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0)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5화
* * *
“쓸데없이 개입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카리나.”
“……음,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지다하카가 퍽 마뜩잖다는 낯으로 카리나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원하지도 않는 신의 자리에 앉아서 이런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긴 잠에 들려던 그 순간, 그는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계에 소환되어 있었다는 것이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예술의 신이 그에게 소송을 걸었다나 뭐라나.
내용은 간단했다. 당연히 정해진 운명만을 살고 갔어야 할 카리나라는 인간을 아지다하카가 권력을 남용해 인간을 살려 질서를 어지럽혔고 자신의 운명에 있어야 할 아이를 강제로 뺏어가 영역을 침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연히 카리나도 그 당사자였기 때문에 영혼이 소환되었다.
그러나 소송은 생각보다 흐지부지, 그것도 아지다하카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유는 하나였다. 재판을 열 필요도 없이 카리나가 예술의 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의 멱살을 붙잡고 근처에 있는 판사봉으로 그의 몸을 사정없이 때려 대며 울분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계에서도 갓 죽은 인간의 영혼과 드래곤의 영혼을 불러들여 재판을 열어본 것도 드문 일일 텐데 심지어 예술의 신이 침을 뱉어가며 ‘가장 소중히 여긴 인간’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그녀가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하고 있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예술의 신도 제가 아끼고 있던 카리나에게 당한 일이 제법 충격이었던 모양인지 그 뒤로 몸져누웠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지다하카가 ‘질서를 어지럽혔다’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져서 그는 인력난인 신계의 신이 되는 벌을 받기로 하고 카리나는 한동안 그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넌 지루하지도 않나? 앞으로도 수십 년은 더 이 무료한 일상을 봐야 할 텐데. 너는 닿지도 못하고 닿을 수도 없는 일상을.”
“음, 하루하루가 이렇게나 다른데 지루할 리가요. 닿지 못해도 괜찮아요.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니까요.”
그리고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 주는 그가 있는데 불행할 리가.
그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그녀는 볼 것이다. 언젠가 그가 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인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야.”
“아지다하카도 매일 세렌이 성장하는 거 보면서 흐뭇하게 고개 끄덕이시면서.”
“……크흠, 대부로서 대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멋쩍은 듯 헛기침한 아지다하카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푸흡…….”
“큭큭…….”
서로의 행동이 퍽 우스웠는지 두 사람이 크게 웃으며 연못에 비치는 밀라이언과 세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이를 품에 안고 새근새근 잠이 든 밀라이언은 최근에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더 편안해 보였다.
카리나가 그 모습을 눈으로 더듬으며 손끝으로 연못을 톡 건드렸다.
작은 파문이 일며 흔들리던 수면이 이윽고 서서히 잔잔해졌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온다.
그리고 또 봄이 찾아올 것이다.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하며 더 이상 슬프지만은 않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계절이.
Side Story 2. 만약에
카리나 레오폴드는 특출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귀족가의 둘째였다.
문무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후계자 인프릭과 미워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쌍둥이 동생 사이에서 눈에 띄지도 않고 특출나지도 않으며 다른 형제들과 부모님과는 다르게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미운 오리 새끼.
하지만 카리나는 그것에 대해 유별난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에는 서운하고 서글프기도 했지만, 몇 년 전에 꿈을 꾼 뒤로는 마음이 아주 평온해졌다. 그냥 어쩐지 그들과 자신이 남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10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카리나는 아주아주 긴 꿈을 꾸었다. 잠들기 전에는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눈을 뜨고 나니 일요일 저녁이었다. 이틀을 꼬박 잠에 든 것이다. 그리고 누구 하나 그런 그녀를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애초에 몰랐던 것이겠지, 가족 중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본래라면 서운하고 서러울 법한 일인데도 그리 서운하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제 마음을 나서서 정리해 주고 간 것처럼.
꿈속에서 카리나 레오폴드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른이 되었고 약혼을 했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약혼자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삶에는 슬픈 일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매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을 몸소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만, 꿈속에서 그녀는 ‘예술병’이라는 병에 걸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우는 그 모습에 심장이 아릿해지고 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을 보며 카리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꿈을 꾸고 일어나서 가장 놀랐던 것은 꿈속에서 봤던 미래가 현실에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회귀를 한 걸까?’
