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77)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2화
“이런, 공작 각하께선 이미 들어가신 겁니까?”
“그래, 윈스턴. 쉬다가 저녁에 보자더군.”
“아가씨께서도 바쁘신 모양이군요, 인사는 조금 있다가 드려야겠습니다.”
윈스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층 주름이 깊어진 노년의 의사는 옆에 있는 팽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러기에 제가 대화는 조금 이따가 나누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팽.”
“내가 그간 쌓인 게 얼마나 많은데 매정하게 그러나. 뭐, 조금 흥분한 건 인정하겠네.”
팽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밀라이언이 세레누스만 엮이면 너무도 과해지는 터라 공작가 예산을 관리하는 그로선 머리를 벽돌에 쿵쿵 박고 싶어질 때가 많이 있었다.
물론, 공작가가 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건 돈에 관련된 문제는 크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게 문제냐면, 식사를 하다가 세렌이 치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낙농업을 시작해 버리면 이제 거기서부터 팽의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 낙농업은 누가 관리하며 거기서 흘러들어 오는 돈과 인력, 그리고 제품 판매 등의 관리는 대체 누가 하겠는가. 다시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팽도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지. 자네는 언제쯤 은퇴를 생각하나?”
“저도 조만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제 너무 늙고…… 쉴 때가 되었지요. 내년쯤에는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할까 싶습니다.”
윈스턴의 말에 페리얼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얼마 전에 관련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역시 시골 마을로 가는 것은 조금 아쉽기는 했다.
“수도에 집을 마련해 줄 테니 있으라니까, 윈스턴.”
“이제 저도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최근 십 년간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바쁘게 살았으니까 말입니다. 이 늙은이는 이제 시골에 내려가 간간이 의원 일이나 할까 합니다.”
윈스턴의 말에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본인 의지가 저렇게까지 단호하니 그가 더 말리는 것은 오지랖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페리얼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디로 갈진 생각했나?”
“아뇨, 슬슬 생각해 볼까 합니다. 몇 군데 생각해 둔 곳은 있지만요.”
팽의 말에 윈스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좀 쉬고 싶은데, 방을 좀 안내해 주겠습니까? 팽.”
“알겠네.”
* * *
저녁이 되자 모두가 느릿느릿 연회장으로 모였다.
“윈스턴!”
“어이구, 세렌 아가씨. 많이 자라셨군요.”
윈스턴이 제게 달려오는 세렌을 품에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밀라이언이 최선을 다해 키우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아이는 그늘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자랄수록 아이는 카리나를 떠올리게 했다. 반년 만에 본 아이는 또다시 훌쩍 커 있어서 윈스턴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 행복한 풍경 속에 한 사람이 없는 것이 여전히 아쉬워지곤 했다.
“응, 윈스턴도 잘 지냈어요?”
“이 늙은이가 못 지낼 게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주 잘 지냈죠. 선물도 가져왔습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세렌 아가씨.”
윈스턴이 작은 상자에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퍽 투박한 상자에도 세렌은 내색 없이 상자를 품에 안으며 활짝 웃었다.
“최근에 짐 정리를 하다 보니 그리운 물건이 발견해서요, 세공사에게 말해서 팔찌를 만들었는데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세렌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밀라이언과 페리얼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파란빛을 뿜는 은하수가 담긴 듯한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든 팔찌였다.
“……이게 아직도 있었군.”
“예전에 실험하고 남은 걸 넣어 두고 몰랐던 모양입니다.”
“와, 예뻐. 고마워요, 윈스턴!”
세렌이 팔찌를 손목에 차며 활짝 웃었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하론으로 만든 팔찌였다. 이렇게 순도 높은 하론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하론은 이미 아지다하카가 전부 먹어치웠고 북부에 남아 있는 건 하급 하론이 전부였다.
“근데 이게 무슨 보석이에요?”
“건강해지길 바라는 사람에게 선물해 주는 선물이란다, 윈스턴이 네게 귀한 걸 줬구나.”
손끝으로 하론을 가볍게 매만진 밀라이언이 대답하며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활짝 웃었다.
선물을 하나씩 받는 내내 세렌의 입은 찢어질 듯 올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밀라이언이 건네는 눈동자 색과 똑같은 브로치를 두 개 받을 땐 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떠들썩한 파티였다.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사람을 그리 초대하지 않은 어쩌면 조촐한 파티였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연회장 한편에는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는 일기장이 의자에 세워진 채 고이 모셔져 있었다. 밀라이언이 흘긋 나란히 세워진 일기장 두 개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세렌의 다정함을 밀라이언은 이런 곳에서 종종 엿보곤 했다. 카리나의 다정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한 제 딸은 이렇게 생일 파티마다 반드시 제 어머니를 챙기곤 했다.
“세렌의 생일을 위하여!”
“위하여!”
페리얼의 선창과 함께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
떠들썩한 파티는 자정이 될 때까지 제법 길게 이어졌다.
