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78)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3화
세렌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물론 세상엔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사교계에 나가면 어쩌면 실망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 친구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친구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하지만, 세렌. 그런 나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 포기하지 말렴. 네가 엄마와 아빠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 세상에는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단다.
타인을 상처 주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야.
세렌은 약자에겐 다정하고 강자에겐 강한…… 아빠 같은 사람이 되렴. 아빠는 엄마가 본 남자 중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또 다정한 사람이란다.]
세렌이 천천히 숨을 뱉었다.
이제 편지는 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글자를 다 읽을 시간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아이는 읽었던 부분을 다시 한번 눈으로 곱씹으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세렌, 널 언제나 사랑한단다. 그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모습이더라도 어떤 실패를 하더라도 말이야.보고 싶구나, 내 딸. 사랑한다.]
옆 페이지에는 색이 채 다 칠해지지 않은 그림이 있었다. 세렌은 이제 익숙하게 색연필을 이용해 선 밖으로 색이 삐져나오지 않도록 천천히 색을 칠했다.
이상하게 생긴 동물이었다. 코뿔소 같기도 했고 또 거대한 하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리 준비해둔 색연필을 꺼내 색을 다 칠하자 짧은 빛과 함께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이게 뭘까요? 아빠. 마수인가요?”
“……그래, 마수구나.”
크와앙!
깜찍한 울음소리를 낸 헤르타가 폴짝폴짝 편지가 적힌 일기장 위를 뛰어다니더니 세렌의 손가락을 뿔로 살짝살짝 건드렸다. 세렌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헤르타가 다시 폴짝폴짝 뛰었다.
“이건…… 헤르타라는 마수란다.”
밀라이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헤르타는 이제 북부 땅에서 더는 볼 수 없게 된 마수다. 카리나가 만들었던 헤르타가 땅으로 돌아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지다하카가 하론을 흡수하며 헤르타는 완전히 북부에서 사라졌다. 이걸 보는 건 수년 만이다.
그림이 사라진 자리에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아이는 헤르타라는 마수란다. 엄마의 친구였어. 아마 아주 작은 모습이겠지만…… 함께 북부를 지킨 용감한 마수였단다. 엄마의 친구를 세렌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어.내년에도 잊지 말고 엄마를 찾아 주렴. 사랑하는 나의 세레누스, 네게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아이가 천천히 책을 덮었다.
손바닥을 내밀자 헤르타가 폴짝폴짝 뛰어 세렌의 손바닥에 올라왔다. 헤르타가 이리저리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세렌이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헤르타는 얼마 가지 못해 빛무리가 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너무나도 짧은 만남이었다.
글을 읽을 때는 행복하다. 그림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이 몰려왔다.
세렌이 천천히 밀라이언의 품에 안겼다.
“아빠.”
“그래, 아가.”
“……엄마가 보고 싶어요.”
밀라이언이 세렌을 마주 끌어안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아이가 가장 염원하는 것을 밀라이언은 줄 수가 없었다.
“그래, 아빠도…….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어.”
그가 파르르 떨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보고 싶지만, 결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때때로 생각한다. 당신이 살아 있었으면 이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을지. 셋이 함께 침대에서 누워 자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할지.
수십 수백 번을 그리워해도 카리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간임이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신이 싫었다. 감히 그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축복 따위가 그들의 행복을 이렇게 갈라 버렸으니까.
“세렌의 생일 파티가 끝나면 위령제가 시작되기 전에 엄마에게 가 볼까?”
“네…….”
세렌을 조심스럽게 눕히며 밀라이언이 아이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얼른 자야지, 엄마는 오늘도 분명히 세렌의 꿈에 나올 테니까.”
“네……!”
세렌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밀라이언은 책을 정리해 주고 촛불을 껐다. 세렌이 잠이 들면 그는 책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일기장을 펼칠 것이다.
일 년에 단 두 번, 세렌의 생일과 제 생일에만 펼치기로 했다. 그러면 50년은 그녀의 편지를 읽을 수가 있을 테니까.
그는 천천히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이윽고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퍼졌을 때, 밀라이언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그는 짧은 숨을 뱉었다. 언제나 이 일기장을 펼치기 전에는 심장 소리가 빨라진다.
네가 어떤 마음을 내게 남겼을지 궁금해서.
네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지 궁금해서.
네가 정말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실감하게 돼서.
그래서 밀라이언은 이 페이지를 여는 시간이 너무나도 떨렸다. 그럼에도 기대가 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마수를 앞에 두고도 떨리지 않던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대는 것을 느꼈다.
몇 장의 페이지를 넘기자 처음 보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고 읽고 읽어서 닳아 버린 앞 페이지는 이제 글자가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끄트머리만 잡아야 할 지경이었다.
[안녕, 밀라이언.좋은 아침이에요, 아니다. 당신이라면 분명히 밤에 보고 있을 테니까 좋은 밤이겠네요. 맞죠?]
