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76)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1화
Side Story 1. 그래도 세상은 움직인다
코끝이 시렸다.
벌써 새싹들은 평평한 대지를 뚫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뺨에 닿는 바람은 차갑고 서늘하다.
아이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스케치북에 알록달록한 선을 연신 죽죽 그었다. 새하얀 도화지 위로 그어지는 색색의 선이 대중없었다.
“세렌.”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림 위에 퍼졌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방해받았음에도 아이의 표정은 환했다.
“아빠!”
소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곱슬의 남색 머리카락이 아이의 어깨 뒤로 늘어져 흔들렸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우리 딸도 잘 있었니?”
부드러운 목소리에 세레누스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쑥쑥 자란 아이는 어느새 밀라이언의 허리춤까지 머리가 닿아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뭘 하고 있었지?”
“위령제 때 엄마에게 줄 그림을 그렸어요!”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전 엄마처럼 그림을 잘 못 그리나 봐요. 마음에 안 들어요.”
입술을 툭 내밀곤 볼멘소리를 내는 아이를 보며 밀라이언이 웃었다.
제국에는 일 년에 한 번, 수많은 혼을 달래고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카리나가 죽은 뒤, 밀라이언이 다음 해 그녀의 기일에 만든 새로운 축제였다.
죽은 자들을 기리며, 떠들썩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아이에게 기일이라는 이름 아래에 침울한 날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던, 밀라이언의 계책이었다.
세렌은 어느덧 열두 살이 된 재능이 많은 아이로 성장했다.
아쉬운 점은 딱히 카리나의 그림 실력을 물려받지 못한 거라고 해야 할까?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세레누스 본인이었지만 말이다.
아이는 놀랍게도 예술, 특히 그림에는 재능이 없었다. 말을 그리려고 하면 형체 모를 덩어리가 완성되곤 했으니까.
대신 아이는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페리얼이 기쁨에 날뛰었던 것을 생각하면 제법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그래도 아이는 매년 그녀의 기일이자 위령제가 다가올 때면 몇 달 전부터 늘 새하얀 도화지를 펼치고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붓이나 색연필로 색을 칠하곤 했다.
“세렌, 생일 축하한다.”
“네! 아빠도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밀라이언이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냉큼 안아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면서 밀라이언의 뺨에 제 뺨을 문질렀다.
“뭘, 태어나줘서 고맙지.”
아이가 아니었다면 밀라이언은 아마 이 지루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가면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녀의 곁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세렌은 그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이렇게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카리나와 세렌 이외의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잊기에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도 강렬했으니까.
“위령제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오늘은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떻니?”
“좋아요!”
“내일부터는 생일 파티로 바쁠 테니까 오늘은 아빠와의 시간을 가져주렴. 윈스턴과 페리얼도 곧 도착할 거란다.”
세렌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황금색과 푸른색의 각기 다른 눈동자가 동시에 둥글게 휜다.
아이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누구보다 밝은 아이로 성장했다. 밝고 현명하면서 친구도 아주 많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건강한 아이.
어쩌면 카리나가 가장 보고 싶었을 모습이다. 제가 낳은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한.
“교황님도 오신대요?”
“……그래, 온다고 하더구나.”
아이를 안은 채 저택을로 향하던 밀라이언의 목소리가 설핏 부루퉁해졌다.
세렌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었지만 솔직한 말로 밀라이언은 여전히 신전의 놈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예민했던 세렌이 자라면서 그 교황과 추기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탓인지 아이는 교황과 추기경을 제법 좋아했다.
세렌의 생일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세렌의 생일 당일에는 반드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화려한 파티는 세렌의 생일이 지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날부터 한 3일간은 북부에 끊임없이 마차가 들어오곤 했다.
이건 밀라이언이 권한 것은 아니었다. 세렌이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이날은 엄마의 편지를 읽는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가족의 날이에요! 엄마랑 아빠랑 셋이서 잘 거니까요!”
자세히 말을 해 준 적이 없음에도 세렌은 카리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아이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생일 단 하루 만큼은, 카리나가 준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 그의 침대에 쏙 들어와서 잠을 자곤 했다. 세렌이 어른이 되면 그 또한 사라질 일임을 알고 있기에 밀라이언은 품에 파고드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편지는 오늘도 자기 전에 읽을 거니?”
“네! 그래야 엄마 꿈을 꿀 수 있어요. 엄마는 매년 생일에는 꼭 잊지 않고 꿈에 나오니까요.”
“……그래, 그건 다행이네.”
꿈은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밀라이언은 아이가 카리나를 얼마나 원하는지를 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그의 꿈에는 한 번을 나와주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생일에 옆에서 그에게 주어진 일기장을 천천히 넘겨보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세렌. 못 본새 한층 더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구나!”
“페리얼 삼촌!”