카리나는 깨작거리며 입에 넣던 샐러드를 몇 번 우물우물 씹다가 내려놓았다.
“저는 식사를 끝냈으니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그러려무나.”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와 무심한 눈빛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의 내적 심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들, 사실 부모님이 요구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카리나가 희생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여동생인 아벨리아를 챙겨 주길 바랐고 페르던을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봐주고 감싸 주길 바랐다.
꿈을 보았다고 해서 카리나의 성격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가족에 대한 기대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녀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카리나는 더이상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아니었다. 귀찮으면 하지 않았고 굳이 동생들의 투정을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려고 하지 않았으며 좋고 예쁜 말만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 내일 나 외출하고 싶은데 내일 시간 돼요? 아침 먹고 점심쯤 나가면 될 것 같아요!”
아벨리아의 말에 막 식당을 벗어나려던 카리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 내일 일정 있고 귀찮아, 나중에 가자.”
예전이라면 어물쩍거리다가 따라가게 됐겠지만, 카리나는 순전히 자신을 이유로 들어 무심하게 거절했다.
“에, 하지만! 어디 가는데요?! 저랑 같이 가면 되잖아요!”
“싫어.”
“카리나, 동생이 이렇게 부탁하는 데 시간 좀 내 보렴.”
“싫어요.”
그녀의 거절에 부모님의 눈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너는 언니가 돼서…….”
“죄송해요, 언니이기 이전에 저도 사람이라 피곤한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어머니. 그럼 더 하실 말 없으시면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린 시절에 꾼 꿈은 그녀는 조금 더 스스로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차피 평생 돌아봐 주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힘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카리나는 그 꿈을 꾼 날 이후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이 꿈을 꾸고 나서 며칠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투정을 내뱉고 어머니에게 실제로 뺨을 맞았을 땐 충격이 너무나도 심했지만, 부모님을 그리는 금기를 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예술병이 발병하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그림을 완성하면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되살아 났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창조의 예술병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그림을 그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카리나는 종종 과거를 더듬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최근에는 윈스턴이라는 의원을 만나기까지 했다. 여전히 예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담담하게 짚어 주며 그녀를 염려했다.
그녀는 성인이 되면 북부로 떠날 생각이었다. 카리나는 올해 17살이 되었으니 앞으로 3년이 남았다.
그녀는 꿈속에서 남자가 죽어 가는 자신을 끌어안고 서럽게 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약혼식에서 만났던 약혼자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그런 열정적이며 불 같은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카리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저녁, 밀라이언 페스텔리오가 연통도 없이 그녀의 저택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 * *
저녁 식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카리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방에 틀어박혀 저녁 식사도 거르고 있던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날이었다.
“……페스텔리오 공작?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식사를 하다 말고 급히 나온 레오폴드 백작은 흐트러진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사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체통도 없고 예의도 없는 방문이었다.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는 서늘한 시선으로 레오폴드 백작을 훑곤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한층 차분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
“식사 중이셨던 모양이군요.”
레오폴드 백작은 손에 쥐고 있는 포크를 내려다 보며 짧게 탄식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급히 나온다고 식기를 두고 오는 것도 깜빡했다. 레오폴드 백작이 재빨리 식기를 사용인에게 건네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밀라이언은 언뜻 예의를 차려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하는 내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답지 않게 정신사나워 보였다.
그는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고 사람에게 건성인 사람이었다. 전대 공작처럼 성격이 대놓고 괴팍하진 않아도 한번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봐주는 법이 없었다. 북부의 철옹성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조금 저급하기는 해도 이런 말이 딱 어울렸다.
‘뭐 마려운 개 같은 느낌이군.’
그 탓에 레오폴드 백작은 조금 무례한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전전긍긍하지 못하는 것이 딱 그런 꼴처럼 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식사에 참석하셔서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는 분명히 레오폴드 백작가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