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
>18 화>
* * *
“스승님, 갑자기 북부로 가신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겨울의 북부는 위험합니다.”
“급히 출발하면 아슬아슬 가능해. 한동안 네가 의원을 맡아 두거라. 빨라도 내년 봄에나 올 것 같으니까.”
여느 때처럼 아벨리아 레오폴드의 상태를 살피고 돌아온 녹턴이 뜬금없이 짐을 싸고 있는 스승, 윈스턴을 말렸다.
“가는 도중에 겨울이 될 겁니다.”
좁아진 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지금 북부로 갔다가 운이 나쁘면 내리는 눈 사이에 갇힐 수도 있었다.
겨울이 되면 마수가 들끓는 곳이 아니던가.
심지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겨울의 북부는 검문소를 걸어 잠그고 웬만해선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갑자기 왜 떠나십니까?”
“예술병에 걸려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가씨가 하나 있네. 북부로 간다고 해서 떠났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북부에는 예술병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의원이 없을테니.”
필요한 약초와 약, 도구만 네모난 가죽 가방에 집어넣은 윈스턴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작스러운 결정에 녹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위험합니다, 스승님. 애초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예술병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종류가 아닙니까.”
“하긴. 나도 의원 인생 처음 보는 종류였지.”
하얀 가운에 중절모를 푹 눌러 쓴 윈스턴의 뒤를 따라 녹턴이 나왔다.
“마차를 불렀다. 곧 올 거야.”
“짐은 제가 들겠습니다.”
“됐다, 됐어. 내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가지 말라고 말을 해도 이미 마음을 결정한 고집불통 스승은 그의 만류를 들어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멀리서부터 마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곤란한 표정의 녹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승님께서 가셔서 손을 쓰면 살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을 대기에는 이미 좀 늦었다. 안된 일이지만 거의 죽는다고 봐야겠지. 만에 하나 살 시간을 좀 늘린다고 해도…….”
윈스턴이 말을 아꼈다.
뭐든 나쁜 일은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아니었다. 확신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찌 떠나려 하십니까.”
“그 아가씨 제법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았는데, 그 지경이 됐다는 건 부모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거야.”
“매정한 부모였나 봅니다.”
“쯔쯧, 관심만 좀 있었어도 그 꼴까진 안 됐을 것을.”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흔한 마당에요.”
녹턴이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사이 달려온 마차가 윈스턴과 녹턴의 앞에 섰다.
녹턴이 가방을 의자에 올렸다.
문을 붙잡고 마차에 한 발을 디딘 그가 뒤를 돌아봤다.
“너도 자만하지 말고 환자는 무조건 공평하게 대하도록 해라. 의원은 잠시 맡겨 둔 거니 돌아 왔을 때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윈스턴이 눈을 슬쩍 흘기며 이윽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녹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근데, 그 환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뭐더라. 무슨 리나였는데. 차트에도 리나인가 뭐라는 이름만 적고 가서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구먼. 일단, 잘 부탁한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녹턴이 허리를 굽혔다. 다시 고개를 든 녹턴의 미간이 좁아졌다.
‘리나……?’
문득 한 달 전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무심한 표정의 여자가 눈앞에 스쳐 지났다.
소식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영 아니던데.’
녹턴이 미간을 좁혔다.
“시한부라니, 아니겠지.”
리나라는 이름이나 애칭이 얼마나 흔하던가.
이윽고 제 생각이 우스웠는지 고개를 흔든 녹턴이 허름한 의원 안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카리나가 백작령에서 떠난 지 한 달이 지난날이었다.
* * *
카리나가 집을 나간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아벨리아도 슬슬 카리나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페르던도 한 번씩 누님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며 말을 꺼냈다.
작은 줄 알았던 그녀의 빈자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함께 식사할 때 시녀들은 버릇처럼 카리나의 식기를 놓았다가 놀라서 다시 치우곤 했다.
“아직 카리나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까?”
“다시 의뢰를 하는 사이에 수도 인파에 섞였는지, 찾고 있다는 보고서 한 장을 제외하곤 더 소식을 받지도 못했다.”
인프릭의 질문에 무심한 표정으로 쌓인 서류를 처리하던 레오폴드 백작, 카시스가 말했다.
