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75)
>외전 31화>
에필로그
그녀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교류가 있었던 이들만이 발을 들였고 슬퍼했다.
귀족가의 장례식이라기엔 조촐 했지만, 그녀가 시끌벅적한 걸 좋아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나둘 그녀의 물건을 정리해 태웠고 아이와 둘이서 여러 차례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세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종종 그녀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밀라이언이 천천히 방을 훑었다. 그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풍경에 절로 숨이 막혔다. 눈을 돌리면 침대에 그녀가 앉아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천천히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 보였다.
책등에 제목이 적혀 있진 않았지만 종종 카리나가 뭔가를 쓰고 숨기던 것을 봤기 때문에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가 눈에 익은 책 두 권을 천천히 꺼냈다. 남색 표지의 책장을 넘기자 맨 첫 장에는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밀라이언에게.]그가 그 글씨를 천천히 손으로 더듬었다.
무척 단정하고 깔끔한 필체는 그녀의 성격을 고스란히 나타냈다. 그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 켰다가 얼굴을 문질렀다.
옅은 푸른색 노트의 표지를 넘기자 안쪽엔 똑같이 정갈한 필체로 [세레누스에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가 천천히 두 노트를 덮어 아이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세렌, 자니?”
“아빠!”
아이가 안에서 냉큼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와 함께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었던 모양이다.
밀라이언이 옅게 웃으며 아이를 한쪽 팔로 안아 들었다.
“나가.”
밀라이언이 사용인에게 명령하자 사용인이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사라졌다.
저택의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겨우 장례식이 끝난 지 2주 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세렌, 엄마가 쓴 노트를 찾았는데 읽어 볼까?”
“엄마요?”
“응, 엄마.”
“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침대로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세렌을 본 밀라이언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아이를 제 무릎에 앉혔다.
“이게 세렌 거래.”
“엄마……!”
세렌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는 새하얀 기운이 가득 있었다. 아이는 이것이 카리나의 흔적이라는 것을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읽어 줄게.”
밀라이언이 숨을 들이켰다.
카리나가 여기에 뭔가를 적고 떠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펼치기까지 그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그녀가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것만 같아서 힘이 들었다.
그가 첫 장을 펼쳤다.
“세레누스에게.”
첫 장의 중앙에 적힌 한마디를 천천히 읽은 밀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다음 장으로 넘겼다.
“세렌에게 글을 쓰려니 아직 너무 이른 게 아닌가 고민이긴 한데, 엄마는 곧 긴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 이렇게 쓸게. 분명히 아빠가 읽어 주고 있겠지만.”
“앗!”
“세렌이 언젠가 글씨를 읽게 되면 아빠 몰래 혼자만 보렴. 세렌에게만 주는 선물을 넣어 뒀으니까. 아빠한텐 비밀이야.”
“헉.”
세렌이 숨을 헙 들이키더니 이내 살금살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밀라이언이 낮게 웃으며 “아직 은 괜찮아.” 하고 가볍게 덧붙이자 그제야 아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엄마가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엄마도 우리 세렌이 너무 많이 보고 싶어. 이건 세렌이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열어 볼 수 있는 노트야.”
밀라이언이 묵묵히 그녀의 글자를 더듬으며 하나하나 읽어 내려 갔다.
온점 하나, 반점 하나까지 전부 살리기 위해서 그는 필사적이었다. 목이 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이걸 읽기 전에 엄마랑 약속하자. 엄마가 ‘끝’이라고 적어 놨으면 다음 페이지는 세렌의 다음 생일날 열어 보는 거야.”
“세렌 생일?”
세렌의 고개가 툭 기울어졌다.
이렇게 잔뜩 있는데 다음 장을 열어 보지 못하다니. 세렌의 입술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전부 읽어 버리면 세렌이 나중에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열어 보지 못하니까. 엄마랑 약속해 줄래?”
“네!”
아이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은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곤 곧장 다음 줄로 시선을 내렸다.
밀라이언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다.
그녀는 혹시 아이가 울면서 거절했을 때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의 편지를 적어 두었다.
밀라이언이 노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잔뜩 멘 목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착한 내 딸이야. 이 노트는 세렌의 거야. 엄마가 갑자기 여행을 떠나서 세렌도 놀랐겠지만 엄마는 어디 먼 곳에 간 게 아니니까.”
밀라이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엄마와 세렌의 첫 일기장 만남에 대한 선물이야. 아빠한테 펜을 달라고 해서 엄마가 그려 둔 나비에게 색을 칠해 볼까?”
“펜?”
“여기 있어, 세렌.”
밀라이언이 아이의 손에 펜을 쥐여 줬다.
아이가 도르르 눈동자를 굴리더니 일기장 맨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나비 한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군데군데 색이 칠해지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세렌이 검은 잉크를 묻혀 열심히 나비의 색을 칠했다.
