며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슬슬 아빠가 올 시간 이네. 오늘은 우리 세렌이…….”
말을 하던 카리나가 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매가 살짝 구겨졌다. 손가락 끝을 떨던 카리나가 주먹을 꽉 쥐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엄마?”
“아, 세, 세렌이 좋아하는 음식…… 해 달라고 할, 테니까…….”
그녀가 애써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었다.
통증을 참기 위해 꽉 쥐었던 손을 억지로 펴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곤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얼른 깨끗하게, ……씻고 오자.”
“엄마도요?”
“엄마는…… 나비가 날아가는 걸, ……보고, 흣……. 보고 갈게.”
아이의 눈이 깜빡였다.
빛에 반사되어 이리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에 오롯이 자신이 비추는 것을 본 카리나가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비가, 잘 쉬었다 가는지 확인해야지.”
“마님은 제가 잘 모시고 갈 테니 주인님이 오시기 전에 얼른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던 팽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세렌이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카리나가 숨을 삼킨 채 아이에게 웃어 줬다.
시녀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아이를 보던 카리나가 그제야 비틀 거리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일그러진 표정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팽의 얼굴에 불안이 서렸다.
“일단 방으로 가시지요, 마님.”
“팽……. 나, 약…….”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팽이 황급히 그녀를 정원 의자에 앉히곤 몸을 돌렸다.
주위의 사람을 전부 물린 덕분에 팽이 직접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발작의 주기가 다시 빨라지고 있다.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벌써 5년, 6년쯤 됐나……’
그러고 보면 시간이 빨리 갔다.
아이는 벌써 다섯 살이 되었다. 카리나 역시 예정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고 있다.
주기적으로 돌보러 와 주는 아지다하카와 페리얼이 어떻게든 통증을 완화해 주고 병의 진행을 늦춰 주는 약을 개발해 낸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 한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교도 사건으로 납치됐던 이후의 소식을 카리나는 사건에서부터 1년 뒤에 페리얼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밀라이언은 절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듣자 하니 황태자는 산 채로 사지가 하나하나 잘렸다고 들었다.
밀라이언이 자비를 두지 않았음은 물론 아지다하카가 그 곁에서 기절하지 못하도록 신경이란 신경은 다 살려 놨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스터는 끔찍한 참상이었다고 한다. 이 건에 관해서는 페리얼이 정말 얘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세렌을 보지 못하게 할 거라고 몇 차례나 협박하고 나서야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이교도 교주였던 이스터는 한쪽 눈을 밀라이언이…… 산 채로 뽑아냈다고 들었다. 제법 신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지다하카의 앞에서는 무력했다고.
결과적으론 그 역시 사지가 조각나서 죽었다고 했다. 그 조각 난 시체를 효시조차 하지 않고 굶주린 짐승에게 먹였다고 했으니 그 결말이 어땠을진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밀라이언은 아무리 물어도 그 후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고 그 뒤에 밀라이언과 카리나는 곧장 북부로 돌아왔다.
그 뒤로 지금까지 북부는 문을 닫은 채였다.
북부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공작가의 꼼꼼한 선별에서 뽑힌 몇몇 상인 정도였다.
그것도 절대 북부의 일을 밖에 나가서 발설하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대가를 후하게 쳐주고 있는 듯했지만.
그리고 페리얼과 아지다하카였다. 아지다하카는 헤르타와 함께 이곳저곳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듯했다. 헤르타는 아지다하카 덕분에 몸을 작게도 할 수 있게 되었었고 말이다.
‘……황제가 무척 화를 냈다고 들었는데.’
황태자의 사지를 조각내서 전리품처럼 들고 온 그를 본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거세게 화를 냈다고 들었다.
페리얼과 몇몇 귀족들이 나서서 그를 비호하고 황제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크게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했다.
“황제가 거의 미쳐 날뛰었어요. 반역이고 뭐고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이 토막이 되어 도착했으니, 사실 그럴 만도 하지만요.”
“……그랬군요. ”
“그때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사지를 자를 때 황위가 탐나서 빠르게 차지하기 위해 이교도에게 붙었다고 스스로 자백했습니다. 반역자의 말로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페리얼은 질린 표정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뒤늦게 전해 듣는 자신도 황당할진대 옆에서 들은 그는 얼마나 황당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황제께서 그 자리에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더군요.”
과거를 떠올린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밀라이언은 그 때문에 제법 큰 배상금을 황제에게 물어준 모양이지만 일말의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황제에겐 차분한 쪽의 둘째가 있는 모양이어서 4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
“흐으…….”
식은땀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시간이 없다. 그 사실이 무거운 족쇄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옭아 맸다. 수천 번은 더 상상하고 각오했었는데 막상 다가오니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허억……, 허억…….”
“마님! 약 가져왔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팽이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그녀의 손에 약을 올려 주고 잔에 물을 따랐다.
그녀가 그것을 입에 넣고 삼켰다. 10분쯤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통증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걱정시켜서 미안. 밀라이언에겐 말하지 말아 줘.”
“…….”
카리나의 말에 팽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 난감한 듯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카리나는 그가 결국 밀라이언에게 말할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방에 가서 조금 쉴게.”
“네, 모시겠습니다.”
“밀라이언은 언제쯤 올 것 같아?”
“오늘은 곧 오실 것 같습니다.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요.”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올라갔다. 팽을 내보내고 지친 듯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가 책장 가장 뒤쪽에서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 한 두께의 책 두 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뒀다.
하나는 푸른색의 표지가 돋보였고 또 한쪽은 그보단 짙은 남색이 돋보이는 표지였다.
둘 다 사용감이 제법 묻어났다.
카리나가 익숙하게 책의 중간을 성큼 넘겼다. 그러고는 펜을 꺼내 잉크를 묻혀 무언가를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에 애써 힘을 주며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래로 쭉쭉 글을 써 내려갔다. 익숙하게 한 장을 가득 채운 그녀는 잉크를 말리듯 입김을 몇 번 불어 말리더니 다른 쪽 책을 또 펼쳤다.
새하얀 백지에 검은 글씨가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가끔은 멈칫거리듯 잠시 손을 멈추기도 했지만 금세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녀는 한참이나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페이지의 한 장씩을 채운 카리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잉크를 말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다시 책장으로 밀어 넣은 카리나가 멍한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앉았다.
“이런, 또 사색에 잠겨 있는 것이냐?”
“……아지다하카?”
“그래.”
“얼마 전에 왔다 갔으면서 어쩐 일이에요?”
갑작스럽게 들렸지만 퍽 익숙한 목소리에 카리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지다하카는 말없이 선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더니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책상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나도 이젠 여기에 있으려고 한다. 내 자리 정돈 마련해 줄 수 있겠지? 우리 대녀도 얼마나 잘 커 가는지 봐야겠고.”
“물론이죠. 헤르타 보고 싶어 하는 사용인도 많았는데, 다들 좋아하겠…….”
카리나가 아지다하카를 보며 말하다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같았으면 바깥이 쿵쿵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하는데 조용했다.
아지다하카는 말없이 입가에 미소만 띤 채 자신을 가만히 바라 보고 있었다.
따뜻하면서도 애정이 담긴 그러나 안타까움이 엿보였다. 카리나 의 입술이 다물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