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73)
>외전 29화>
* * *
그날 이후, 세 사람은 서로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밀라이언도 정말로 피치 못할 일이 아니면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 피치 못할 일도 미룰 때가 많았다.
세렌은 거머리가 된 것처럼 그녀에게 항상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도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셋이 함께 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아지다하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인간처럼 보이게 된 그는 가벼운 튜닉을 걸친 채 팔짱을 끼곤 벽에 기댔다.
옅은 미소를 띤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 많은 시간을 세렌과 함께 했고 인간의 삶을 살아갔다.
아지다하카가 식탁 옆으로 다가 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난 슬슬 산맥으로 가야겠다. 이제 때가 됐어. 잠들 준비를 해 야지.”
“……가는 거예요?”
카리나의 불안한 표정에 아지다하카는 부러 조금 더 씩 웃어 보였다.
그가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곧 본체로 돌아갈 것 같으니 산맥으로 가야지. 필멸자의 삶은 재밌었어.”
정해진 기간만큼만 살 수 있으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됐다. 조금 귀찮아도 세렌을 위해 움직였고 피곤해도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야기를 듣던 세렌이 카리나의 품에서 얼굴을 뿅 드러냈다. 아이의 볼은 여전히 통통해서 사랑 스러웠다. 아지다하카는 아이의 볼을 가볍게 손끝으로 간지럽혔다.
“아지! 어디가?”
“긴 잠을 자러 간단다.”
“앗! 잠꾸러기, 언제 와?”
아지다하카가 자연스럽게 세렌을 품에 안으며 대답했다. 세렌이 익숙하다는 듯 편하게 자리를 잡더니 아지다하카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글쎄……. 우리는 잠자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우리 대녀가 할머니가 되어도 보지 못할 확률이 높지.”
“헉! 하무니가 돼도?”
“맞다, 대부 잠꾸러기지?”
“하지만…… 세렌은 아지 보고 시픈데…….”
아지다하카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필멸자의 삶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언젠가 자라면서 천천히 알게 될 테니 지금 굳이 아이에게 슬픔을 들이밀어 줄 필요는 없었다.
“산맥에서 긴 잠을 잘 거니까 보고 싶다면 산맥으로 오거라. 물론 잠을 자느라 대답은 해 주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정말?”
“그래.”
세렌이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어여쁜 미소를 보며 아지다하카는 조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다니, 그토록 권태로운 삶에 질렸었는데 말이다.
스스로의 욕심에 조금 우스워졌다.
‘필멸자처럼 살았다고 필멸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닐 텐데.’
겨우 6년의 삶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될 줄은 몰랐다.
세렌의 이마에 입을 맞춘 아지다하카가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붉은 마력이 아이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세레누스,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단다.”
많이 흐려진 마력이었지만, 그 따뜻함에 세렌의 눈이 커졌다. 아이가 푸시시 입가를 무너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도 잘 자!”
“……그래.”
짧은 시간이지만 마력을 다루는 기초는 알려 주었다. 자라면서 스스로 응용하고 배워 가면 금세 성장하겠지.
아이의 몸을 한 번 더 꽉 끌어 안은 아지다하카가 침대에 내려 놨다. 세렌과 인사를 끝낸 그가 이번엔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좋은…… 좋은 꿈꾸세요.”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아지다하카가 가볍게 카리나의 머리를 흩뜨렸다.
밀라이언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그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훅 사라진 그의 모습에 밀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는 산맥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스스로의 몸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다.
그리고 그의 한계는 말 그대로…… 카리나의 한계였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시간이 없다. 카리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제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였다.
생각을 마친 그녀가 옅게 미소를 띠었다.
“밀라이언, 오늘은 다른 방에서 세렌이랑 잘래요?”
“……왜?”
“미안해요, 오늘 하루 할 일이 있어서요. 하루만 부탁해요.”
밀라이언이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을 보던 밀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불안해서 떨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그녀가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시간을 주지 않을 수도 없다. 그녀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세렌이 꾸벅꾸벅 눈을 비비며 쏟아지는 졸음과 싸웠다. 밀라이언이 세렌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불러. 바로 옆방에 있을게.”
“알겠어요.”
예전보다 한층 더 살이 빠진 카리나를 바라보며 밀라이언이 애써 웃었다.
카리나가 고개 숙인 밀라이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곤 마주 웃었다.
“사랑해요, 밀라이언.”
“응. 나도 사랑해, 카리나.”
매일같이 쉼 없이 하게 된 사랑 고백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떨렸다.
끝이라는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한계는 언제나 예상치도 못하게 다가온다.
카리나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는 밀라이언을 보곤 협탁 아래에 숨겨 뒀던 노트 두 권을 꺼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용의 반도 채우지 못했던 노트는 거의 끝에 다 다라 있었다.
카리나가 천천히 잉크병을 열고 글을 써 내려갔다.
밤이 새는 것도 새벽이 다가오는 것도 천천히 태양이 떠오르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것도 모른 채 노트의 끝까지 가득 채운 그녀는 두 권의 책을 천천히 책상 위에 나란히 올려 두었다.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어쩐지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늘이 눈부시고 쏟아지는 빛은 오늘따라 유독 빛나 보였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옆방으로 가 조심스럽게 문고리 를 돌리자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세렌과 걱정에 밤이라도 새웠는지 책상에 불편하게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밀라이언이 보였다.
“밀라이언.”
“음……. 카리나?”
비몽사몽 했던 목소리와 함께 번쩍 뜨인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카리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밀라이언의 볼에 입을 맞춰 준 그녀가 둥글게 눈꼬리를 휘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몸…… 괜찮아? 일어나도 돼?”
“네,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요.”
카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세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아이의 볼을 살짝 쿡 찔렀다.
“으응…….”
투정을 부리듯 꿈틀거리던 세렌을 미소 띤 얼굴로 보던 카리나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렌, 우리 오늘 나들이 갈까?”
“으응……? 나드리……?”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듯 잠 에 취해 뭉개진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들이. 엄마랑 아빠랑 도시락 싸서 갈까?”
그 말에 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가 확 밝아진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도 졸음이 넘실거리는 눈을 벅벅 문지른 세렌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들이! 세렌 가요!”
“카리나, 무리하지 않는 게…….”
“오늘은 정말 괜찮아요. 몸이 가뿐한 걸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의 숨이 멈췄다.
피부는 여전히 창백하고 몸은 여전히 가늘다. 하루아침에 몸이 나았을 리가 만무한데도 그녀는 너무도 태평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서 그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그거, 정말 다행이다.”
“저 오늘은 직접 세렌 옆방에서 씻기고 옷 갈아입힐 테니까 밀라이언도 얼른 씻어요.”
“……그래.”
밀라이언이 간신히 몸을 돌렸다. 욕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문 을 잠근 채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가 애써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뜨겁게 눈시울을 적신 것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면서.
끝이 다가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끝이…… 결국은 꾸역꾸역 다가오고 말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왜 알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 그가 천천히 욕실 벽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쿵!
딱따구리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 앉은 채 여러 차례나 머리를 부딪치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거울에 비친 것은 익숙하지 않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가 천천히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그렸다.
거울 앞에서 몇 차례나 그것을 연습하던 그가 움직인 것은 30분이 더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