그러자 일기장에서 옅은 빛이 나더니 푸른색 나비가 얼룩덜룩 한 검은 날개를 펼친 채 팔랑거리며 책 속에서 쓱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나비는 팔랑거리며 세렌의 손가락에 톡 내려앉았다.
밀라이언이 노트의 다음 줄을 읽었다.
“세렌, 사실 엄마는 마법사야. 세렌이 색을 칠해 주면 이렇게 친구들이 나올 거야. 물론, 책 속 친구들 말고도 많은 친구를 사귀 길 바라.”
밀라이언의 말에 세렌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나비에게 거의 꽂혀 있었지만 말이다.
“엄마 없다고 울지 말고 아빠한테 투정도 많이 부리고 열심히 글 연습해서 빨리 엄마 일기를 읽길 바랄게. 여기가 끝이야. 다음 장은 세렌의 6살 생일에 넘겨 보는 거야. 알았지?”
“……네에.”
“사랑한다, 세렌.”
밀라이언이 천천히 말을 끝맺었다. 다음 장을 넘겨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는 순순히 노트를 덮었다. 세렌이 노트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팔랑거리는 나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밀라이언이 시선을 옮겨 제 남색 노트를 열었다.
여전히 정갈한 글씨로 ‘밀라이언에게.’라고 적혀 있는 글자를 한참이나 뚫어질 듯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안녕, 밀라이언. 내 일기장을 얼마 만에 발견했는지 모르겠네요. 대놓고 두고 왔는데 일주일 넘게 걸렸으면 약간 슬플 것 같아요.]밀라이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방을 제대로 둘러보는 것은 근 2주 만이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으니까.
[사실 이거 일기장이 아니라 편지예요. 당신과 세렌을 위한 편지요. 너무 일찍 가는 게 아쉽고 전하지 못한 말도 많아서 이렇게 글을 적어 봐요.]밀라이언의 눈이 천천히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가 죽고 당신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마지막이 눈물이었을지 웃음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먼저 가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은 물론 이게 마지막이에요.]혼자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간 분명 크게 혼나겠지.
밀라이언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아이는 글도 읽지 못하면서 연신 나비가 그려졌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소리하진 않을 거예요. 그냥, 우리 추억 노트라고 생각해요. 밀라이언은 오늘부터 딱 100번까지만 날 보고 싶어 할 수 있어요. 세렌은 매년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아서 생일날만 열어 봐야 하지만, 당신은 내가 보고 싶을 때 열어 봐도 돼요.]특별이에요. 작게 적혀 있는 말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매만지던 밀라이언이 고개를 천천히 떨궜다.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내가 너무너무 보고 싶으면 열어 봐요. 그래도 보고 싶으면 다음 장을 넘겨요. 대신 100번까지만 돼요. 그보다 200페이지보다 페이지가 더 많은 노트는 없더라고요.]너무하네.
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생 100번만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천 수백 번은 더 그리울 텐데. 밀라이언이 종이를 매만졌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남겨질 당신 생각에 밤이 괴로웠어요. 남겨진 기분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 얼마나 괴로워 할지 알 것 같았거든요]자신도 그랬다.
혼자 보낼 생각을 하니, 그 두려움을 혼자 느끼게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난 3개월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뜬눈으로 지새운 적도 많았다.
[사실 나 밀라이언은 별로 걱정 되지 않아요. 강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외롭고 슬플 땐 이걸 열고 내 앞에서 울어요. 내 앞에서만 울어야 해요.]밀라이언이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눈시울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앞으로도 자신은 오랜 시간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다.
[해 줄 말이 사랑한다는 말밖에 없네. 사랑해요. 힘들 땐 언제든 뒷장 넘겨요. 세렌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안 돼요. 안 되는 건 확실히 안 된다고 해 주세요.] [알아서 하겠지만 그냥 한 번 적어 봤어요.]덧붙여진 글씨의 크기가 퍽 작다. 밀라이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지나쳐 가야 하는 곳이 있다면, 그 앞에서 계속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살다가 와요.]“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읊조렸지만 들리진 않겠지. 밀라이언은 마지막 글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당신에게 언제나 축복이 있기를. 자기 몸 소중히 아껴 주세요. 세렌 두고 나처럼 단명하면 가만 안 둘 거야.]밀라이언의 얼굴이 결국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낮게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선명한 잉크 자국을 손끝으로 조심 스럽게 훑었다가 천천히 노트를 덮었다.
‘하루하루가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해?’
차마 내뱉지 못한 물음을 삼키며 밀라이언이 어느새 노트를 끌 어안고 잠에든 세렌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는 그 옆에 누워 불을 끄곤 아이의 품에서 노트를 빼 협탁에 올려 두었다.
그녀가 없는 15번째 밤은 아직 싸늘해서 밀라이언은 조금 더 아이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계절은 여전히 봄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