아이가 밀라이언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페리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제법 키도 덩치도 큰 아이를 무던하게 받아 내며 페리얼이 세렌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잘 지냈니? 아가.”
“네! 삼촌은요?”
“삼촌도 잘 지냈지. 생일 축하해, 세렌.”
“히히, 네! 행복한 생일이에요!”
아이가 드레스를 입은 채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살짝 들어 올리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페리얼이 웃음을 삼키며 허리를 굽히고는 신사의 인사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주었다.
“잘 지냈겠지, 아주 연애한다고 북부까지 소문이 파다하던데.”
“……뭐?”
“삼촌! 연애해요?”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물었다. 당황한 페리얼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연애? 연애가 뭔데. 삼촌은 그런 거 몰라요.”
벌겋게 물든 얼굴을 한 페리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네? 남자랑 여자랑 이성적인 교제를 하는 게 연애잖아요. 친구인 앨리엇이랑 쥬리도 최근에 연애를 한대요.”
“……어, 어……. 그렇구나. 그래, 요즘 애들 진도가 그렇게 빨랐…… 음. 그래. 저기.”
“쯧, 멍청하게 굴 거면 나가라.”
밀라이언이 차갑게 대꾸하자 페리얼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더니 후다닥 달려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더니 세렌에게 예의 그 사람 홀릴 듯한 미소를 흘리곤 밀라이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미쳤어? 너 애한테 뭘 가르치길래 순수한 세렌이 벌써부터 저런 걸 알아?!”
“세렌도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법이지. 쯧, 생긴 건 바람둥이처럼 생겨선 보수적이긴 또 심각하게 보수적이군.”
밀라이언이 페리얼을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윈스턴은?”
“아, 아까 마중을 나온 팽에게 붙잡혀있는 것 같던데. 자네도 팽을 얼마나 괴롭히길래 올 때마다 윈스턴이 납치당하게 만드나?”
“별로.”
밀라이언이 고개를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딱히 팽을 괴롭히진 않았다. 뭐, 이런저런 사고를 치면 그가 경악하곤 했지만 말이다.
팽은 그저 윈스턴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윈스턴은 페리얼 밑에서 일을 하느라 북부에 방문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
“세렌, 가서 파티용 드레스 입고 내려오렴. 새로 맞춘 거 입고 싶다고 했잖니.”
“맞다! 금방 올게요, 삼촌!”
“아, 그래. 다녀오렴.”
페리얼이 2층으로 후다닥 뛰어 올라가는 세렌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드디어 찾은 거냐.”
아이가 멀어지는 걸 본 밀라이언이 응접실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페리얼이 멈칫하며 민망한 듯 한참이나 붉어진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사람이야. 내 배경만을 보진 않는 사람. 얼굴을 좀 밝히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얼굴을 좋아해 줘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 하는 사람인데?”
“서부의 남작 영애. 계약 결혼 상대를 찾는 모양이던데. 몇 년 뒤에 이혼해 주겠대. 왜, 나도 결혼 상대 찾았었잖아.”
몇 년 전부터 결혼 상대를 찾았었지만, 여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했는지 결혼도 연애한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던 참이었다.
“……계약 결혼?”
“응, 뭐 상속권 문제가 얽혀 있나 봐. 난 이혼할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면 한동안은 내버려 두려고.”
“그래, 너도 그럴 때가 됐지. 벌써 7년이나 지났으니까.”
페리얼이 누구를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밀라이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서로 모른 척,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참이다.
“잘 됐으면 좋겠군. 결혼식엔 참석할 테니 청첩장 보내.”
“오, 와 주는 건가? 자네가 와 준다면 제법 성대한 결혼식이 되겠어.”
페리얼의 호들갑에 밀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모두가 조금씩 나이가 들고 조금 연륜이 생기고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아팠던 기억도 결국 언젠가 추억으로 남겠지.
“난 네가 잘 됐으면 좋겠다.”
“…….”
“카리나를 포기해 줘서, 그때 마음을 접어 줘서 고마웠다.”
제법 긴 시간 전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전해도 상대를 기만하는 말일 것 같았으니까.
그의 말에 페리얼이 석상처럼 굳은 채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너도, 고마웠어.”
눈 감아 준 밀라이언에게도 감사해야만 했다.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멋대로 되겠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선이 가고 있을 뿐인데.”
“…….”
“넌 내 친구로서의 선을 지켰어. 그러니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다. 네가 네 길을 찾아서 다행이군. 세렌 생일에 와 줘서 고맙다, 쉬다가 저녁에 보지.”
밀라이언이 몸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페리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렌은 나에게도 소중한 조카야.”
“다음에 너도 애 낳으면 말해라, 특별히 삼촌 해 줄 테니.”
“뭐래, 너도 우리 애 만나려면 고생깨나 해야 할 거다.”
세레누스의 때와 똑같이 돌려주겠다며 왕왕거리는 페리얼을 가볍게 무시한 그가 집무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