인프릭은 근무가 없는 날이면 그를 도와 백작가의 일을 처리했다.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인프릭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병사를 푸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미 수도를 넘어갔다면, 사병을 푸는 건 무리다. 움직였다가 황성이 괜한 오해를 하면 곤란해.”
그러면서도 카시스 레오폴드 백작은 서류를 놓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오늘 아침도 소식이 없는지 물어봤으나 집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군.”
카시스는 카리나를 탓하듯 혀를 차면서도 굳은 얼굴을 펼 줄은 몰랐다.
눈 밑에 옅게 자리 잡은 눈그늘은 그가 밤잠을 설쳤기 때문에 생긴 건지 아니면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입니다. 괜히 무슨 일을 당하진 않을지.”
카시스가 제 집무실 책상을 천천히 훑었다.
가족이 그려진 초상화와 인프릭, 아벨리아, 페르던의 개인 초상화가 작은 액자에 담겨 있었다.
‘……카리나의 초상화가 원래 없었던가?’
카시스가 그제야 깨닫기라도 한 듯 초상화가 담긴 액자를 뒤적이다가 미간을 좁혔다.
물끄러미 초상화를 바라보던 카시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프릭.”
“네, 아버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 테니, 일을 처리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부드럽게 웃은 인프릭이 카시스에게 묵례했다.
카시스가 인프릭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답답한 집무실을 나섰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천천히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 방은 알고 계셨네요, 어머니 아버지.”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느냐.”
“지난 몇 년 한 번도 찾아오질 않으시기에 잊으신 줄 알았지요.”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다운 대화를 떠올리며 카시스의 발걸음이 천천히 2층 끝에 향했다.
아벨리아는 아프니까 의원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방을, 인프릭은 매일매일 출근을 해야 하니 두 번째 방을, 페르던은 동 생이니까 세 번째 방을 주었다.
자연스럽게 카리나의 방은 계단에서 가장 먼, 복도 끝의 방이 되었다.
“아버지, 저도 저쪽 방이 좋아요. 여기는 계단이랑 너무 멀고 무서워요.”
카시스의 머릿속에 어린 카리나의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가 스쳤다.
그때 뭐라고 말했더라?
언니가 되어 어리광을 피우지 말라며 호되게 혼을 냈었다.
기어코 울음을 터뜨려 버렸지만 카리나도 동생이 생겼으니 양보를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좀 멀긴 하군.”
특히 안쪽으로 갈수록 불을 밝히는 등잔이 드물어져서 길이 조금 어두웠다. 어린 나이에 무서워할 법도 했다.
제대로 이곳을 와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대개 드나들던 것은 아벨리아의 방이었고 가끔 인프릭을 부르러 인프릭의 방에 가곤 했다.
페르던의 방에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카리나의 방은 아니었다. 그 방을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가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카시스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리나의 방 앞에 선 카시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잘 정돈된 방은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옅은 꽃 향이 머물러 있었다.
카리나의 방에 발을 들인 카시스가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문을 닫자 복도 끝이어서 그런지 한층 적막했다.
카시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카리나의 책상에 다가갔다.
생활감이 제법 묻어 있는 책상은 다 큰 성인이 쓰기엔 조금 빠듯할 정도로 작아 보였다.
“필요하면 말을 할 것이지.”
못마땅하게 혀를 찬 카시스가 색이 바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카리나로선 익숙하고 정이 들어 버린 책상을 그저 쭉 사용한 것 뿐이었지만 카시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만 보였다.
달은 연필과 새 연필이 연필꽂이에 꽂혀 있고 잘 말린 붓도 몇자루 꽂혀 있었다.
책상 중앙의 긴 서람을 열어 보니 사용된 종이 몇 장이 나왔다.
풍경을 바라보며 연필로 선을 그은, 색을 칠하지 않은 그림의 미완성품이었다.
“……이건.”
카시스가 숨을 삼켰다.
그 안에 그려진 것은 카리나의 방 창문에서 보이는 언덕에 앉은, 카시스를 포함한 가족이었다.
아마도 재작년쯤에 막 봄이 되어 아벨리아의 몸 상태가 좋아져 간단히 바람을 쐬러 나갔던 때를 그린 듯했다.
“…….”
카시스는 그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보는 순간 기묘한 쓸쓸함을 느꼈다.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는 한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카리나가 없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