인사말을 가만히 읽던 밀라이언이 낮게 웃으며 이제는 너무 봐서 낯익은 글씨체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응, 맞아.”
정확히 따지자면 자정이 넘은 새벽이긴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밤이라고 한다면 이 새벽 시간조차 결국 밤일 수밖에 없으니까.
[잘 지내고 있나요? 식사는 잘하고 있고요? 여전히 저를 그리워하고 있나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당신 성격상 분명히 초반을 제외하면 일 년에 두세 번만 봐야겠다고 정했을 테니까 7-8년 정도 되었을까요?]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도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 정확히 밀라이언은 첫 일 년을 제외하면 그녀의 일기장을 자신의 생일과 세렌의 생일에만 열어 보고 있었다.
밀라이언은 헛웃음까지 삼키며 손바닥으로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나 자신을 잘 아는 그녀를 더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마다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이렇게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을 텐데.
“잘 지내고 있어.”
설령 잘 지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일기장을 열었을 때만큼은 잘 지낸다고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줬듯 자신도 그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이제 괜찮아요, 외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익숙해졌어요. 지금쯤 분명히 어딘가에서 당신을 보고 있을 테니까 제 걱정은 이제 하지 마세요.세렌은 쑥쑥 자랐죠? 당신은 주름이 조금 늘었으려나요? 흐뭇하게 아이를 보고 있을 밀라이언의 모습이 눈꺼풀에 선해요. 여전히 몬스터를 잡느라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이제 세렌도 있으니까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일기장을 봐도 돼요. 이 일기장에는 마법을 걸어놨어요. 당신이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마법을. 그러니까 아쉬움은 일기장으로 달래고 나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만나러 와줘요.
세렌이 쑥쑥 자라서 멋진 레이디가 되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장성할 때까지 즐기면서 살아요.
날 잊어도 돼요.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도 괜찮아요. 나는 그저 당신이 행복해지기만을 언제나 바라니까요.]
매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밀라이언이 씁쓸하게 웃었다.
감히 어떻게 잊을까. 가장 강렬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그의 몸 정 가운데를 꿰뚫어 버린 그녀를. 그의 삶의 중심이 되어 버린 제 삶을 말이다.
“마음 아픈 소리를 하네, 당신.”
밀라이언이 읊조렸다.
“당신은 몰라도 난 안 돼. 나는 당신처럼 마음이 넓지 않아서 당신이 나를 잊는 것도 다른 남자 만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누구 마음대로 감히.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한, 당신은 나한테서 눈 떼지 마.”
밀라이언이 상체를 숙여 일기장에 가볍게 이마를 가져다 대며 어리광을 부리듯 이마를 문질렀다. 서걱거리며 까슬까슬한 종이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렌이 성인이 되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떠나려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녀가 말했으니 밀라이언은 지킬 수밖에 없다. 그녀의 말은 곧 법이니까. 그는 충실하게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내 거잖아, 나도 당신의 거고.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카리나.”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몇 번이고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는 점점 강해지고 쑥쑥 자라는데 밀라이언은 줄곧 그 시절 그 세계 그녀가 있던 순간에 머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차례 마음을 달랜 그가 천천히 시선을 다음 문장으로 내렸다.
[밀라이언,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침울해하지 말아요. 물론 나는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조금 실망하고 울지도 몰라요.……사실 조금은 아니고 조금 많이요.]
밀라이언의 동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가 급히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물론 당신이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건 정말이에요. 나 때문에 여전히 괴로워하고 슬퍼한다면 나는 무척 힘들 거예요.아, 벌써 종이의 하얀 부분이 별로 남지 않았네요. 매번 이렇게 된다니까. 밀라이언, 설마 세렌에게만 기적을 남겨 뒀다고 서운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밀라이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서운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아마도.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이 제가 죽고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잘했어요, 밀라이언. 잘 견뎠어요. 대견해요. 여기까지 참고 읽어주러 와줘서 고마워요. 외롭고 힘들었죠? 세렌 앞에서 괜찮은 척하느라 참아야 하기도 했을 거예요. 당신에게만 짐을 맡겨서 미안해요.]밀라이언의 숨이 턱 멎었다. 그가 애써 모른척하려고 했던 부분을 그녀가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가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다음 줄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쓰던 방의 침대 밑에 작은 틈이 있어요. 틈에 손가락을 넣고 열어 보면 안에 선물을 준비해 놨어요. 지금껏 밀린 생일 선물 대신이에요.내 세상의 유일한 빛이었던 당신이 세렌의 아버지여서 기뻤고 내 남편이어서 행복했어요. 언제나 강한 아버지일 필요는 없으니까 가끔은 제게 와서 약한 소리 해 주세요.
밀라이언, 사랑해요.]
그렇게 일기장 한 장을 꽉꽉 눌러 채운 편지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