더 늦어지면 세렌에게 좋지 않기 때문에 그만 파하기로 한 밀라이언은 세렌을 먼저 올려보낸 뒤 생일 파티 주인공보다도 더 흥에 취한 참석자들을 연회장 밖으로 쫓아냈다.
“어휴, 자네도 참 너무 감싸고 도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건강에 좋지 않아. 너도 가서 얼른 잠이나 자라.”
끝까지 버티는 페리얼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내쫓았다. 연회장의 정리를 사용인들에게 명령한 밀라이언도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제 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를 한 그가 문을 열었다.
“이제 슬슬 잘 시간이야, 세렌.”
“네에.”
친구들이 준 초대장을 정리하던 세렌이 눈을 비비다가 품에 일기장을 챙겨서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불을 끄고 촛불을 켠 밀라이언이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었다. 밀라이언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며 아이의 근처로 촛불을 들어 주었다.
[안녕, 세렌.내 사랑스러운 딸. 벌써 12살이 되었네. 12번째 생일 축하해! 우리 딸 잘 지내고 있을까? 엄마는 제법 잘 지내고 있어. 어디에 있든지 늘 세렌을 지켜보고 있으니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힘차게 살아가렴.
그러고 보니 올해는 아카데미에 입학했겠구나. 입학 축하해, 세렌! 친구는 많이 사귀었니? 사실 세렌이라면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곤란해하고 있지 않을까?]
세렌은 천천히 글자를 읽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친구도 많이 사귀고 있고 벌써 열 명도 넘게 사귀었다는 사실도 자랑하고 싶었다.
[사실 조금 부끄럽지만, 엄마는 친구를 그렇게 많이 사귀지 못했었거든. 세렌의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구나,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나중에 말해 주렴.아카데미는 검술부로 들어갔겠지? 세렌이라면 아빠를 뛰어넘겠다고 매일매일 훈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목검 대신 진검을 사용하고 있겠구나.]
세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실제로도 세렌은 마법부와 검술부, 그리고 일반부를 고민하다가 검술부 시험을 치뤄서 당당하게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지다하카의 마력도 가지고 태어난 터라 마법에도 제법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빠를 이기고 싶었고 마법을 하는 것보단 직접 제 검으로 마수를 때려잡는 쪽이 세렌의 성미에 훨씬 맞았기 때문에 아이는 검술부로 입학했고 현재는 훌륭한 검사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내 사랑스러운 딸, 실력은 일취월장했으려나? 12살부터는 각종 검술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단다. 엄마가 알아본 바로는 가을부터 시작하는 대회가 많으니 아빠에게 한번 말해 보렴.]세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밀라이언에게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밀라이언은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이런 부분에 그다지 세심하지 못했으니까.
이불 속에 포옥 묻힌 발을 가볍게 흔들며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한 페이지를 꼼꼼하게 가득 채운 편지는 언제나 세렌을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즐겁고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면 사교계에는 몇 년 늦게 나가도 좋아.
세렌에게만 살짝 말하자면, 아빠는 분명히 세렌이 사교계 데뷔를 하는 걸 싫어할 거야. 아빠는…… 세렌을 아마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어서 세렌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싫을 테니까.
만약 아빠가 그러면 당당하게 말하렴. “엄마가 사교계 데뷔는 꼭 하라고 했어요!”라고. 분명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거야. 물론 세렌이 하고 싶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허락하겠지만.
사교계에는 세렌과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다양한 친구들이 사귀고 싶다면 꼭 데뷔하렴. 물론 그러고 싶지 않고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미뤄도 좋단다.
사실 아빠는 이쪽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이는 좀 어린애 같은 면모가 있거든.]
세렌이 키득키득 웃으며 슬쩍 옆에 앉은 밀라이언을 보았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밀라이언이 아이의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재밌는 말이라도 했니?”
“네!”
“뭐라고 하는데?”
“으음…… 비밀이에요. 근데 아빠, 저 사교계 데뷔할까요?”
세렌의 말에 밀라이언이 멈칫했다. 겨우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슨 사교계 데뷔를 하겠다는 걸까? 그의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
‘페리얼이 이상한 바람이라도 불어넣은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세렌을 재우고 멱살을 잡으러 갈 생각까지 하고 있던 밀라이언은 옆에서 들려오는 방울 소리 같은 웃음소리에 다시 세렌을 보았다.
“조금…… 이르지 않으려나?”
물론 밀라이언의 사교계 데뷔는 10살이었다. 대개 10살에서 12살 사이에 첫 사교계 데뷔를 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우음…… 그래요?”
“그렇지, 보통 사교계 데뷔는 15살…… 아니, 18살쯤에 하니까.”
그가 대놓고 사기를 쳤다. 방금 카리나의 편지를 읽은 세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사기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세렌이 키득키득 웃으며 밀라이언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고민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